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19화 (20/29)

제 19화

청도(靑島)로 가는 길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참장 나리께 가니까 곧바로 돌아가라는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그게 뭔 뜻인지도 몰라서 멍하니 있었더니 옆에 가서 보좌나 하랍니다. 쓸모없다고."

"음? 악가의 반역에 대한 물증은 네가 가지고 있지 않나."

"제가 한창 도망칠 때는, 몸이나 팔라고 던져준 싸구려 천 쪼가리 하나가 전부였는데 대체 어디에 숨긴단 말입니까. 당연히 홍등가에 숨겨 놨습니다."

"그런데?"

"그걸 찾으러 가야 한다고 하니, 참장 나리가 대뜸 다가와서는 위치만 불라고 했습니다. 그걸 말했더니 이제 꺼지라는 소리를 들은 겁니다. 여기로요. 참 냉혈 하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 저도 같이 좀 따라다니면 안 되겠습니까? 전 지금 무진 님 옆에 못 붙으면 그대로 모가지란 말입니다. 예?"

그러고는 엄지로 제 목에 선을 긋는 시늉을 한다. 그 꼴이 조금 우스웠다.

그 후로도 설화는 한참을 떠들어 댔다. 각종 물류가 드나드는 창고에 잠입해서 장부를 훔쳐낸 이야기라던가, 들킬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라던가. 주로 제 영웅담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것이 무진에게는 열렬한 호객행위로만 들렸다. 물론 팔아먹는 건 제 자신이었고.

게다가 무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가면 갈수록 입구녕에서 내뱉는 말이 몇 배로 늘어나고 있었다.

후우……

이대로 가다간 고막이 찢어질 것이 분명하다. 절정의 벽을 넘은 고수의 귀에 내상을 입히다니. 음공의 위력이 실로 막강했다.

결국 무진은 한숨을 쉬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따라와라."

"감사합니다! 제가 음……비록 기간제 비서긴 해도 최대한 열심히 보좌하겠습니다. 첫 만남은 조금 이상했어도 앞으로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알겠다. 그럼 첫 번째 명령을 하지."

"예. 분부만 내려주세요!"

"우선 좀 닥쳐라. 시끄럽다."

"……"

그녀는 방금까지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나마 제 처지는 잘 알아서 다행일까. 사나워졌던 정신이 겨우 진정되고 있었다.

'한결 낫군.'

솨아아ㅡ.

바람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호숫가에 자라난 숲에서 가지가 바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먹구름 낀 하늘. 비가 오려나 보다.

몸을 움직이자 상처에서 따가운 감각이 올라왔다. 이대로 비가 오면 상처가 곪을 텐데. 그러면 꽤 골치가 아파질 것이 분명하다.

"허유."

"예, 문주님."

"배를 더 빨리 몰 수 있겠나."

"왜 그러십니까요?"

"곧 비가 올 것 같구나."

그 말에 허유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마찬가지로 얼굴을 찌푸린다. 허유가 눈을 감고서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곧 강들이 만나는 지점이 옵니다요. 배들이 모이면 물 위에서 장시(場市)가 열리는데, 거기서 지우산(紙雨傘)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혹시 구할 수 있다면 요상약과 붕대나 한지를 구해주게."

"예입."

무진은 다시 나룻배 바닥에 걸터앉았다. 그 후로 멍하니 호숫가나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잦았는데, 한참을 사색에 빠져 지내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허유는 무진에게 말할 것이 있었다. 의화단(義和團)의 일에 관한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저 여인이 배에 같이 타고 있는 한은 이야기가 어려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군의 밀정이 아닌가. 무공은 없다지만 그 능력은 어딜 가지 않는다. 지금도 의화단주의 정보를 빠짐없이 살피고 있겠지.

황군이 중원을 견제하기 시작한 지가 벌써 몇십 년 전의 일이다. 겉으론 평온하다지만 물밑으로는 수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게 쌓이고 쌓여 작금의 무림을 만들었다. 언제든 황실의 심장을 찌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문파들. 허유가 보기에는 이번 악가의 일도 자연히 일어날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터진 게지.

허유는 그리 생각하며 노를 저었다. 한동안 배 위에는 바람과 물소리가 머물다 갈 뿐이었다.

