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10화 (11/29)

제 10화

탈출 (수정)

휘둘러진 주먹이 중간에 끼어든 검면과 충돌했다.

채앵….

종이 울리는 듯한 청아한 소리가 숲 속에서 울려퍼지고, 유월이 즉시 제 손목을 붙잡으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그림자 위로 피가 뚝뚝 새었다.

'호구가 찢어졌어….'

검과 주먹이 부딪쳤다기 보단, 바위에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른 모양새였다.

유월이 경악했다. 진즉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대체 얼마나 고강한 경지란 말인가. 그러나 몸은 대적할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세를 취한다.

검 끝이 무릎 아래서 흔들거렸다. 유연한 방어를 중시하는 자세. 강직한 눈빛에서 버텨내리라는 다짐이 엿보였다.

무진이 낮은 음성을 흘렸다.

"왜 막는거지?"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걸 어떻게 넘기겠어요."

"…"

결국 협이었다.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끼어들었다는 얘기. 더구나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피에 미친 마인을 볼 때의 그것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진은 소림의 피를 원했으니까. 허나 그녀는 끼어들어서는 안됐다. 자신의 개인사가 깊게 얽힌 은원일 뿐이었으므로.

무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천 소저. 내가 말하지 않았나."

"…뭘 말이죠?"

무진의 안광이 흉흉한 빛을 띄었다. 녹아든 달빛조차 지울수 없는 살의가 엿보인다. 순식간에 뻗어져 오는 창백한 주먹.

유월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흡.

동시에 무릎 아래서 춤추던 칼끝이 비상한다. 깔끔하게 펼쳐진 백룡선무(白龍線舞). 그 누구라도 감탄사를 내뱉을 만한 완성도였다.

허나 이미 경지를 이룬 고수의 일권을 막기에는 한참 모자랐던 걸까.

쩌엉ㅡ!

무진의 권격이 검면을 강타했다. 검이 크게 출렁이고

넓어지는 균열의 끝자락. 더 크게 찢어진 유월의 호구에선 이전의 배는 될법한 피가 쏟아져 흐른다.

그녀가 다시금 손목을 붙잡고 일어섰다.

"분명 말했어. 목숨은 하나뿐이라고."

붉은 눈이 유월을 응시한다.

무언가가 속삭였다.

보라, 그것은 마치 옛적에 승천을 포기한 교룡(蛟龍)처럼 갈라진 눈이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복수요 제 눈빛처럼 시뻘건 피만을 찾는 악귀다.

이제야 네가 무엇의 앞에 섰는지 자각이 들지 않나. 제 목숨을 내버릴 자신이 있었나. 후회스럽지는 않는가.

시선이 뱀처럼 기어 온 몸을 훑더니 기어코 고막을 헤집어 들어온다. 그래서 시선은 다만 물음을 던지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 생각이 없냐고. 당장 등을 돌려 도망친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유혹하는 듯했다.

꾸욱ㅡ.

유월은 그저 검을 한번 다잡는것 만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필 첫 강호행에서 만난 이가 마인이었다니.

그리고 자신은 그를 소림 안으로 들여놓고야 말았다.

첫 날, 그가 무인이 아니라고 선을 그을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며칠간의 정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권고하지. 비킬 생각이 없나?"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그러니 그 책임도 자신의 몫이었다.

유월이 답했다.

"없어요."

"알겠다."

직후 무진의 손이 움직였다. 손날을 세워 만든 수도(手刀)가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 뻗어진다. 인지를 벗어난 속도.

푸욱…!

어깻죽지가 갈라져 피가 튀었다.

뭉특한 손끝으로 낸 상처의 예리함이 검날 못지않다. 갈라진 옷가지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일 촌이 넘게 패여 있었다.

흘러내린 피가 팔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손잡이에 닿았다. 축축하고 뜨겁던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감각이 피와 함께 증발하는 듯했다.

유월의 팔이 애처롭게 떨렸다.

무진의 팔은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인다. 무심하리만치 무정한 손길이 그녀를 쓰담았다. 옆구리가 짐승의 송곳니가 씹고 지나간 것처럼 뜯어진다.

짐승.

그래, 짐승이다.

무진은 문뜩 생각했다.

'무인은 짐승과 같다.'

밥 먹듯이 피를 마시는 자들. 숨 쉬듯이 사람을 죽이는 자들. 강호는 도사들의 신성한 성역이 아니다.

인간으로 살기 부끄러운 것들이 낯을 터놓고 사는 이곳은 짐승의 우리다.

그런 짐승들의 서식지가 사람 사는 집터와 같은 곳에 놓였다. 걸핏하면 마을로 내려가 사람을 습격하고. 갈취한 쌀과 보리로 주린 배를 채운다.

