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22화 (23/29)

제 22화 왜국(倭國)의 객(客)

불 한점 들어오지 않는 거리는 삭막하기만 하다.

항구와 맞닿은 이곳에는 중원인보다 왜놈들이 떼거지로 모여 살고 있다. 범의 아가리 안이라는 소리다.

스스로는 극도(極道)라 칭하지만 왜국(倭國)에선 사파쯤 되는 이들이란다. 얼마 전까지는 정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물이 있다 하던가.

종이로 된 여러 문서들을 품에 안고서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다. 주로 빚과 그 차용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더 구석진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까 전 삭막함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거리가 눈에 띄었다.

창녀촌.

흑도들이 으레 그렇듯 왜놈들도 크게 다르진 않은 모양이다. 사람의 원초적인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상품들. 그가 가장 자신있는 업종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곳에 불려와 있는 것이겠지. 가장 으리으리한 건물의 앞쪽으로 가자 온몸에 문신을 새긴 왈패놈이 다가와 말했다.

"들어가라. 오야붕이 기다리신다."

"알겠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훅 풍기는 싸구려 연초와 아편의 냄새. 환각제에 취한듯 몽롱해지는 정신은 단지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얇은 창호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리는 외설적인 교성. 모가지 너머로 술을 마구 퍼 넘기는 왜놈들의 방탕한 자세가 의식을 교란한다.

과장된 몸짓과 분위기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부 일부러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빨리 걸어라."

아니나 다를까, 그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지는것 같자 곧바로 꾸중을 날린다.

분명 자신은 협상을 위해 왔을 터인데 벌써부터 주도권을 두고 싸움을 거는 형색이다.

아니, 싸움이라고 하기도 뭣한가. 산동에 왜놈들이 들어온 이후 인근의 문파들이 모조리 망해 버렸으니까.

이젠 산동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면 장사는 꿈도 꿀 수 없다. 그리 따져 보니 협상보다는 항복인 셈이다.

본래는 비싼 돈을 치르고 양가장에라도 신변을 의탁해야 했으나, 양가는 지금 악가와의 전쟁을 치루느라 여념이 없고.

게다가 왜놈들의 세력은 어지간한 중소 문파들과 비등한 상황. 자신같은 일개 상인은 맞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후우….

남자는 긴장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추잡한 환락의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는 복도. 복도를 밝히는 등불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깊은 심연에라도 들어온듯

식은 땀방울이 남자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곳이다. 들어가서는 예를 차려라."

"알겠소."

드르르륵ㅡ.

현란한 파도와 각종 물고기들이 그려진 문이 양 옆으로 펼쳐지고. 그 사이로 야쿠자들의 두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리가 하얗게 샌 백발의 노인이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 피부 사이로는 일자로 그어진 검상 하나가 길게 나 있었다.

뒤에 걸린 두 자루의 일본도와, 예식이란 고상한 단어 따위와는 거리가 먼 듯한 상흔 투성이의 갑주는 두목이 살아온 세월을 증명한다.

자그만 화분 위에 우뚝 선 소나무 분재(盆栽)처럼, 거칠고 구불구불한 인생. 고난의 흔적은 곧 그 사람이 가지는 위압감과 같은 바.

"왔나."

두목이 자리에 앉은 채로 남자를 맞이했다.

지금껏 겪어본적 없던 긴장이 느껴졌다. 왜의 무인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눈 앞의 노인이 고강한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만은 뼈저리게 느껴졌다.

"아나하구미(我那覇組)의 구미초(組長)를 뵙습니다."

"음."

남자가 머리를 조아려 부복했다.

"앉지."

두목이 턱짓으로 남자에게 착석을 권유한다. 거절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래서도 안됐다. 남자가 방석 위에 앉자 두목이 조용히 차를 따라 건넨다.

절제된 다예(茶藝). 옆으로 보이는 정원은 입구에서 보았던 환락과는 동떨어진 외딴 섬처럼 느껴졌다.

"쓸데없이 돌려 말하지 않겠네. 장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내용을 말해보게"

"…아편과 고급품인 헤로인 등을 취급합니다."

"좋군. 돈벌이엔 마약만한게 없지. 얻은 수익이 꽤 많아 보이는데."

"예…"

"넘기게."

순간 남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산동의 신흥 강자라지만, 난데없이 사업을 달라니.

심지어 매각도 아니고 넘기란다.

"…그건 안됩니다, 구미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넘기기 싫다 이 말인가?"

"저는 뭘 먹고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업장을 계속 관리하게 해 주지. 이래도 불만인가?"

"차라리 수익의 일부를 상납하겠습니다. 그러니…"

남자가 항변을 이어가던 도중, 두목이 난데없이 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제 앞의 상을 향해 크게 내리친다.

쿠우웅ㅡ!!

