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11화 (12/29)

제 11화

작은 협객

무진은 가부좌를 취했다. 그러는 사이 허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옮겨야 할 짐이 아직 남았다며 갔다 오겠단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는 무진은 허유가 어련히 잘 하겠거니 싶어 그냥 놔두었다. 그 또한 무공을 어느정도 익힌 몸일진대, 설마 뒤를 밟히겠냐는 생각으로.

그리고 돌아온 허유의 뒤에선 왠지 모를 인기척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무진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나와라. 다 알고 있으니."

"이런."

직후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끼이이익ㅡ.

벌어진 문틈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비췄다.

거칠게 난 수염과 바닷사람 특유의 사나운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 오른쪽 허리춤에 찬 검집은 그가 좌수검(左手劍)을 사용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해남검문(海南劍門) 장문인 대리 이상천.

스무 해 전에 맺어두었던 인연이다.

"잠시 나가있거라."

"그럼 저는 산동으로 가는 마차를 하나 알아보고 있겠습니다요."

"그러도록 해라."

무진이 허유를 내보내고 난 직후 이상천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무진."

"얼굴을 마주보는건 스무 해 만이지. 이젠 얼굴보다 서신에 적힌 필체가 더 익숙한데."

"나는 아직 자네의 얼굴이 익숙한데 말이지. 옥에선 밥에다 영약을 섞어서 준 모양이야? 신수가 아주 훤하군."

"설마. 매번 적지 않았나. 더럽게 맛이 없었다고."

"원래 몸에 좋은건 맛이 없는 법이야. 혹시 모르지 않나. 정말로 영약을 섞었을지."

"잡초 뿌리 정도는 넣었겠군."

짧은 해후를 마친 두 사람이 크게 웃었다. 그러다 돌연, 상천이 얼굴을 굳히며 무진을 향해 말을 던졌다.

"백도총회가 파(破)했다. 숭산에 혈향이 짙게 퍼진 탓이지."

"그런데?"

"남아있는 소림의 장로 항렬이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숭산의 안에서. 남아있는 학도사가 흔적을 살폈지만, 완전히 처음 보는 무공의 형태였다.

"음."

"처음에는 소림과의 악연이 깊던 문파가 벌인 짓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였어."

그러고는 무진의 몸에 난 상처들을 슥 훑는 상천.

"네놈이 벌인 일이야. 안 그런가?"

애당초 무진의 몸에 남은 상흔을 생각하면 숨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필 해남과의 연락책으로 몇 번 오갔던 허유가 걸리고 만 것이 실책이겠지.

무진이 추궁을 인정하듯 웃으며 답했다.

"어차피 다 알고 왔지 않나. 상천."

그 말을 들은 상천이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많은 이들을 자네 혼자 죽였나?"

"그래."

확답을 들은 상천이 허, 하고 웃으며 마주 답했다.

"괴물이 되어 돌아왔군."

"세상이 날 괴물로 몰아간 것이지."

"풀려나자마자 소림으로 오다니… 그래, 원하던 것은 다 이뤘나?"

"물론…."

커헉ㅡ, 컥ㅡ.

무진이 말을 하다 말고 마른 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흐뜨러진 호흡 사이로 비릿한 철분향이 느껴진다. 피를 삼켰다는 뜻.

내상이 크다는 증거였다.

무진이 뒤이어 덧붙였다.

"못 볼 꼴을 보였군. 아무래도 문파 하나를 상대하는건 부담이 커서 말이야."

"상태가 심각한가?"

"아니. 몇 주 정도 정양하면 나을 정도야. 황실이 지속적으로 견제해서 그런지, 소림의 위세가 예전의 반도 못하더군."

"황실이 정파에 목줄을 채우고 한 일이, 소림을 견제하는 일이였으니 말이지. 일개 문파가 가지는 위상이 너무도 높았어."

후우우우….

상천이 분위기를 돌리고자 숨을 크게 내쉰다. 동시에 무거워지는 장 내의 공기. 한 고수가 내쉬는 숨결만큼의 무게가 얹어진 듯하다.

생각을 다 정리한 상천이 말을 흘렸다.

"그런 상징성을 가진 소림이 무너졌다. 백도라는 이름 하에 묶여 있던 이들의 결속이 무너졌음을 뜻하지. 난세가 찾아올 거야."

"강호는 본래부터 난세였어. 정파라 한들 칼밥으로 먹고사는건 매한가지 아닌가."

