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화
탈출
마기가 담긴 권격이 법력이 깃든 일장과 교차하는 순간.
무진의 몸이 칠 척의 거구 사이로 파고들었다.
꾸드득ㅡ.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과 격돌한 무진의 왼 주먹은 한 치의 미동조차 없이 힘을 흘려낸다.
동시에 의림의 입가에서 줄줄이 새어 나오는 검은 선혈.
"흐읍…"
"그래. 이쯤 멀어졌으면 충분하겠지."
담담히 와닿는 단조로운 어투. 의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을 농락하였다는 소리일까.
곧 수그러진 고개와 함께 의림의 시선이 무진의 오른팔에 닿는다.
그의 오른손은 다만 자신의 명치 위에 얹어져 있었을 뿐이다. 타격이 아니었다는 소리.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 했다. 전신에 미동조차 없이 발경을 해내는 무공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눈앞의 마인은 그것을 해냈다.
"커억…"
방금의 일수로 온몸의 기혈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극한까지 단련된 소림의 외문무공을 침투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는 소리다.
대체 저 나긋한 동작 어디에.
경악으로 가득 찬 시선.
그리고 의문을 떨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떨리는 눈빛에 대고 답하듯, 무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하늘과 땅을 크게 잡아 옮긴다.
이를 안다면 세상 만물의 힘줄기를 잡아 옮길수 있으리라. 감옥 안에서 보낸 이십년 면벽의 결과였다.
불완전한 묘리의 효용이 그러했다. 무진은 다만 이것이 온전해질 쯤엔 반탄의 경지에 닿길 바랬다.
요원한 일이었다.
"그게 무슨 사술…"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사술인가. 어린것이 벌써부터 꽉 막혔구나."
"지광, 그 노망난 늙은이 옆에 있다가 백치가 옮은게 아닌가?"
"무도한 마인놈이…"
경지가 높은 이들의 결전일수록 짧게 끝난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차라리 찰나라고 표현함이 옳았다.
무진과 의림의 승패가 결정나는데는 단 두합이면 충분했다.
심지어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 아닌가. 건곤대나이로 받아치기에는 또 그만한 것이 없었으니.
그가 자신만만하게 내지른 일장은 다만 그 자신의 명치에 고스란히 되돌아갔을 뿐이다.
바스락ㅡ.
무진이 걸음을 옮겼다.
의림의 앞으로 다가가던 무진이 자신의 귀를 막고선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명이었다. 복수가 머지 않았노라고 난데없이 허공에다 대고 속삭인다. 의림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진이 그런 무승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음공 한 번에 내력을 대체 얼마나 쏟아부은건지. 축기량으로만 따지면 무림 안에서도 수위에 들 정도의 양이다.
때문에 귀에서 자꾸만 삐이이ㅡ 하는 소리가 울리는데, 그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짜증이 치밀었다.
"내공이 아주 깊더군. 대체 대환단을 얼마나 쳐먹은거지? 지광도 일생동안 겨우 하나를 취했을 텐데."
"알 거 없다."
"허나 칠십이절예까지 팔아 만든 고수가 이정도라……"
보아하니 지광이 황군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해 절세고수로 키우려던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죽여버린다면 어떨까.
'멸문.'
다음 대를 이끌어갈 고수를 잃게 되니, 소림의 명맥도 여기서 끝이다.
의림은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겠다는듯 이미 만신창이에 가까운 몸을 끌고 일어섰다.
꽉 쥔 주먹 사이로 맺힌 핏방울이 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허나 마음을 좀 굳세게 먹었다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수 있는가.
무진이 뇌까렸다. 그게 가능했으면 신교는 끝나지 않았겠지.
이젠 소림의 차례일 뿐.
사사사삭ㅡ!
멀리서 수풀을 헤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뒤늦게 따라온 무승들. 그것도 거뭇하게 죽어버린 피를 잔뜩 칠한 가사(袈裟)를 입고서였다.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서 이십년 전 미친 괴승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마침 익숙한 얼굴도 보이던 참이다.
