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16화 (17/29)

제 16화

산동악가 山東岳家

무진이 하늘 높이 펄쩍 뛰어올랐다.

후우우웅ㅡ!

거친 바람이 귓가를 쓸어넘긴다. 마구 휘날리는 검은색 코트가 밤하늘 사이로 녹아든다.

이대로 놓치길 바랬다. 싸움을 오래 끌고 나가기엔 내상의 회복이 더디다.

그러나 역시 수위에 이른 고수의 안법일까.

어둠 사이서 홀로 빛나는 선혈이 고인 듯한 핏빛 눈. 그리고 옷자락 사이로 가려지는 하늘의 별빛들.

움직임을 쫓기엔 차고도 넘쳤다.

악가주의 신형이 지붕을 박차며 가속한다.

"서라!"

창대가 쏜살같이 휘둘러진다. 후웅ㅡ! 촉이 지나간 궤적에 남아 이글거리는 붉은 내력은 마치 허공을 태우는 듯하다.

유형화된 봉황신공의 양기였다.

동시에 무진의 손도 휘둘러졌다. 후발제인의 뜻을 담은 손짓. 다가오던 창대가 무진의 몸에서 한참 멀리 빗껴나갔다.

공중에서의 수 교환. 몸을 지지할 기반이 없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몇 번이고 회전하며 뒤엉킨다.

한 바퀴 돌아 머리가 땅으로. 악가주가 급하게 내지른 창대를 무진이 장법으로 응수한다. 쩌억….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동시에 가로등의 불빛이 무진의 등에 닿는다. 태양을 열화한 듯한 누런 빛이 옷자락을 비추고.

땅 아래서 수많은 섬광이 빗발쳤다.

"이런…!"

타다당ㅡ! 타다다당ㅡ!

위를 향해 솟구치는 별빛. 요원한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간 손짓은 무진의 신형을 향했다.

허공을 향해 팔다리를 휘둘렀다. 몸 안에서 생겨난 힘의 흐름. 건곤대나이의 묘리를 이용해 뒤틀었다. 실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몸이 공중에서 몇 번이고 회전하고.

피잉ㅡ!

쏟아지는 탄환이 무진의 팔다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찢어지고 구멍 뚫린 옷 사이로 상처가 엿보였다.

갈라진 피부에서 전해져 오는 따가움. 너머로 타고 흐르는 뜨거운 선혈. 조금 깊게 팬 곳은 있으나 큰 상처는 없다.

무진이 안도하며 사각으로 몸을 숨겼다.

'어둠이 날 살렸군.'

미약한 가로등의 불빛에 기대어 사격하기엔 그 형체가 희끄무레했다. 저들은 조그만 흔적을 쫓기엔 안법 성취가 낮다.

그러나 밝은 백주(白晝)라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악가의 무인들이 소리쳤다.

"위로 올라가! 땅에서는 못 맞춘다!"

동시에 들려오는 발소리들. 건물 외벽의 자그마한 틈새를 밟고 올라오는 기척이었다.

그 사이로 강맹한 발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이곳에서 그런 존재감을 내뿜을 이는 단 한 명뿐. 무진이 하늘을 돌아보았다.

맞은편 건물의 옥상을 박차고 날아오른 악가주가 팔을 힘껏 젖힌다. 길게 휘어진 팔다리. 그 모습이 마치 궁신탄영(弓身彈影)을 연상케 했다.

"흡!"

숨을 들이켬과 동시에 사내의 가슴이 크게 팽창한다. 젖혀졌던 팔이 앞으로 휘둘러졌다. 신체의 탄력을 한껏 이용한 투창.

열화비천창(熱火飛天槍)이 봉황신공의 열기를 품고서 유성처럼 내리꽂힌다.

후우우웅ㅡ.

콰지직ㅡ!

떨어진 창이 썩은 나무 바닥을 부수고, 기반을 잃은 무진의 몸이 같이 추락한다. 뒤이어 착지한 악가주가 창대를 뽑아 들고 현란하게 돌려댄다.

눈을 현혹하는 듯한 움직임. 변화무쌍한 초식이 실로 화려하다. 그 사이서 은색 줄기 하나가 뻗어 나와 무진을 후려쳤다.

쩌엉!

다급히 수도(手刀)로 내리쳐 막는다.

