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화
산동악가 山東岳家
황군 고수가 악가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추포해라."
말이 끝난 직후, 부서진 건물 잔해의 그림자 사이서 인영 여럿이 나타났다.
무진은 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일이 뜻대로 되었다고 작게 뇌까리면서다. 이 정도면 내상을 감수할 만하지 않나.
황군에 빚을 하나 지웠다.
무림 세가가 화포를 밀수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하는 역죄. 그 과정에서 적잖은 공을 세웠으니,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악가주가 썩어들어가는 표정으로 황군의 손길에 이끌려 나가고. 뒤이어 황군 고수가 가면을 쓴 채로 무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덕분에 일이 쉬웠습니다."
"별말씀을. 그건 그렇고, 우리 구면이 아닌가. 이름이…. 유소하였나."
"알아보시는군요."
"윗분의 옆을 보좌하던 놈이 아니더냐. 좌천된 모양이지?"
"…본래도 일선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때는 사안이 엄중하니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무진이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러고는 제 코트를 고쳐 입으며 밖으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새.
유소하가 무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모셔다드리지요."
"됐다. 그래놓고 행적을 감시할 셈 아니냐. 내 쪽에서 찾아가지."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교주만(膠州灣) 앞쪽이 맞겠지?"
"맞습니다."
대답을 들은 무진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허유와 설화가 도망갔을 남양호를 향해서다.
숙소에 머무를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태산(泰山)의 장로들은 몸을 추스르느라 곧장 쫓아오진 않겠지만, 계속 머무르면 악가에게도 행적이 노출될 터.
'곧장 의화문 본단으로 향해 몸을 정비한다.'
무진이 밖을 향했다.
전투로 인해 과열된 열기가 식어가자 찬 공기가 맞닿는 감촉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더해 기분이 조금 꿀꿀했다. "담배가 생각나는군…" 무진이 중얼거린다.
제 품 속에 있을 시가를 찾기 위해 뒤적거리던 손이 잠시 멈칫한다. 그러고 보니 황군의 밀정(密偵)에게 줬던 담배가 마지막이었나. 참 재수도 없지.
"쯧…"
무진이 아쉬운 표정으로 떠나려는 그때, 뒤에서 손이 불쑥 나타났다. 섬섬옥수 같은 창백한 피부 사이에 매달린 연초 한 개비. 무진이 찾던 물건이었다.
"뭐지?"
"찾으시는 것 같길래."
"…고맙군."
무진이 유소하의 손에 들린 연초를 들고 입에 물었다.
"이렇게 따라온 걸 보면 무슨 할 말이 남았나 보군"
"윗분께서 한번 봤으면 한다고 전하셨습니다."
그 말에 무진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윗분이라… 누굴 말하는 건가. 너희 '윗분'이 한 명이 아닐 텐데."
"언행을 삼가십시오."
"만남이란 것이 항상 좋게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야. 안 그런가? 그 '윗분'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신 줄 알고."
예로부터 황군의 인사가 예를 차리며 높여 부르는 것은 단 한 명. 하나 요즘의 정세는 조금 다른 것인지, 황군이 모시는 자가 비단 황제뿐만이 아니라 들었다.
무진이 말한 것은 그 점이었다. 황실 내에서의 알력다툼. 현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도 공공연하지 않은가.
그런 황제가 태후(太后)에게 막 반기를 들기 시작할 때, 무진은 풀려났다.
자신 또한 정세를 뒤틀기 위한 하나의 도구란 말인가. 하긴,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풀어줄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느냐마는.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황실의 뜻대로 휘둘리진 않을 것이다.'
들짐승을 풀어 놨다면, 자신이 그 누구의 모가지를 물어뜯든 감수해야 하리라. 그것이 황제든, 태후든 간에.
"계속 그런 언행을 뱉으신다면 저도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말한 건 사실이 아닌가."
"단언컨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또 모르지."
어쩌면 다른 한쪽의 패를 미리 제거하려는 반대파의 농간일 수도 있지 않나. 무진은 그리 묻고 있었다.