이십년 전에 보았던 면면들에 주름이 많이 늘어난 정도였다. 덕분에 알아보는데 문제가 없었다. 놈들이 맞다.
"소림의 최고수가 스물 여섯. 많구나. 줄어든 것이 저 정도라니. 다른 문파의 배는 되겠어."
의림이 웃으며 답했다.
토해낸 피가 잔뜩 묻어 붉게 물든 이빨을 드러내면서다.
"흐흐, 기고만장하셨소. 이제 그만 방장을 죽인 대가를 치루시오."
이어서 말을 꺼내려던 의림은 순간 멈칫했다.
무진이 의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가는 소림이 치뤄야지."
살의가 진득히 달라붙은 시린 안광을 흩뿌리면서다. 그야말로 모든 마인의 귀감. 천마(天魔). 의림은 그 이름의 무게를 새삼스레 실감했다.
욕계(欲界)에 거하는 마왕(魔王)이라더니. 과연 속세의 불법을 모조리 불태우려 온 것인가.
"…벗어날 때가 됐어."
무진이 중얼거렸다.
원수가 눈앞에 있다. 저승에서 한탄하던 교인들의 비명소리가 조금 먹먹하게 들렸다. 무진은 자신을 옥죄던 한탄이 한꺼풀 벗겨지는것을 느꼈다.
천마의 아가리에서 나온 번뇌가 의림의 귀청을 울렸다.
"남아있는 고수들을 모조리 참한다면 종지부로썬 충분하겠지. 너를 마지막까지 살려두마."
마왕이 걸어갔다. 똑같이 수풀 사이를 헤쳐나가면서다. 의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멀리서 자신의 사형사제들이 달려오고 있음에도.
저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오직 방장의 원수뿐이다. 그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악에 받친 괴성이 터져나오고 권각이 휘둘러진다. 신성한 법력이 가득 담긴 채로. 우우웅…… 동시에 무진의 손이 뻗어진다.
터업ㅡ.
소림 노고수의 주먹이 무진의 손에 허무하게 붙잡혔다. 펼쳐진 손바닥이 굳은살을 감쌌다. 무진의 팔뚝이 팽팽히 조여지고.
동시에, 펴져있던 손가락이 접혔다.
뿌드드득!
"끄아아악ㅡ!"
한 승려의 손뼈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무진이 손바닥을 펴자 승려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채 주저앉는다.
무승들은 무진이 쉬게 두지 않았다. 합격이라면 백팔나한진으로 지겹도록 수행한 바. 네 명이 동시에 사방을 점하며 달려든다.
"하압!"
무진이 허리를 젖힘과 동시에 몸을 뒤집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몸이 한 바퀴 회전하고.
부유감이 끝나자 구두굽이 딱딱한 나무껍질과 맞닿았다. 나무 몸통에 수직으로 올라선 모양새. 그것이 무려 삼 장의 높이었다.
파각!
무진이 자리를 박찼다. 으깨진 나무조각이 비산한다. 어느새 해가 진 하늘. 달밤 사이로 검은 인영이 가속했다.
쐐애액… 무진의 귓전에 거친 바람소리가 스치고. 그대로 뻗어진 금나수가 무승 하나의 면상을 잡아채 땅에 내리꽂았다.
쿠웅!
벽력이 터진 듯한 소리. 골통 하나가 그대로 으깨졌다. 기억하던 얼굴이다. 지난번 신교의 무인 셋을 죽인 무승.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조금 옅어졌다. 무진은 거기서 희열을 느꼈다. 동시에 정면에서 뻗어져 오는 세 개의 기파.
무진이 팔을 휘둘렀다. 두 개는 쳐냈다. 하나가 그대로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순간 기도를 타고 넘어오는 선혈.
왈칵! 무진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무언가 비틀린 탓일까. 되려 개운하다고 생각했다.
"흐읍!"
방금 받아낸 충격을 고스란히 팔로 전달하며, 승려 하나의 갈빗대를 모조리 부수었다. 고깃덩이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져 허공을 난다.
등에서 느껴지는 충격. 쿠웅!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그 기세를 타고 주먹을 뻗었다. 또 하나가 죽는다.