그 반동을 이용해 창대는 다시 회전했다. 일격을 막으니 쏘아지는 이격. 이어지는 삼격. 휘어지는 창대에 점점 가속이 붙고.

분명 반듯하게 뻗었을 막대가 점차 낭창거리며 휘어지는 듯 보였다.

'위험하다.'

무진이 전신 혈맥에 내력을 끌어올린다. 울컥 올라오려던 핏물을 다시 삼키고는 어금니를 악물고.

새빨간 눈이 이제는 충혈될 듯 검어지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눈앞의 장면. 시간이 끝없이 쪼개어져 늘어지는 듯하다. 쿠르릉…… 각종 잡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낮고 길게 울리는 천둥처럼 들렸다.

악가주는 순간 등골을 타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온몸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 무척 불쾌하다.

분명 이 같은 느낌을 알고 있었다. 순간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더욱 다급해지는 손속.

쐐애액ㅡ!

강화된 안력이 휘어지는 창대의 투로를 읽어내었다. 봉황비상창(鳳凰飛上槍)의 쾌속하고 현묘한 초식이 낱낱이 풀어 헤쳐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선혈. 전부 죽은 피다. 진득하게 늘어지는 느낌이 불쾌했다. 안법의 치명적인 부작용 때문이다.

갈빗대. 오른팔. 왼 다리. 다시 올라가 관자놀이.

채재재쟁ㅡ.

마치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충돌음이 장내를 울린다. 손으로 후려쳤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소리.

"크으...!"

악가주의 짤막한 비명. 찢어진 호구에서 새어 나와 창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이 보였다. 빈틈이다.

무진이 전진했다. 양손으로는 창대를 계속 빗겨내면서다. 서로의 손에 찢어지고 터져 생긴 상처가 그득하다.

'촉박하다.'

악가주는 양동에 불과하다. 문제는 소총이다. 화기를 밀수하는 놈들이 그 위력을 과소평가할 리가.

시간을 끌수록 완성되는 포위망이 되려 치명적인 비수로 다가올 터. 사방에 사선(射線)을 둔다면 자신이라도 살아남기는 어렵다.

속전속결만이 해답이었다.

"흐읍...!"

무진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전신 혈도를 내달리는 짙은 마기. 동시에 막중한 부담이 몸을 조여왔다.

얼마 전 있었던 전투의 대가다. 회복되지 못한 깊은 내상.

나눌 수 있는 합이 많지 않다. 삼 합. 무진은 생각과 동시에 끌어올린 기를 분배했다.

'이 합 안에 끝낸다.'

소나기같이 쏟아지는 찌르기를 모두 쳐낸 무진이 금나수를 펼쳤다. 마진팔나수(魔進八拿手)의 수법.

초식 사이를 마치 뱀처럼 타넘은 오른손이 곧장 악가주의 옷깃을 향해 쇄도하고.

악가주가 창을 돌려 무진의 팔을 막아낸다. 란(攔)의 원리를 살린 구명절초. 찰나에 이루어진 동작이다.

여기까지가 일 합.

'예상했다.'

그러나 무진이 곧장 이 초를 뻗으려는 순간, 주변의 건물 옥상과 지붕에서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신경을 꽉 메우는 듯한 살기가 사방에서 쏘아져 온다.

하나하나가 전부 늘어진 사선(射線).

감각이 경종을 울린다.

무진이 다급히 몸을 날리고.

타다다다당ㅡ!

철로 된 비가 여름날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투두둑… 탄환이 나무로 된 탁자와 벽장을 도려내고, 자기 그릇을 깨부수며 날아온다.

구름에 죽음의 얼굴이 드리웠다.

그러나 이곳은 불 켜진 건물의 안. 이전과 같은 요행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종아리와 어깨에 탄환이 박힌다. 피가 튀고. 고통이 엄습해 왔다.

"끄으……"

그런 와중에도 무진의 고개가 돌아간다. 악가주를 향해서다. 한 번 쏘아진 탄환은 적아를 가리지 않는다. 공평하게 대지를 붉게 적시며 달려들 뿐.

그 사이를 악가주는 뚫고서 달려오고 있었다. 팔과 다리, 등짝에 골고루 탄환을 받아내면서다. 미친놈. 무진의 입에서 비릿한 웃음기가 새어 나왔다.