많은 이들이 무림의 처마 밑에서 등을 기대며 살아갔다. 허나 담장이라 생각했던 처마는 누군가의 굳어진 피였으매.

본래 피는 물과 같이 넓게 퍼진다.

그러니 자신들이 그것에 기대어 서 있었다면, 곧 그것이 겹겹이 쌓여 층을 이룰만큼 흘렀다는 소리.

문뜩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무인이냐 물어오는 그녀를 상대로 선을 두었었지.

무인이 아니라며.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같은 짐승이라는 것을.'

내질러진 주먹.

무진이 유월의 명치를 향해 간격을 좁힌다.

검이 권격의 앞길을 방해했다.

챙그랑ㅡ!

"커헉…!"

곤륜의 음각이 선명하게 새겨진 검날이 산산이 부숴진 채 달빛을 머금었다.

그것은 이미 거울과 같았다.

새하얀 달빛이 금속면을 비추고. 솔잎의 그림자가 그 위를 덮고. 또 그 위로 무진의 눈빛이 비추어진다.

마공을 연성했을때 비로소 지니게 되는 마인의 상징과도 같은 안광. 짐승의 눈깔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무진은 유월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무인이라 하였다. 과연 그 본성은 어딜 가지 않는지 멍청했다.

피해를 줄인답시고 마적떼가 날뛰는 평야에 홀로 나가지를 않나. 지금도 경지를 모르는 고수의 앞을 가로막고 있지를 않나.

'그녀는 짐승인가.'

그녀는 자신과 같은 짐승에 불과한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무진이 발을 뻗었다.

쿠웅ㅡ!

유월의 복부에 무진의 발바닥이 충돌했다. 그녀의 신형이 멀리 날아가 나무에 쳐박힌다. 곧바로 땅을 향해 수그러진 고개.

충격으로 기절한 모양새였다.

무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의림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주 웃고 있었다.

미치광이처럼.

"땡중."

의림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무진의 머리 위에 둥글게 뜬 달빛을 마주했음에도 죽어있는 눈동자.

허탈해진 이들의 특징이었다.

무진은 자연스레 그가 지옥에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남아있던 협객이 기어코 목숨을 하나 살리는군."

무진의 손이 다가온다. 의림의 머리를 향해. 마침내 자신의 순번이 온 줄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눈을 질끈 감고 처분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의림에게 무진은.

툭ㅡ.

툭ㅡ.

그저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 말았을 뿐이다.

의림이 절망하며 외쳤다. 왜 자신을 죽이지 않느냐고.

무진은 그저 짧막하게 답했다.

"이미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나."

완전히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의림의 표정을 본 무진은, 그의 귓가에 대고 덧붙였다.

"어서 오게."

지옥에.

* * *

…소림의 다음 대 방장이 목을 매 자살했다는 풍문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이야기였다.

[천마실록(天魔實錄) 십일장(十一張 ) 중(中) 발췌(拔萃).]

* * *

허유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진의 곁에 나타났다.

본래 싸들고 왔던 짐가방을 모두 가지고. 오는 길도 없어 산길이 조금 거친데, 용케도 짐가방을 잘 간수했구나 싶었다.

그것이 착각이었음은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잔가지에 여기저기 긁힌 상처들과 크게 찌그러진 가방의 외형을 보면 그 누구나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짐작케 하리라.

"옷은?"

"어 그게… 전부 물에 떠내려갔지 뭡니까."

"이거 큰일났군. 이런 꼴로는 마차도 못 탈텐데."

"그러면 해가 뜨면 근처 마을에서 옷가지를 조금 사서 오겠습니다요."

"…그래. 그 전까진 우선 걷지."

그러자 허유가 무진을 보며 사정했다.

"아이고, 단주님 저 여기서 더 걸으면 발에 쥐납니다요."

"무공은 허투루 배웠나?"

"적어도 단주님이 옥에 계실동안 수련은 꿈도 못꿨습죠."

"그럼 여기서 벗어날 동안만 걷지. 아직 숭산의 안이야."

무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뭇가지며 돌덩이 여기저기에 걸린 사체들과 피가 수두룩하다. 걸리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허유도 그것을 알고는 있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단주님. 저 둘은 지금이라도 죽여 놓는게 낫지 않겠습니까요?"

"허유, 자네가 그런 말을 뱉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만, 단주님의 정체를 알아볼 수도 있고…."

"하나는 이미 미쳤고, 다른 하나는 쉬이 내뱉을 성격이 아니지."

"그래도 저 무승은 살려두면 위험한게…."

허유와의 설전이 길어질것 같자 무진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숭산의 바깥으로 향하는 갈래였다.

그러자 허유가 급히 무진의 뒤를 따라왔다. 물론 말은 아낀 채였다. 지금은 제 주인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모양.