사방이 적이었다. 숲이 시뻘겋게 물든다. 무진의 몸도 그랬다. 흘러나온 피가 가슴팍을 적셨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꿈치를 휘둘렀다. 묵직한 타격감이 있었다. 뒤에서 또 한놈이 나가 떨어지고.
계속해서.
또.
죽이고…
* * *
허유와 유월은 한참을 달렸다.
숭산 중턱에 위치한 소림의 외벽을 넘어 울창하게 뻗어진 수림 사이로 몸을 던졌다.
처음엔 커다란 소리가 몇 번 들리고 말더니, 가까이 와서는 쉴새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걸음이 더욱 급해졌다. 앞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게!"
"나도 모릅니다! 그냥 급한 일이 있다더니 가셨어요!"
거짓말이었다. 허유는 무진이 직접 소림의 방장을 만나러 간 것을 안다. 숲 안쪽에선 계속해서 뇌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미 소림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외진 산골. 사람이 다니는 길조차 없다. 때문에 한참을 헤매야 했다.
"아까부터 비명 소리가 들리는것 같은데…"
"…아마도 싸우고 있나 봅니다."
"누구랑요? 설마 소림은 아니죠?"
아마 맞을거다. 허유는 그 사실을 쉬이 말하지 못했다. 결국 옆에 있는 아가씨도 정파의 일원이니까.
끄아아악ㅡ ㅡ ㅡ.
이미 달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숲속.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 사이, 구슬피 우는 부엉이 소리 사이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소음이 섞였다.
유월이 말했다.
"당신들, 대체 뭐에요. 전에는 구명의 은이 있어서 캐묻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알아야겠어요."
"…신교요."
"이런 미친…. 당신들… 마인이었어. 가서 말려야 해."
이제 곧. 앞에서 대체 어떤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유월이 경신법을 운용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왜 먼저 갑니까요! 죽으면 어쩌려고!"
"신경쓰지 마세요!"
휘이잉… 바람이 숭산의 머리칼을 휩쓸었다. 짙은 혈향이 훅 하고 풍겨져 왔다.
사람 한둘이 죽은 모양이 아니었다.
박투의 소음이 잦아든 상태. 전투가 끝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대로 가다간 몰살이다. 유월이 허리춤에서 칼을 발도했다.
스릉ㅡ!
순간 귓전을 스치는 굵직한 목소리. '협행은 관두는 게 좋습니다……' 라며 무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긁어댄다.
환청이었다. 왜 지금와서야 들리는걸까.
나약한 마음가짐 때문일까. 분명 상대의 무공 수위를 알았다. 황야에서 마적 여럿을 손쉽게 제압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마인이란다. 문파의 어른들이 어렸을적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흉악한 마인에 대한 목소리.
기차 안에서 그가 충고하던 소리가 생생하다.
제 목숨 아까운줄 알라고.
'내 목숨이야.'
철컥ㅡ. 유월이 제 검을 바르게 고쳐쥐었다. 여차하면 몸이 먼저 반응해 휘두를수 있도록.
항상 바른 마음가짐으로 협을 행하라. 지과위무(止戈爲武)를 떠올려라.
마침내 살육의 현장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웁.
유월이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울창하게 자란 수풀 곳곳에 탈구되고, 함몰된 채로 피투성이가 된 시체들이 걸쳐져 있었다.
그는 검붉은 양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제 피와 남의 피로 전신을 떡칠한 모습. 그 앞에는 허망한듯 주저앉아 있는 무승이 한명 있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의림.
소림의 다음 대를 이끌어갈 이가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떨고 있다니.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의림의 머리 위로 무진의 주먹이 뻗어진다.
동시에 유월이 달려나갔다.
"멈춰ㅡ!!"
채앵……
검면이 마인의 주먹을 막아 세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tmi ) 곰도 펀치 한방이면 사람을 죽입니다.
근데 슬러그탄 앞에서는 장사없다네요. 그냥 그렇다구요. 하하.
그건 그렇고 증세가 더 심해지네요. 여전히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썼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쉴 수는 없어서 당분간은 계속 이럴 거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