그래. 말했지 않나. 생사결(生死決)이라고.

자신은 지금 일가(一家)와 결투를 벌이고 있다. 것도 자그마치 수백 년을 이어져 온 명가다. 목숨 따위를 내버려서라도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가. 당연했다.

무진은 문뜩 떠올렸다.

신교를 짓밟는 군홧발. 메케한 화약의 연무. 분명 십만대산을 불태우며 전부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몰락한 소림의 종지부를 찍으며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족쇄가 질겼다.

'멍청했군.'

달려오는 악가주의 모습에 이십 년 전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응대를 해 주어야 하리라.

지붕 위를 점거한 악가 무인들이 다급히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창을 휘두르는 악가주. 이미 전신이 한계에 달한 모습이었다.

무진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커먼 마기를 두른 채로.

* * *

솨아아ㅡ.

잔잔한 파도가 친다. 바람에 흐드러진 물결이 배를 찬찬히 밀어냈다.

남쪽으로 도망친 허유와 설화는 남양호(南陽湖)에 떠 있는 나룻배 하나를 훔쳐 탔다. 남양호는 미산호(微山湖)까지 길게 이어지는 커다란 호수.

그대로 미산(微山)까지 향해서 뭍에 오른 다음, 육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첨벙… 첨벙…

허유가 열심히 노를 젓는다. 그것도 벌써 두 식경이 넘어가니 슬슬 팔이 아팠다. 그래도 별수 있나. 뭉친 탓에 아파오는 어깨를 몇 번 돌려주고 허유는 다시 힘을 쓴다.

그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조차 맺히지 않았다. 날씨가 추운 탓일까. 아까부터 바람이 자꾸만 불어왔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설화는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허유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무공과는 전혀 연이 없어 보이는 눈앞의 여인과는 달리 겉치레 수준으로나마 배운 자신이 하는 게 옳다. 생각만은 그랬다.

떨리는 몸과 팔은 당장이라도 관두라며 비명을 질러대는 듯했다. 몸은 정직하니까.

왠지 모르게 경직된 분위기를 흩어 보고자 설화가 허유에게 말을 건넨다.

"저… 혹시 안 힘드십니까?"

"보면 모릅니까요? 뒤지게 힘들지요."

"그럼 제가 잠깐 젓는 게…"

"아, 아씨가 하면 느려 터질 게 뻔하니까 놔 두시요. 내가 하는게 낫습니다요."

첨벙… 첨벙…

허유는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쿠웅…… 하고 느껴지는 충격. 놀라서 급히 뒤를 돌아보니 주인 없는 배 한 척이 있었다.

그들이 타고 온 것과 같은 나룻배다. 후우… 허유는 순간 철렁인 새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금 노를 잡았다.

분위기가 조금 스산한 탓이다.

그리 합리화한 허유는 놀람을 감추고자 주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수가 옆으로 늘어진 숲 위로 달이 하나 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는 뻑뻑한 운무가 짙게 자리했다. 의식하고 나니 느껴지는 숨결에 습기가 찬 것 같기도 하다.

"…밤인데 안개가 짙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요."

멀리서 희끄무레 보이는 배들의 형상이 많았다. 전부 텅 빈 나룻배들. 지난 폭풍에 유실된 놈들일까.

저렇게 뭉쳐서 멈춰선 모습을 보니 뱃묘지가 따로 없었다. 안개 낀 묘지라. 괜스레 떠올린 감상이 스산함만 더해 주었다.

허유가 몸을 부르르 떤다.

"추우시면 역시 제가…"

"잠깐만."

허유가 설화의 말을 다급히 끊었다. 분위기가 변한다.

멀리서. 조금 떨어진 안개 사이에서. 층층이 낀 안개 사이로 장막에 한 번 걸러진 듯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아래로 딛고 선 나룻배의 모습이 하나, 둘.

사방에서 뱃묘지를 포위하듯, 사람을 한둘씩 태운 나룻배가 나타났다. 도주로를 간파당한 걸까.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숙여."

허유가 낮게 속삭이며 설화의 머리를 눌렀다. 동시에 자신도 몸을 숙여 배의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솨아아ㅡ.

파도가 친다.

물결을 가르며 다가오는 배들의 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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