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17화 (18/29)

제 17화

산동악가 山東岳家

은색 창대가 바닥을 구른다. 챙그랑…. 악가주의 갈라진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흐르는 뜨거운 선혈.

먼지 쌓인 카페트가 검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 위에서 총구를 겨누는 악가의 무인이 수십.

무진은 그 사이서 악가주를 인질 삼아 뒤를 점하고 있었다. 것도 목의 동맥이 지나는 천용혈(天容穴)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쿨럭….

무진의 입에서 거뭇케 죽은 피가 토해졌다. 허나 악가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합의 교차로 자신의 몸에 축적된 내상이 더욱 컸기에.

말 하나 내뱉는 것이 고작일 정도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황군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황군의 무공이 아니야. 너는 누구지?"

"그걸 알아야 하나?"

"아니… 아니지. 그냥 호기심이었어. 그것도 어차피… 쿨럭."

악가주는 몇 번 마른 기침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조금… 알 것 같거든."

"그래?"

"붉은 눈에 그 시커먼 마기… 누구라도 알아볼 수밖에 없지. 아주 소문을 내고 다니는군. 안 그런가? 마지막 천마(天魔)여."

"그 감투는 진즉 버렸다."

무진의 대답을 들은 악가주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이내 갈라진 목소리로 껄껄 웃기 시작했다. 노인의 죽어가는 광소가 듣기 흉하다.

"끅끅… 아니지. 그대는 아직 천마다. 눈에 깃든 번뇌가 그토록 생생한데 어찌 부정하겠나."

비틀거리며 무진을 돌아보는 악가주. 그의 팔다리에 남은 자상과 몇 군데의 총상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입가에 남은 붉은 흔적도.

자신의 일격이 내상을 입히기에 부족했다는 것을 안다. 일전에 이미 전투를 치르고 온 것인가.

'천마라더니, 괴물이 따로 없군….'

구파의 장문인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능히 수를 겨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였다. 거기에 더해 뛰어난 고수 여럿을 잡아낼 수 있다는 훈련된 소총병이 무려 서른.

그 총알들을 모두 뚫고서 자신을 제압할 줄이야.

상상 이상의 무력이었다. 어쩌면 강호 제일을 논할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황군 제일고수 염홍장과 남경(南京)에 웅크린 왕이 없었다면 확실했을 것이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군 그래. 이백, 아니. 백 년만 더 일찍 나왔어도 천하를 호령할 재목이거늘."

그런 무위를 이루었음에도 끝내 몰락해 버리고 말다니. 그리 뇌까린 악가주가 한참을 광소한다.

고수가 느끼는 감정의 격동은 산군이 낮게 우는 소리와 같아서.

장 내에 기묘한 정적이 감돈다.

그가 일순간 광소를 멈추고는 말했다.

"어쩌면 대업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어."

"대업이라고?"

악가주가 무진이 당황하여 되묻는 것을 무시하고는,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소리쳤다.

"전부 쏴라!"

터업ㅡ!

순간, 악가주의 왼팔이 무진을 향해 쏘아진다. 꾸드득… 유형화된 진기를 풀풀 날리는 악가주의 손이 무진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나와 같이 이 놈을 죽여라. 어서!"

분명 놈의 기혈을 씹창내 놓았을텐데. 대체 무슨 수를 써서 혈맥을 회복했단 말인가. 무진의 눈이 거뭇케 죽어가는 악가주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기라니…! 미친놈!"

"죽여어어ㅡ!!"

악가주가 무진의 팔을 잡고 늘어진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몸짓. 팔을 참하고 벗어나야 할까. 아니면 목을 쳐야 할까.

아니,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뇌음을 타고 쏘아지는 암기다. 그 속도가 번개와 같았다. 탄환을 막을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데. 직후 무진의 눈이 눈 앞의 악가주에게 닿았다.

'목을 친다.'

경직된 무인의 몸뚱이라면 방패로는 차고 넘치리라.

무진이 곧바로 출수하려는 그때.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 그가 몸을 멈추고는 생각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벌써 얼마의 시간이 지났나. 방아쇠 하나를 당기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이토록 조용하다니.