순간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울리고. 그 단단하던 석재 차상(茶床)이 쩍 갈라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남자는 순간 크게 놀라 머리를 감싸고 쪼그려 앉았다. 두목은 그런 그를 한번 흘기고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착각하는듯 하는데, 지금 자네는 나와 대화를 하러 온게 아니야. 알아들었나?"

"……"

두목이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카시라ㅡ!!"

귀가 떨어져나갈것 같은 울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왜인 하나가 잽싸게 들어와 곧게 선 자세로 두목의 지시를 기다렸다.

"잡아둔 그 놈, 이리 데려와라."

"옙."

꼬붕은 명령을 듣고는 어디론가 튀어가더니, 곧 두 명의 행동대원과 함께 피투성이가 된 사내 한 명을 끌고 들어왔다.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자인 탓이다. 똑같이 산동에서 마약을 팔던 경쟁자였으니 악연에 가까울 터.

그렇다 해도 안면이 있던 이가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남자의 마음속에 동요가 일었다.

스르릉….

두목이 어느샌가 일어서, 자신의 뒤에 있던 일본도 한 자루를 뽑아 들고서 다가왔다.

"자네가 오기 전에, 먼저 그를 만나봤지. 며칠 전의 이야기야. 똑같이 기회를 주었는데, 거절하더군."

저벅, 저벅.

갈라진 마룻바닥을 천천히 밟으며 걸어오다, 피투성이 사내의 앞에 멈춰선 두목의 팔이 돌연 스윽ㅡ, 하고 사라졌다.

남자는 순간 자신의 눈이 침침해졌나 생각했지만, 어느새 뽑혀나온 칼과 높이 떠 있는 두목의 팔을 보고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려진 사내의 팔에서 피가 부산스레 튀었다. 잔뜩 더럽혀진 마룻바닥.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사내의 목을 향해 다시 한 번 두목의 칼질이 쏘아진다.

촤악ㅡ.

한 치가 조금 안 되게 베여들어간 목. 울대를 중심으로 기다란 자상이 남아 있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멎었다.

"시끄럽군."

사내의 목 사이 갈라진 틈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새었다. 비명을 질러대던 목에서는 부글거리는 피가래가 들끓었다.

"쥐어."

두목이 자신을 향해 칼자루를 건넨다. 그것도 핏자국으로 아주 범벅이 된 손으로. 잡아도 되는 걸까. 두목이 그에게 칼자루를 들려주는 의미가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남자가 힘겹게 그것을 쥐자, 두목이 조용히 읊조렸다. 죽여. 목을 쳐라. 남자는 그 말에 칼을 들어올려 휘둘렀다.

칼은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조여오는 근육과 그새 말라붙은 핏덩이들이 끈적하게 날을 붙잡았다. 무릎 꿇은 사내가 고통에 발작하고.

남자는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살기 위해서다. 깨질듯 악물리는 어금니. 힘이 잔뜩 들어간 칼날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날이 목에 닿기 직전.

두목이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잘 보았다. 어이, 카시라. 가서 사케를 한 잔 가져와라. 사카즈키고토다."

"준비하겠습니다."

두목은 남자의 손에 들린 칼을 들고서 대충 모가지를 쳤다. 거칠게 저항하던 살결이 한 번에 거짓말같이 갈라진다. 쯔저적ㅡ.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히익…!"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남자의 샛된 비명. 두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자네, 처음 봤을때 싸가지 없이 동업이니 뭐니 짓걸였었지."

"예, 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 없어. 우린 이제 동업자야. 한 배를 탄 가족이란 소리네. 가족.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미친듯이 끄덕였다. 살아있는 살점을 썰던 칼의 감촉이 손에 생생한데 무얼 더 생각할까.

그러는 사이 카시라라고 불린 왜인이 다급히 뛰어 들어오더니, 제 두목을 불렀다.

"오야붕!"

"카시라. 술잔은 어디 두고 그러나."

"오야붕. 제녕의 사업장이 망했답니다."

"그 말이 진실이냐?"

"예. 방금 들어온 급보입니다."

"…악가 놈들은?"

두목의 손이 파들파들 떨린다. 분명 쉽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었다. 감정이 그만큼 들끓고 있다는 소리.

"연락이 끊겼습니다. 가주는 죽었고, 남은 병력은 태산(泰山)으로 집결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가주는. 어떻게 죽었지?"

"신원이 불분명한 고수와 싸워 패하고, 황군이 끝을 냈다고 들었습니다."

"……"

두목이 다시 한번 칼을 뽑아들고는, 머리가 떨어진 시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칙쇼ㅡ!"

칼을 마구 휘둘러 시체를 토막내기 시작했다. 바닥에 날카로운 상흔이 새겨졌다. 남자는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기에 바빴다.

분노에 눈 먼 칼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몰랐으니까.