"그러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던 것도 정파였지."

"그런 역할은 진즉 끝났어. 백년도 더 전에."

해남문주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부정하지 못하겠군. 하지만 시기가 나빴어."

"무슨 말이지?"

상천이 제 품에서 고이 접힌 종이 하나를 꺼내어 무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급보였다. 그것도 해남검문의 장문인에게 알리는 극비. 당장 무언가에 쫒기는 듯 휘갈겨 써내린 서체에서 급박함이 느껴졌다.

그것만 봐도 느껴졌다. 사안이 결코 가볍지 않다. 무진이 상천의 말을 경청했다.

"내 휘하의 심명대(深溟隊)에서 올라온 첩보다. 광동진가(廣東陳家)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고 하지. 읽어봐라."

무진의 동공이 움직이며 종이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읽어나간다. 그렇게 받아들여진 정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게 사실인가?"

"전부. 직접 보고 들은 정보들 뿐이다. 그런데도 그 정도야."

"…심상치 않아. 소림이 무너진 일 따위는 고작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어."

"고작이 아니다. 정파를 결속시키던 소림이 무너진 것이 기폭제가 될 것이야. 물이 꽉 찬 찻잔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댄 것과 같지. 넘칠게다."

그 말에 무진이 박장대소하며 답했다.

"내 탓인척 하지 말게, 상천. 결국 일어날 일이 아닌가. 굳이 내가 하지 않았어도 말이야."

"소림을 치지 않았어도 상관이 없었다는 말투야. 정말로 복수만을 위해 그 난동울 피운게 맞나?"

"모르겠군. 어디 한 번 맞춰 보지 그래?"

무진의 말을 들은 상천이 침묵했다.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는 듯했다.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던 상천이 문뜩 고개를 들었다. 고민을 끝마친 모양.

"그러고 보니 서신은 다 보았나?"

"진즉에."

촤악ㅡ.

상천이 무진의 손에 들린 급보를 가져와 제 품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아마 여러 인사들의 손을 더 거치겠지.

"방금 본 것은 비밀에 부쳐."

"알겠다. 그러고 보니 곧 유월이야."

잠시 공기가 살랑이는 것이 느껴졌다.

상천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폭풍이 불어올 시기야. 해남은 어찌 할 생각이지?"

무진이 앞으로의 행보를 물었다. 그에 상천은 직감했다. 그는 폭풍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라는 것을.

상천은 줄곧 그 말만을 기다렸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모두 이 문답을 위한 밑거름일 뿐.

이제야 자신이 무진을 찾아온 목적이 이루어졌음에, 상천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피해야겠지. 가장 큰 산의 뒤에서."

"함께하겠다는 소리군."

서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다. 자연스럽게. 오랜 해후를 나누는 친구처럼.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걸치지."

"병자에게 주음을 권할 셈인가."

"약주다. 영약과도 같은 효능이 있지."

상천이 그러며 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찰랑이는 소리만 들어도 술의 맑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안에 든 영기가 손짓을 따라 요동치는 탓이다. 과연 그 말대로 평범한 술이 아니라는 뜻.

"고맙게 받지."

"그러고 보니, 아까 못 들은 답이 있었구만. 무진. 원하던 것은 다 이뤘나?"

"적어도 신교의 원수 중 하나를 보냈으니, 당분간은 조금 잠잠해지겠군. 이거로 조금 넋을 달랠 수 있겠어."

상천이 호리병의 마개를 따 무진에게 건넸다.

"먼저 한 모금 마시게."

잔이 없는 탓에 호리병이 두 사람의 손을 바쁘게 오갔다. 분위기를 풀어줄 만한 여러 가지 만담이 오가고. 혀 끝을 간지럽히는 약효가 감돌때쯤.

곳간 안에서 자그마한 바람이 불었다.

* * *

두껍고 거친 우장(雨裝) 사이로 섬섬옥수같은 손 하나가 삐져나왔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넓게 펼쳤으나 차가움은 내리지 않았다.

어느새 그쳤구나.

그리 중얼거리며, 그녀는 커다란 챙모자를 벗고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끼어 있는 먹구름은 답답하기만 하다.

산 넘어 산이랴. 제 심정을 대변하는듯 싶어 실소가 피식 새어나왔다. 그녀의 눈빛이 꽉 닫힌 숭산의 중턱에 닿았다.