유소하 자신이 바로 밀정(密偵)이 아니냐고.
"후우…."
유소하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크기로 말했다.
"제국의 태양이십니다. 북경의 뒷문으로 찾아오면 언제든 응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진작 그리 말할 것이지."
"용건은 그것뿐인가?"
"피우면서 말하죠."
어느새 유소하도 제 품에서 연초 한 개비를 꺼내어 물고 있었다. 치익… 그가 성냥을 그어 연초에 불을 붙이고. 무진도 따라서 연초에 불을 붙이려 손을 들었다.
따악ㅡ.
경쾌한 소리를 내며 튕기는 무진의 손가락. 그러나 환한 빛과 함께 피어나야 할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심장 부근을 옥죄여 오는 욱신거림. 내상의 여파였다.
'…이런.'
유소하가 무진을 뚱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뭡니까."
"…혹시 성냥 하나 남는가?"
무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불붙인 성냥을 받아들었다.
* * *
연초는 맛이 없었다.
관리의 대부분은 황제에게 받는 녹보다는 자신의 알량한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불린다. 그런데 황실 직속의 군 관료가 그걸 할 수 있을 리가.
그 때문에 유소하의 재산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히 연초도 싸구려일 수밖에.
것까지는 참을만 했다.
그런데 성냥불로 붙인 연초의 맛은 상당히 끔찍했다. 차라리 시궁창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그보다는 덜할까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
해로운 것을 정화한다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불꽃이다. 어쩌면 그간 피우던 연초의 맛도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빨리 내상을 회복해야겠군.'
혈도에 영구적인 손상을 남기거나 생명에 해가 될 정도는 아니니, 제대로 정양만 한다면 이른 시일 내에 회복할 수 있으리라.
그래야 곧 있을 토벌전에 발을 걸칠 수 있을 터.
무진은 남양호를 향해 걸으며 유소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곧 저희는 악가 토벌전을 개시할 겁니다. 산동의 모든 관 병력을 끌어모으겠죠.
- 그래서?
-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각종 화기로 진을 짠 태산(泰山)입니다. 한 명의 고수가 절실하지요.
- 너희, 처음부터 악가를 없앨 생각으로 진행했군. 이미 확신하고 왔어. 공문도 미리 만들어 온 게 분명하고.
-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무진은 그에 대해 생각해보겠노라 답했다. 그러자 유소하는 자신에게 수하 하나를 붙여 주겠다고 했다. 언제든 생각이 들면 대동하여 교주만(膠州灣)으로 오란다.
참여하는 게 자신에게 있어서 득이 될까.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거품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남양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솨아아ㅡ.
파도가 조금 섞인 바람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수면으로 밀려오는 것은 막상 보니 잔잔한 물결이다. 대부분 귀신 들린듯한 바람이라는 뜻이다. 그곳에서 짙은 혈향이 풍겨왔다.
호수만(湖水滿)에 와닿는 물결의 색이 조금 붉은 것 같기도 했다. 새삼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온 직후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찰싹이는 물결을 굽어보는 것은 밝은 달빛밖에 없었으니 또 모를 일이지.
"음…"
항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작은 어항(漁港)에 매달린 밧줄이 모조리 끊어져 있었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전부 날카로운 무언가로 자른 듯 단면적이 거칠었다.
"일단 전투가 있던 것은 확실하고."
묶어둔 줄이 모두 끊어진 탓인지 나룻배는 단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무진이 중얼거렸다.
일위도강(一葦渡江)이라도 해야 할까. 내공이 남아 있었다면 모를까, 기혈이 죄다 꼬여버린 지금으로써는 시도조차 힘들다.
뭣보다 괜한 낭비이기도 하고.
'차라리 만(滿)을 따라 쭉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리 생각하던 무진이 걸음을 떼려던 찰나. 안개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자그만 나룻배 하나에 세 명이 올라타 있는 모양새다.
누구일까. 무진이 고민하는 사이 배는 빠르게 다가와 나무 부두(埠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허유와 설화.
나머지 하나는 모르는 얼굴이었는데, 품에 보이는 칼과 둘러맨 보복(補服)을 보니 황실의 고수라고 짐작할 만했다.
