제 23화 왜국(倭國)의 객(客)
츰츰한 해무가 낀 새벽.
솨아아ㅡ.
짠 내가 물씬 풍기는 바닷바람이 저 멀리서부터 불어왔다. 양식으로 올려진 커다란 건축물들 사이로 보이는 흰 삼각돛들이 인상적이다.
별세계다. 보았던 산과 들이 이어지는 중원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는 서역에서 들어온 군선들이. 그리고 서역의 각종 문물을 들여와 사고파는 거리가. 회백색 석제 건물 사이로 바다의 풍경을 비추는 유리창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항만으로 쉴 새 없이 오가는 짐들은 도시의 활기를 여실히 보여준다. 짐 마차를 매달은 채 투레질을 하는 말과 간혹 소음을 내는 자동차도 눈에 띄었다.
지금껏 봐 왔던 중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도시.
지금에 와선 청도(靑島)만이 가진 풍경이라 할 수 있겠지.
"드디어 도착했군."
"진 빠져 죽겠습니다. 아주."
"일단 본단으로 가서 쉬자꾸나."
"…밥부터 먹는 게 어떻습니까."
설화의 말이 끝나자 무진이 보기 드물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녀가 심각한 사안도 아닌 데 저리 짧게 말하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핼쑥해진 그녀의 표정인 기진맥진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가히 해가 서쪽에서 떠오를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뭘 먹습니까요?"
"고기. 무조건 고기로 먹읍시다. 그럴 거지요?"
그런 와중에 짐꾼으로 따라온 소년은 아까부터 아예 말이 없었다.
청도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데는 꼬박 열흘이 걸리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무진에게 열 번의 수련을 받았다는 소리였다.
설화는 그들이 매일 밤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허유는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소년이 뼈 빠지게 굴렀다는 사실도 알고.
애당초 같이 다니는데 날마다 수척해지는 표정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무진을 제외한 둘은 소년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소년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들?"
"아니…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진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더니, 사람이 꽤 많이 모여 있는 식당 한 곳을 찾아내고는 일행에게 말했다.
"저곳이 좋겠구나."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양각된 목재 벽과 간판에, 화려한 색채로 칠해져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게였다.
그런 파격적인 외관 덕분일까.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꽉 차다시피 북적였다.
"오랜만에 양식을 먹겠어."
"향이 조금 낮섭니다요."
"그렇겠지. 이국의 요리인 모양이니."
무진과 허유가 설화가 후들거리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빨리 들어갑시다."
그 말에 일행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청량한 종소리가 울리고, 점원이 나와 일행을 빈자리로 안내했다.
다른 자리를 보니 기다랗게 가공된 고깃덩이를 삼지창 같은 식기로 찍어 먹기도 하고, 자그만 칼로 고기를 잘라 고풍스럽게 입으로 넣는 이들도 있었다.
입은 행색이 부유한 것을 보니 장사로 돈을 크게 번 이들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목구비가 특이한 서역인이었고.
점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파는 음식이 무엇인지 이것저것 설명을 하는데, 무진은 옆자리에서 먹는 음식을 그대로 주문하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이 부아스트라는 것은 식감이 참 특이합니다요."
"점소이가 분명 부어스트라 발음하지 않았더냐?"
"아이참,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요."
허유가 먹는 부어스트라는 것은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걸 전부 뭉뚱그려 소시지라 부른단다. 솔직히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무진은 그러려니 하며 자신이 주문한 죽을 떠서 먹었다.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 향신료가 들어간 것이었는데 맵기가 사천의 요리들과 버금갔다.
인상을 찌푸리며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유리창 바깥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짐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움직이는 마차도 보였다.
연초를 피우는 이들도 가끔 보였는데, 문뜩 품 안에 두었던 다 비어있는 연초 곽이 생각났다.
'본단으로 향하기 전에 연초부터 사야겠군.'
한 번 피우다 보니 향이 그리웠다.
항상 골방에서 연초만 뻑뻑 피워대던 노인의 체취가 그와 닮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허유처럼, 전대의 천마인 자신의 아버지를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릴 적 자신과 자주 놀아주기도 하던 영감이었는데.
상승군이 쳐들어왔을 때 앞으로 나섰다가 가장 먼저 죽었더랬다.
무진의 회상은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계속 바뀌는 창밖을 바라보면서다. 햇살이 비치는 활기찬 거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던 도중, 무진의 눈이 잠시 한 곳에 멈췄다.
"저도 한 입만 줘 보십시요. 어차피 당신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 문주님이 사 주신 건데 왜 그럽니까요. 그러게 잘 고르라니까, 이상한 거 고른 건 아가씨면서?"
청도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한 둘.
그 사이를 가르고, 무진이 말을 뱉었다.
"허유. 둘을 잘 보고 있어라. 잠시 좀 다녀오마."
"어딜 가십니까요?"
"일이 생겼다."
무진은 품에서 지갑 하나를 꺼내 탁상 위에 올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또 오세요." 하는 점원의 인사가 들린다. 밖으로 나오니 오가는 행인이 많았다.
무진은 인파를 해치며 나아갔다.
사박ㅡ.
검은 무복에 복면을 쓴 이가 길 한가운데에 서서 무진을 바라본다. 타인들의 시선을 절로 잡아끌 복장이었으나, 행인들은 그를 무시하듯 허공을 응시하거나 저들끼리 떠들며 지나간다.