- 피칠갑이 된 숲의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던걸 발견했소.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소승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 내상은 없고, 상처는 처치를 해 놓았소. 몇 가지 증언을 들을 것이오. 문답이 끝나는 대로 하산해 주었으면 하오.

그들이 자신에게 물어온 것은 정말로 얼마 안 되는 증언 뿐이었다. 자신이 데려온 이가 실은 정체를 숨긴 마인이었다는 이야기 정도.

본래라면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죄를 엄중히 다스려야 했으나, 의림이 그것을 제지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한 의(儀)자 배분이 무진의 손에 모조리 죽었으니 사실상 다음 방장인 셈. 그런 이의 목숨을 구했다. 심지어 절세고수를 눈 앞에 두면서까지다.

마인 놈들이야 예로부터 사람을 속이는 경우가 잦았다고 합리화하는 분위기였다. 도리어 지과위무(止戈爲武)라며, 근래에 보기 드문 협객이라는 말도 있었다.

마치 소림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신경쓸 일조차 아니라는듯.

'…머리가 복잡해.'

결국 마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자신의 실책이다.

수십의 목숨이 제 탓에 날아갔다는 죄책감. 그것이 유월의 마음을 옥죄고 있었다. 그러다 등봉현을 떠돌다 허유를 발견하고는 몰래 뒤를 밟았다.

숨어들어 둘이서 나누는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소림이 과거에 범한 죄가 크다고 한다. 무려 해남의 장문 대리가 뱉은 말이니 아마도 사실일 테지.

후우….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옮고 그름이 명백했을 일에도 은원이 끼어든다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강호의 생리였다. 사람이 이루는 사회라기엔 지나치게 기형적인 형태다.

보민. 호국. 그리고 은혜과 원한. 그를 위해선 목숨 몇 개 정도는 우습게 날아가기도 한다. 강호의 법도는 과연 옳은가.

너무 많은 생각을 품은 모양인지 어지러웠다. 생각을 비울 필요가 있었다.

'돌아가자.'

사박ㅡ.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어깨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는가."

"…"

상천이 어느새 나와 그녀를 부른다.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는 소리. 크나큰 결례였다. 거기다 상대는 분명 해남검문의 장로 대리였다.

당장 검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상대는 관용을 베풀었다.

유월은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해남의 장로를 뵙습니다."

"할 말이 많은 눈치던데. 안 보고 돌아가도 되겠나?"

"…"

"어차피 궁금한건 다 훔쳐 들었을 테니… 뭐, 네가 알아서 해라."

파도 모양의 자수가 유월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순간 바닷바람의 짠 향이 느껴지는 듯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저 멀리서 허유가 다 쓰러져 가는 곳간을 향해 걸음을 바삐 옮기고 있을 뿐.

유월은 저도 모르게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문주님! …으로 가는 …하나를 수배…"

"……"

들리는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녀는 고민했다.

'지금 가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나눈다고 해도 대체 무얼? 복수를 행한 이에게 왜 복수를 했느냐고 따져 물을 셈인가? 강호에선 예삿일이 아니던가.

심경이 복잡해진 그녀는 잡아놓은 숙소로 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해서 주시하는 무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 * *

몸이 맑다. 엊그제 상천에게 받아 마셨던 약주의 기운이 혈도를 다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덕분인지 무진의 얼굴엔 화색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궂었던 날씨도 마찬가지였다. 구름은 개고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오늘은 또 귀신같이 날이 갠거 같습니다요.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왔는데."

"그렇군. 수배했다는 상단은 어디에 있지?"

"이 근처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아, 저기 보이는구만요."

저 멀리 물건을 산처럼 쌓아 둔 짐마차가 보였다. 그 주변으로 꽤 많은 인원들이 행을 갖춰 짐들을 둘러싸고 있다.

허유가 달려가서 상단의 책임자에게 말을 건넨다. 산동으로 가는 상단이 맞는지 재차 묻자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호주머니에서 짤랑이는 은전 몇 자를 건네주었다.

책임자는 행렬의 중간에 낀 마차로 들어가면 된다고 답하였다. 무인으로 동행했을 때와는 취급이 다르다. 돈을 더 내고 손님 자격으로 함께하기에 그렇다.

안내받은 마차 위를 보니 척 봐도 비싸게 팔려나갈 법한 고급 기호품들이 실려져 있었다. 중원에서 나는 각종 향신료들이 보기 좋게 포장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 사이로 조금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상한 향신료가 있는 걸까. 어찌됐건 자신의 일은 아니었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고… 이게 전부 얼마인지."