철썩…… 철썩……

어느새 밝아진 세상. 새벽 동안 쉬지 않고 나아가니 어느새 아침이다.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간혹 들려오지만, 먹구름 낀 하늘은 잠잠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비가 오는 것은 틀림이 없던 모양이다. 허유는 고민하면서도 계속 노를 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돛을 올린 채 멈춰선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위로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다니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배는 항상 물건을 실어 나른다. 그러다 보니 그것들이 뭉치면 곧 장시(場市)가 열리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장터가 해가 뜬 직후와 지기 직전. 배가 움직일 동안 총 두 번 열린다.

무진이 생각했다.

'꼭 해남도(海南島)의 풍경 같군.'

허유가 배들이 멈춰선 곳에 나룻배를 가까이 대고는, 펄쩍 뛰어 물 사이를 넘고선 다른 배 위로 올라탔다.

출렁ㅡ!

허유가 착지한 배가 순간 출렁였다. 상인은 익숙한 듯 아무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한다.

"여보시오."

"무슨 일이요?"

"지우산(紙雨傘)과 붕대를 구하려고 하는데, 혹시 있소?"

"붕대? 붕대는 잘 들어오는 날이 없는데……

상인은 그리 말하고는 뒤를 돌아보더니, 멀리 떨어진 배를 향해 소리친다.

"어이, 장 씨ㅡ!!"

멀리서도 손을 모아 소리를 지르며 화답했다.

"왜 부르냐 이놈아ㅡ!!"

"붕대ㅡ!!"

"붕대ㅡ!!?"

그 말을 들은 장 씨라 불린 상인이 제 서랍장을 뒤지고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인다. 상인이 말했다.

"붕대는 저쪽에 세 개 정도 있다네. 지우산은 내가 몇 개 가지고 있는데. 어떠쇼."

"사겠소."

"개당 은전 하나하고 다섯 푼."

"너무 비싼 거 아니요?"

"이거 이름난 장인이 만든 건데. 비싼 값을 한다니까? 안 살 거면 말어."

그때, 무진이 허유를 향해 주머니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대충 사고, 저녁까지 먹을 끼니와 네 마음에 드는 것까지 사 오거라."

"예입!"

그 말을 들은 허유가 신나서 대금을 치르고는, 커다란 지우산 몇 개를 배 안에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곧장 장 씨라 불린 상인의 배까지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무진이 설화를 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세상이 참 넓어. 난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는데 말이야. 안 그런가?"

그 말에 설화는 입도 뻥끗하지 않고 가만히 무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은 무진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럴까. 한참을 고민하던 무진이 아, 하는 탄성을 자그맣게 지르고는 말했다.

"그것도 반항이라고 참… 그래. 이제 말해도 좋다."

"그럼, 사람한테 닥치라고 말하셔 놓고 기분이 안 상할 줄 알고 있었습니까? 참 너무하십니다. 제가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데."

"아해(兒孩)야. 넌 대체 밀정 일은 어찌 하는 게냐."

"그야 그건 일이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해라니, 액면가만 보면 저랑 비슷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무게를 잡아봤자……

무진이 그녀의 말을 끊고 정정했다.

"내 나이가 벌써 마흔 줄이다."

"……예?"

"몰랐느냐. 듣기로는 황군은 인명부라는 것을 따로 받아서 다니는 모양이던데."

한량같이 보이는 사내가 중얼거리며 지나간 것을 무진은 기억한다. 분명 인명부를 입에 담았었지.

"아, 그건 부장급 이상에게만 주어집니다. 그건 그렇고 사십이라니……

그녀가 말 많은 제 성격조차 잊고선, 무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며 속닥였다.

"저게 사십이라고? 말도 안 돼."

경악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서 무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공기 사이로 흙 내음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진이 손바닥을 펴 허공에 올려두었다. 툭, 투둑. 빗방울이 그 위로 떨어져 튀기 시작했다.

무진이 그녀에게 지우산을 던지며 말했다.

"써라. 비가 내리는구나."

"……넵."

이내 쏟아져 내리는 거센 소나기. 멀리서 허유가 짐 덩이들을 제 품 속에 끌어안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펄럭ㅡ.

지우산이 펼쳐지고 기름 먹인 한지가 빗방울을 튕겨냈다. 사방에서 빗방울이 충돌해 퍼지는 소리가 울렸다.

극과 극은 통한다 하던가. 분명 시끄러울 소음이 오히려 잔잔하게만 느껴졌다. 살면서 맞는 비가 처음도 아닐진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무진이 눈을 감으며 정취를 음미했다.

솨아아……

마음 한켠이 고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옥에서 나온 뒤로 겨우 이 주에서 삼 주가량이 흘렀는데, 그사이에 겪은 일이 너무나 많다.