위를 올려다 본 무진의 눈이 크게 떠진다. 악가주의 눈도 마찬가지다.

총칼을 든 악가의 무인들이 모조리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으니. 그 참상 사이로 가면을 뒤집어 쓴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악가주가 중얼거렸다.

"허, 황군의 참장이라니."

황군 참장의 손가락 사이에 누런 원통형의 무언가가 잡혀 있다. 탄피였다. 그의 가면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총에 실탄까지. 현행범이군."

그 말에 악가주가 능글능글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래. 현행범이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들은 악가의 무인들이 아니오."

"말장난을 하는가?"

"왜인들이 어찌 악가의 무인이란 말인가."

그 말에 참장이 들고 있던 검으로 무인들의 복면을 갈랐다.

중원인과는 조금 달라보이는 외모.

그 말대로, 왜인일 것이 틀림없었다.

"악가는 죄가 없소. 내 독단이야."

"그건 봐야 알겠지."

악가주는 이미 창녀를 죽이라고 보낸 살수를 떠올렸다. 수십년을 애지중지 키워온 가주 직속 무인들. 그들의 실력이라면 계집 하나 해치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가문은 결코 말려들게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리 다짐한 악가주의 결심을 산산히 부수는 황군 고수의 한 마디.

"눈에서 살기가 엿보인다. 뒤에서 손을 썼구나."

"글쎄."

"이미 그곳엔 부장께서 가셨다. 네 바람이 이루어질 일은 없어."

참장의 말이 끝나자, 악가주의 표정이 썩어 문들어지기 시작했다.

* * *

솨아아ㅡ.

파도가 친다.

물결을 가르며 다가오는 배들의 소리이기도 하다.

짙은 운무 너머로 보이는 사람의 형체. 작은 나룻배 하나에 사람이 하나 둘씩 타 있었다. 그것이 무려 여섯이다.

그들은 짐승을 몰아 죽이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사방에서 나타나 뱃묘지를 포위했다. 안개 사이로 흐리게 보였던 모습이 점차 선명해진다.

놈들은 어깨 뒤로 막대를 하나씩 지고 있었는데, 오밤중에 여럿이서 낚시를 나올 리는 없으니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날카롭게 갈려진 창이었다.

사실 등에 진 막대가 낚싯대인지 창대이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삶을 추수하러온 추수꾼이니.

그들이 잡으러 온 것이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단지 호수가 조금 붉어질 뿐이다.

뱃가죽이 갈라져 쏟아지던 창자는 본래 생선의 것이었으나, 밤중에는 두 발 짐승의 것이라는 차이 정도일까.

솨아아ㅡ.

파도가 친다.

다만 파도가 친다고 그곳이 바다는 아니었다. 그러니 거품이 꽃피우는 소리도 없었다. 잔잔하게 흐르기만 할 뿐인 그것은 밤중 호숫가에 제멋대로인 침묵을 강요했다.

허유와 설화는 조그만 나룻배 바닥에 납짝 엎드려 제 숨통을 틀어막았다. 혹여나 제 숨소리가 신경을 거스를까 노심초사하며.

흔들리는 물결. 출렁이는 뱃바닥. 쿵쾅대는 가슴. 일 촌을 겨우 넘을 나무 판자 너머로 엄습해 오는 냉기는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감촉이다.

목덜미 피부를 핥는 운무의 습함이 전류처럼 등골을 타넘고.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가 사이로 섞였다.

"배가 많기도 하군."

"폭풍에 떠밀렸나 봅니다."

"흔한 일이다."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의 그림자가 안개 사이로 비쳤다. 달빛을 받으면서다. 창백한 빛 바랜 피부는 남자가 목을 꺾으러 온 추수꾼이란 것을 조용히 소리친다.

"허나 남양호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지."

사내가 창대를 들어, 내리쳤다.

쿵ㅡ.

쿵ㅡ.

배를 중심으로 수면에 동심원이 퍼져나간다. 소리는 높게 일은 파도 사이에 묻혀 수심 사이로 조용히 퍼져나갔다.

뱃바닥에 숨은 두 사람은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또한 뱃몸을 찰싹이며 때려오는 물결을 느꼈다. 몸을 흔드는 진동.