방금까지 목이 잘린 채로 껄덕거리던 시체를 잘게 토막낸 두목은 마음을 조금 추스렸는지, 조금 가라앉은 어조로 카시라에게 물었다.

"그 고수란 놈의 신원은 파악했나?"

"제녕에서 곧바로 타지카라(タヂカラ, 남성 닌자) 하나를 붙였답니다. 실력 있는 닌자가 갔으니 곧 알아올 겁니다."

"정체를 잡으면 곧장 보고해라. 내가 가서 오체를 분시하겠다."

"예."

"그리고 천경… 아니, 남경(南京)쪽에도 서신을 새로 보내라. 왕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 * *

창 끝을 막아낸 일 초.

자신이 수련한 소림의 외문무공을 이르는 말이었다. 어찌 잊으랴. 무언가에 홀린 듯 손바닥을 뻗은 감각은 아직도 이 장(掌) 안에 선명하다.

무진이 말했다.

"네가 창을 막은 것은 그 끝이 뭉툭했기 때문이다. 틀렸나?"

"바른 말씀이십니다."

철포삼(鐵布衫).

맨 몸으로 철갑을 두른 듯한 효과를 내는 외공이다. 분명 날이 선 창촉이라 했으면, 도검불침의 경지가 속달되어야 했을 터.

실전이었다면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철포삼은 두 단계의 수련이 있다.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책에서도 나와 있었으니까. 다만 중요한 정보는 전부 구멍이 숭숭 뚫린듯 빠진 채였지만.

"첫 번째는 살갗의 수련이다. 온기와 한기를 번갈아 받아들이며 가죽을 질기게 만든다. 그리고…"

무진이 뚜벅 뚜벅 걸어가더니, 곱게 뻗은 한 나무통에 손바닥을 얹고는 위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 결을 따라 천천히 진자운동하는 나무. 끼이이익… 밑동이 흔들린다. 무진의 손바닥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그러다 일순간. 벼락이 치는 듯한 소음이 터졌다.

쿠웅ㅡ!

꾸드드득….

부드럽게 흔들리던 나무통이 순간 크게 휘청였다. 무진이 팔을 회수하자 나무통 가운데에 손바닥 자국이 깊게 나 있는것이 보였다.

소년이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장법을 내지르는 듯한 움직임은 없었을 터인데.

"두 번째는, 근육의 움직임."

전신 발경(全身 發勁).

"온 몸의 힘을 끌어서 일점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반탄력(反彈力)을 끌어내지. 허나 이 둘만으론 부족하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내가기공(內家氣功). 공력을 운용하여 그 효율을 증대시켜야 한다. 이게 핵심이지."

"그런데 철포삼은 외문무공 아닌가요?"

그 말에 무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전설로 내려오는 소림의 무학은 본래 내외공의 경계가 없었지. 칠십이절예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럼 그 내가기공은 어찌 익혀야 하죠?"

"어차피 소림의 상승 심법을 구할수는 없으니, 내가 적절한 심공을 하나 내려주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 보는 수밖에."

"끄응…."

소년은 그 말에 골치 아프다는 둥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야 당연했다. 불문의 무예를 익히는데 다른 심공을 곁들이다니. 어떠한 부작용이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반드시 이뤄야만 하는 목표가 있었고, 눈 앞의 기연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하는 법.

소년은 마음을 굳게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쪽으로 등을 보이며 가부좌를 틀어라. 그리고 지금부터 들려주는 구결을 빠짐없이 암송하거라. 절대 잊어선 안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무진이 소년의 등 정중앙에 위치한 신주혈(身柱穴)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귓가로 낮게 울리는 구결에 빠져들면서다.

문뜩, 세상으로부터 한 줄기 물결이 치닫았다. 몸 속으로 흘러들어온 그것은 제 상반신을 경유해 배꼽 아래를 향하였다.

그와 동시에 수백 마리의 불개미가 몸 위를 기어다니는 듯한, 타오르는 화마와도 같은 고통이 있었다.

"네 안의 어둠을 가둬라. 제어해라. 지배 하에 두어라. 그리하면 신의 영성을 얻으리."

소년이 입을 악물었다. 전신 근육과 혈맥이 소사(燒死)의 고통에 아우성친다.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조금씩 시퍼래져 가는 시간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소년은 자신이 밤을 꼬박 새워 운기를 하였음을 깨달았다.

옆에는 자신과 똑같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제 고용주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지, 이제는 스승이라 칭해야 하나.

소년이 고민하고 있던 찰나, 무진의 입이 열렸다.

"내일도 반복할 것이다. 같은 시간에 나를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소년이 대답의 뒤에 '스승'이란 두 자를 붙일까 고민하다, 잠시 머뭇거렸다.

무진은 무언가 생각난듯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더니, 소년에게 한마디 더 건넸다.

"씻고 와라. 온 몸이 땀 투성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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