들어오는 외세의 문물과 정세가 어지러워 강호는 비교적 조용하다 느꼈건만. 아니었다.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홍역을 치르고 있는 만큼 소란스러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악가주가 자신의 최후가 돼서야 대업을 입에 올렸다. 무언가 커다란 흐름이 있다는 뜻. 무진은 그것이 세상을 크게 한번 뒤엎을 것으로 생각했다.

단순한 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고수의 직감은 일종의 예지와 같은바.

황제가 자신과 만남을 원한다 하였던가. 그곳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거니 싶었다. 이젠 자신도 그 격량 속에 끼어들게 되었으니 자신의 힘으로 흐름을 뒤틀 궁리를 해야 했다.

그 전에 우선, 산동의 일을 모두 정리하는 것이 올바른 순리일 테지.

쿵ㅡ.

허유의 발소리가 무진의 상념을 흩트려놓으며 끼어들었다. 품에는 먹을 것과 붕대를 잔뜩 들고서였다. 순간 출렁인 배의 끝에서 물이 조금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이 몰아온 물결이 높게 일은 탓이었다.

"왔으면 출발하지."

"예이. 돛을 내릴깝쇼?"

"바람을 보니 펴지 않아도 잘 가겠구나. 줄만 풀자꾸나."

묶어둔 줄을 풀자 배는 풍량을 따라 스르르 나아가기 시작했다. 남양호에 그 발을 걸친 또 다른 부두가 있는 곳, 마산(微山)을 향해.

* * *

"비가 끝도 없이 내리는군. 하늘에 구멍이 난 듯해."

"그러게 말입니다. 우선 청도까지 함께할 짐꾼을 구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과연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면 길도 전부 진흙으로 범벅이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이거 참 골치 아프지 않습니까? 저라면 차라리 말을 한 필 구하겠습니다."

"아이고, 그 말은 또 어디서 구합니까요. 돈은 또 어디서 구하고!"

남양호와 마산 호는 서로 이어진 호수다. 그 길이만 해도 무려 수백 리에 달한다.

강풍을 딛고서 온종일 풍량을 견뎌야 함은 물론이요, 비가 오는 탓에 진한 습기마저 달라붙어 오니 서로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

그 상황에서 허유가 기어코 설화의 말에 딴지를 걸고야 말았다. 곧장 말싸움이 시작됐다.

"아니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일단 그럴듯한 것부터 뱉고 본 것 아닙니까. 참 너무하십니다."

"거 참, 입에서 뱉는다고 전부 말이 아닌데. 좀 제대로 된 의견을 말해야 할 것 아닙니까요?"

"둘 다 그만하지."

자칫 과열될 뻔한 분위기를 무진이 애써 중재한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묵는 게 좋겠다. 길을 가기엔 비가 너무 거세구나."

"……예입. 전 먼저 가서 방을 구해 보겠습니다요."

허유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한참 후에 다시 돌아와 말했다.

"딱 하나 남은 방을 구했습니다요. 그것도 웃돈을 줘야 받던데, 알아보니 오늘 마산에서 뭔가 열리는 것 같은뎁쇼."

"뭐가 열리는지는 알아보았나?"

"무투 대회랍니다요. 근방에서 사람이 몰렸는데 마침 비가 오니 그대로 발이 묶인 이들이 많습죠."

"음……"

무투 대회라. 무진이 고민했다. 기껏해야 삼류나 그보다 못한 아류 무인들이 모여 여는 것일진대.

그래도 심심했던 차에 마침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거니 싶었다. 옆에서 설화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고.

"우리도 한번 가 보지."

"알겠습니다요."

그렇게 일행은 무투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역시 자그마한 대회에 불과했는지, 장시 한가운데의 커다란 공터에 판을 깔아놓고 순서대로 겨루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무인의 싸움이란 것이 꽤 흔치 않은 볼거리여서, 인근에서 몰려온 사람들까지 거리로 쏠려 사람이 미어터졌다.

그 수많은 인파를 뚫고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일행이 힘겹게 비무장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하자, 운이 좋게도 새로운 결투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마침 바로 시작하는구먼요."

"저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데……왼쪽은 도를 들고 있고. 잠깐, 저거 설마 날 선 무기는 아니겠죠?"

허유와 설화가 제멋대로 말을 내뱉는 사이, 무진의 시선은 한 곳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참가자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던 탓이다.

품에 소중히 끼고 있던 서책의 이름이 낯익다.

등봉현에서 보았던 칠십이절예(七十二絶藝)의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흘러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더 질긴 끈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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