설령 그렇다고 무진이 허유를 죽이겠냐만은, 밉보이는건 또 다른 문제였다.

때문에 허유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무진에게 답을 들을수 있었다.

"지금 저 땡중을 죽여 버리면, 결국 천 소저도 공적으로 잡히겠지. 무고를 증명해줄 증인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그렇겠지요."

"이건 우리가 행해야 할 복수야. 그 업을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몫이지. 알아들었나?"

"…예."

쿨럭ㅡ.

순간 무진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튀어나왔다. 흘러나온 피가 옷자락을 적셨다. 이미 붉어서 티조차 나지 않았지만서도.

허유가 무진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요?"

"내상이 깊군. 조금 쉬어야겠어."

비틀거리는 무진을 허유가 옆에서 부축한다.

"단주님. 산동으로 갑시다. 일단 산동의 의화문에서 몸을 회복시키지요."

"그러는게 좋겠군."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 * *

비가 오는 새벽. 나무 판자틈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공기를 차갑게 식힌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무진의 의식을 깨웠다.

다 가시지 못한 잠결의 기운이 정신을 답답하게 가로막는 탓에, 무진의 눈은 반쯤 게슴츠레하게 떠진 상태였다. 조금씩 졸음을 뚫고 돌아오는 정신이 안개를 뚫고 내달리는 햇살 같다.

마침내 의식을 완전히 차린 무진이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쳐진 거미줄. 습기를 푹 머금은 탓에 불쾌하게 느껴지는 짚단. 자신의 몸뚱이는 그 위에 뉘여져 있었다. 것도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기절했었나."

무진은 지난날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숭산을 다 내려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몸짓. 그를 옆에서 부축하며 죽으면 안되니 뭐니 온갖 방정을 다 떨어대던 허유.

그러다 등봉현까지 걸음이 닿았다. 마지막으로 인적 드문 구석의 자그마한 폐건물을 찾아 들어온 것까지. 그곳이 바로 이곳인가 보다.

적당히 칸이 나누어져 있고, 썩은 짚단이 가득한 것을 보니 마구간으로 사용되던 곳이겠거니 싶었다. 무진은 일어나 제 머리를 매만졌다.

어지러운 기운만큼은 가시질 않는다. 내상의 여파일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열을 올리길 한참. 밖에서 젖은 풀잎을 밟는 소리가 사박ㅡ, 하고 울렸다.

끼이이익ㅡ.

문을 열고 들어온 허유. 바깥의 우중충한 빛이 벌려진 틈 사이로 들어온다. 그 탓인지 왠지 모르게 어둡게 보이는 허유의 낯빛.

그 품에는 간단히 끼니를 때울 건량 조금과, 약향이 짙게 풍기는 목함 하나가 들려 있었다.

무진의 시선이 허유의 얼굴을 향하고.

"니미. 비도 참 억수로 많이…."

동시에 혼잣말을 내뱉던 허유도 어느새 일어서 있는 무진을 포착했다.

"으아악ㅡ!"

허유는 놀랐는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귀청 떨어지겠군."

"아이고, 단주님. 언제 일어나셨습니까요?"

"얼마 안 됐다."

"몸은 좀 어떠신지…?"

"아주 죽을 맛이다. 황실의 견제 때문에 약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상상 이상의 전력이었어."

무진이 말하는 사이 허유가 다가와서는 제 품에 있던 목함을 건네었다. 가까이서 맡으니 약재의 향이 더욱 짙다. 본래 예상하던 것보다 더 좋은 품질의 약이란 뜻.

"요상단(療傷丹)입니다요. 드시지요."

"이걸 어디서 구했나."

"백도총회에 온 후기지수 중에 가지고 있는 이가 더러 있었습니다요. 그 중 하나를 꿰어 구매했습죠."

"허, 재주가 대단하군. 연극이라도 펼쳤나?"

"제 실력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닙니까요."

그 말을 들은 무진은 웃으며 목함을 열고, 요상단을 손에 쥐었다. 밖으로 꺼냈을 뿐임에도 폐가를 진동하는 약향을 보니 품질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필요 없으리라.

곧바로 요상단을 입 안에 털어넣고는 가부좌를 취했다. 그러는 사이 허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옮겨야 할 짐이 아직 남았다고 갔다 오겠단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는 무진은 허유가 어련히 잘 하겠거니 싶어 그냥 놔두었다. 그 또한 무공을 어느정도 익힌 몸일진대, 설마 뒤를 밟히겠냐는 생각으로.

그리고 돌아온 허유의 뒤에선 왠지 모를 인기척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부활했습니다...

이제 증상은 거의 다 지나갔는데 폐활량이 칼질당한게 확실히 느껴지네요.

이거 무섭습니다... 다들 안걸리도록 조심하세요. 걸렸다면 몸조리 잘하시구요.

다시 일일연재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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