"마을 하나를 수레에 지고 다니는군."

무진과 허유가 마차 옆에서 서 있자, 곧 상단의 책임자가 와서 말을 건넸다.

"곧 출발할 것이요. 아직 몇 사람이 안 와서. 적적한데 잠시 이야기나 나눌 수 있겠소?"

아마 자신도 지루했던 모양인지 여러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번에 소림이 봉문해서 곧 등봉현이 망할 것이라느니. 혹은 하남 일대에서 정파로 알려졌던 무인들의 싸움이 많이 일어났다던지 하는 이야기다.

고작 며칠 사이에 정사지간으로 돌아서거나, 아예 사파로 전향한 문파가 심심찮게 보인다고 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종남과 화산이 한바탕 붙은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그러고 보니 동행하는 무인이 많군."

"말했지 않소. 정사지간으로 돌아선 이들이 많다고. 말이 정사지간이지, 사파랑 다를게 뭐가 있나. 어디 인적 없는 숲이라도 지나가다 마주치면…"

책임자는 그 말과 동시에 엄지를 추켜세워 제 목에다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슥, 하고. 죽는거지. 안 그렇소?"

"확실히. 그럴 만하군."

그가 무진과 허유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소곤소곤 말했다.

"내 무인이란 작자들을 한두번 본게 아니올시다. 가끔은 명문 정파라는 이들도 술에 취해가지곤 칼부림을 내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이들이 처벌을 받던가?"

"처벌은 무슨. 거 말만 어디 세가니 문파니 하지, 사실상 거기에선 왕이란 말 아니요?

분명 근처에 산채(山寨) 하나 으리으리하게 내 놓고 밥 먹듯이 약탈하는 이들도 있었을 거외다. 다 제 놈들 뱃속으로 들어가는거지."

"그렇군…."

"그럼. 지나가는 코흘리개 애새끼도 다 알 법한 사실인데. 그런데 모르는 것을 보니 어디 귀하신 분인가 보오?

이제 보니 양놈들처럼 차려 입으셨고… 아하. 산동으로 가시는걸 보니 왜놈들이나 덕국(德國)과 연이 있으신가 보군."

그는 어지간히 말 할 상대가 없었는지, 무진과 허유를 향해 아낙네처럼 수다를 떨어댔다.

대화의 흐름은 어느새 최근 중원의 정세에서 제 딸내미 자랑으로까지 넘어갔다. 대충 들어주는 척 하며 한 귀로 흘리던 무진의 눈에, 멀리서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봐. 기다린다는게 저기 저 사람들 아닌가?"

"아, 맞소. 다행이 늦지 않게 왔군. 편안하게 모실테니 푹 쉬고 계시오."

책임자는 그리 말하고는, 몸을 돌려 소리쳤다.

"다들 출발 준비해ㅡ!!"

성량이 우렁찼다. 궂은 일을 하는 이들 특유의 기개가 느껴진다. 멀리서 걸어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친해 보이는 무인 둘과 여성 한 명.

다가오는 모습이 익숙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어딘가 침울해 보이는 곤륜의 제자였다.

"쯧…"

"왜 그러십니까요?"

"아니다. 우리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있지."

"예입."

무진이 짐마차 위로 몸을 실으려다 말고, 상단의 책임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게. 혹시 남는 챙모자 하나 있나? 클수록 좋네."

"남는건 없고, 파는건 하나 있소."

"가져다 주게. 돈은 내지."

"알겠소이다."

상인에게서 커다란 챙모자 하나와 다리까지 내려오는 겉옷을 받아든 무진은, 곧장 그것들을 입고는 마차 위로 올라갔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습니까요?"

"너도 아는 사람일게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문주님?"

"어찌하긴 뭘 어쩌나. 길을 가다 보면 적당한 곳에서 갈라지겠거늘. 눈에만 띄지 말거라.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무진은 그리 말하고는 천막에 기대어 눈을 붙였다. 다친 혈도가 회복되고 있는 탓에 몰려오는 피로가 짙었다.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이 태산이다. 외세에서 들어온 고수들과 부딛치는 일이 잦아질 터. 가는 길에 내상을 회복해야만 했다.

단전에서 내공이 꿈틀거린다.

수레가 규칙적으로 덜컹였다. 가끔씩 걸리는 돌뿌리는 정박자 사이의 변주였다. 그렇다 한들 고수의 집중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무진은 낮선 기척과 함께 느껴지는 살기에 눈을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