불어오는 바람.
떠밀리는 인파.
달리는 마차.
유수가 바위를 피해 흐르듯 전부 자연스레 남자를 비껴갔다.
세상이 무관심을 표하는 듯하다. 그러한 광경에 느껴지는 이질감과 불쾌감에 무진의 눈매가 좁아졌다.
저벅ㅡ, 저벅ㅡ.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듯, 어두운 골목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진은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는 번잡한 인파의 소리가 벽 사이서 뭉개진다.
단지 한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세상과 동떨어지는 듯한 느낌. 고수의 기감이 그리 느꼈다. 착각일 리가.
"특이한 수법을 쓰는군."
"그리 어렵지 않은 수법입니다. 기를 조금만 다룰 줄 안다면 쉽게 간파하지요. 당신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벽 사이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여성과 남성의 사이에 있는 듯한 목소리. 규화보전이라도 익히려 한 것일까.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진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진법을 파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을 따라오는 도중 일부러 내보인 틈에도 반응하지 않았으니, 애당초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
본래는 의화단에 돌아가기 전에 척살할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앞에 나온다면 무언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이겠지.
"중원인의 억양이 아니야. 자네는 누구지?"
"처음 뵙겠습니다. 귀인이시여. 황국의 타지 카라(タヂカラ)입니다. 이름은 없습니다."
황국이라.
무진이 쓰게 웃었다.
본래 중원을 지칭하여야 했을 단어일진데. 확실히 몇 번이고 패배의 쓴맛을 맛본 청을 칭하기엔 격이 높았다.
무진은 그보다도 남자가 말한 타지카라라는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그것을 재빠르게 인지하였는지, 남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닌자라고도 불리옵니다."
"왜국(倭國)의 살수로군."
왜라고 불린 것이 불만이었을까. 뚫린 구멍으로 드러난 남자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분노 또한 결국 사적인 감정에 불과한바.
그는 빠르게 표정을 회복하고는, 무진에게 말했다.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도움이라? 뒤를 졸졸 밟던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남자의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둥그레진다. 자신이 들켰다는 사실이 놀라운 모양인데, 무진에게는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알긴 아는군."
"허나, 귀인께 해가 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건 들어 봐야 알겠지."
곧, 남자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 * *
"오야붕. 산동 동부의 아편굴을 모두 먹었습니다."
"수고했다. 악가 쪽에선 연락이 있었나?"
"묵묵부답입니다."
"...가망이 없군."
두목이 화를 식히려는 듯이 차를 홀짝였다. 한시가 급하건만, 난데없이 악가에서 일이 터져 버렸으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악가 놈들이 종적을 감춘 이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산동의 사업들을 끌어올 수 있었으나, 결국 그뿐.
가장 중요한 관리들과의 연줄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니 손해가 막심하다.
운송해야 하는 물류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전부 남경으로 갈 것들이었다.
일정이 하루 지체될 때마다 대계가 며칠이고 미뤄진다.
"어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산동의 관계를 악가 놈들이 꽉 쥐고 있던 탓에, 어지간한 돈으로는 턱도 없을 겁니다."
"양가장은 이미 물 건너갔고. 다른 문파를 포섭해야 하는데. 어디 좋은 곳이 없겠나?"
문파. 그놈의 문파가 문제다.
중원의 뒷세계는 어딜 가던 그 지역에 깊게 뿌리내린 문파가 있어,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사업 자체가 힘들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던데 이곳은 낮이건 밤이건 칼 든 무림인이 쫓아다닌다. 심지어 대부분은 협객이랍시고 물불 가리지 않는 젊은것들.
그런 이들이 더러운 일에 손을 대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당연하게도, 곧바로 강호의 역적으로 찍고선 죽이려 든다.
실제로 그렇게 죽은 동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이쪽도 이름 있는 문파와 제대로 관계를 맺은 후에 명분을 업어야 해결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겨우 연줄이 닿아 악가와 손을 잡고 일을 진행하려는 차였는데, 놈들이 하필 황군에게 걸리고 만 상황이었다. 멍청하게도.
덕분에 두목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중, 수하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둥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청도에 급격하게 성장 중인 문파가 하나 있습니다."
"성장 중이라…. 한창 진통을 겪을 시기야. 뒷줄을 대기 딱 좋겠군. 어디지?"
"의화문이란 곳입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문주가 아직 공식 석상에 보이지도 않았다는 점인데...."
흐음....
수하의 말을 들은 두목이 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래. 급한데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지. 청도로 가야겠다. 바로 채비해라."
"그러겠습니다."
두목은 곧장 일어서 제 뒤에 있던 갑주와 두 자루의 도(刀)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뜩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제 수하를 향해 돌아보더니.
"그러고 보니, 제녕에서 악가주를 몰아붙인 놈의 용모파기는 나왔나?"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실력 있는 그림쟁이를 하나 잡아다가, 현장에서 도망친 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 놓았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다.
수하는 자신 있게 답했다.
"예. 어제 마쳐놓았습니다."
"그 새끼 면상, 확실히 기억해 놔."
"알겠습니다."
"가지."
얼마 후, 제남(齊南)에서 한 무리가 청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 끝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