그러고 보니 부장급의 인사가 악가의 살수 조를 저지하러 갔다고 했던가. 꽤 젊어 보이는 연배였다. 그런데도 영관급의 제 삼급이라니.
'차기 황군 제일 검인가.'
허유가 무진에게 달려왔다.
"아이고, 문주 님…"
"일이 어찌 되었나."
그 말에 허유가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배를 타다가 중간에 살수가 습격해 왔다느니, 난데없이 나타난 황군 고수가 열 명도 넘는 살수를 모두 죽였다느니.
대강 예상한 내용이었다. 무진은 알겠노라 답했다.
고개를 돌리니 보복을 대충 둘러 입은 한량 같은 생김새의 고수가 무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인명부에 있던 얼굴인데…"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설화가 다가와 무진에게 인사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목숨을 빚졌군요. 감사합니다. 음… 대협이라고 불러드리면 되나요? 무림인들은 그러던데…"
역시 긴장이 풀리니 쓸데없이 말이 많아진다. 무진이 그녀의 입을 제지하며 답했다.
"그만. 남양호 위에서도 살수를 만났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관심을 끌어주시지 않았다면 남양호까지도 못 왔을 게 뻔합니다. 총포를 든 놈들이 스물은 넘었을 텐데 그걸 전부 따돌리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길게 말할 시간 없다. 가 봐."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설화는 제 상관과 함께 떠났다. 본래 그녀를 확보해 얻어낸 증언으로 악가를 압박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어차피 악가는 곧 멸문한다. 그리고 무진은 대놓고 황군의 일에 발을 걸친 상황. 결국,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는 이득으로 돌아올 테니 아무렴 상관없겠지.
그럼 이제 어쩐다. 악가가 가지고 있던 산동의 떡고물을 최대한 수습해야 하건만.
무진은 남양호의 만 위에서 한참 동안 사색에 빠졌다. 그러는 동안 달은 별의 여울을 거슬러 흐른다.
얼마 후, 생각을 마친 무진이 허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의화문으로 가십니까요?"
"그래야지. 마침 저기 배가 한 척 있구나."
"…혹시 누가 노를 젓습니까?"
"무슨 당연한 말을 하나. 자네가 저어야지."
"아이고 내 팔이야…"
허유가 제 팔을 부여잡으며 엄살을 피웠다. 그에 무진이 대꾸하길.
"그래? 그럼 내가 하마. 비켜라."
그러자 허유가 사색이 된 얼굴로 기겁하며 무진을 말렸다. 눈으로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이 된 팔다리를 살피면서다.
"농입니다, 농. 그 꼴로 저으셨다간 덧납니다요."
"그럼 빨리하게."
"예이, 예. 갑니다요."
허유가 배의 앞에 걸터앉아 노를 잡았다. 나룻배의 머리가 물결을 가르려던 그때. 무진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고개를 돌아보니 부두에 무진의 옷을 빌려 입은 설화가 서서 소리치고 있었다. 분명 제 상관을 따라가야 했을 그녀가 무슨 일로 돌아왔을까.
오래 지나지 않아 무진은 원인을 떠올렸다. 유소하가 분명 수하 하나를 붙여 주겠노라 답했었는데.
"그 수하가 저 여인이었을 줄이야."
참 빨리도 보냈군. 아니면 귀찮으니 그나마 일면식이라도 있는 이를 보낸 건가. 무진은 애써 설화를 무시하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요?"
"아니다, 됐어."
"그런데 저거 태워달라고 하는 거 같은데, 다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요?"
"그냥 가지. 조금만 더 나가면 바람을 탈 수 있겠어."
무진이 일어서 돛을 펴려고 하자, 뒤에서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대협! 제발 같이 좀 갑시다! 안 그러면 제 모가지가 잘린단 말입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자꾸만 들려오는 간절한 외침.
후우…
무진이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잠깐 돌리지."
"예입."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공모전 기간이 기간인지라... 현생 문제하고 아주 제대로 겹쳤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