삐ㅡ걱.

드드드드….

뱃묘지에 이리저리 뭉쳐 있던 나룻배들이 저들끼리 몸을 흔들고 뒤틀다 부딛친다. 나무가 긁히고 갈라지는 소리가 여러 곳에서 울렸다.

그것이 겨울 바람에 몸을 떠는 가지들처럼 느껴져서.

오한이 들었다.

쿠웅ㅡ.

창대를 내리치는 이들이 점차 늘어갔다.

쿠웅ㅡ.

사방에서 퍼진 파동이 뱃묘지를 중심으로 모였다. 호수는 취객처럼 비틀거리며 거칠게 요동친다. 배가 출렁이고.

철썩… 추수꾼의 눈이 빛난다. 스산한 안개 사이로 보이는 나룻배들의 그림자. 개중에서 유난히 조용한 놈이 있었다.

주변으로 부숴진 파도의 잔재가 선명하다.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음은 곧 다른 배들에 비해 무거움을 뜻했다.

명백한 사람의 흔적.

"저거다."

검은 장포가 휘날린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손가락은 하나의 배를 가리켰다. 이윽고 사내의 입이 열린다.

"가서 죽여라."

여섯 척의 배가 동시에 출렁였다. 새까만 무복들이 안개 사이로 뛰어들었다. 꼬나쥔 창의 그림자가 설화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첨벙ㅡ!

배 위로 착지한 십수명의 무인들. 허유가 창대를 막아보기 위해 급히 일어선다.

부질없는 발악이었을까. 검은 신형들은 배와 물 사이를 간단히 가로질러 덮쳐온다. 살수 하나가 팔을 뻗었다.

서슬퍼런 창날이 허유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난데없이 그 사이를 끼어드는 검은 칼날.

카드득…!

눈 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자신의 일초를 막아선 남자를 본 살수가 경악했다. 이곳은 뭍이 아닐텐데. 어찌 두 다리로 수면을 딛고 서 있단 말인가.

시선은 자연스레 발치를 향했다. 그것은 감히 알아선 안될 비밀을 엿보는 눈짓처럼 조심스럽다. 숙련된 검수를 앞에 두고서 시선을 팔아 넘기는것. 해선 안 될 짓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떠오르는 궁금증. 물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살수 이전에 무인으로써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것은 사막의 끝에서 맞이한 바다와 같다. 갈증을 참지 못하고 들이키면 반드시 죽는 사약. 지금 남자가 딛고 있는 호숫물이 그랬다.

마침내 살수의 고개가 내려가고.

그는 보았다.

남자의 발치에 떠 있는 갈댓잎 하나를.

'일위도강(一葦渡江)…!'

순간, 수면에 그림자진 남자의 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어 은빛이 번쩍이고. 살수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고개를 올려다본 설화가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말했다.

"백사겸 부장…"

한량을 연상케 하는 대충 풀어헤친 머리칼에, 방금까지 잠이라도 퍼질러 잔 듯 늘어진 침자국과 벌겋게 눌린 볼살.

그러나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다.

휘황찬란한 용이 그려진 검은 보복(補服)이 남자의 소속과 직위를 증빙한다. 황군 고수. 그것도 흉배를 보니 장관급의 제 삼급(三級)이다.

황군 내에서도 수위에 들 만한 무력을 지녔음을 뜻한다. 일문의 고위 장로를 능히 제압할 수 있는 경지.

중원의 모든 문파가 그 움직임을 항상 주시한다. 그만큼의 파급력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설화 수비."

"하명하십시오."

"악가가 천명을 거스른 증거를 확보했나?"

"그렇습니다."

백사겸의 눈빛이 좌중을 훑는다.

"모두 악가의 무인들이군… 추포? 아니지…. 귀찮으니 모두 참해야겠어."

허유가 맹한 눈빛으로 백사겸을 바라보고, 그는 마치 하품이라도 하듯 입을 쩍 벌리며 검을 흔들었다.

어느새 자욱하던 안개가 옅어져 있었다.

황군 고수가 움직이고 손짓 한 번에 피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허유는 그제야 무언가 안도감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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