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탈출
방장의 머리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투둑ㅡ, 툭ㅡ….
무진의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그 위를 적신다.
잠깐의 정적.
사람의 머리가 이토록 쉽게 뜯어져 나갈줄 몰랐던 것일까.
무승들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곧 정신을 차린 그들이 소리쳤다.
"방장을 시해한 흉수다! 잡아!"
소림의 무승들이 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흉수를 노리고 뻗어지는 권격의 기세가 매섭다.
후우웅….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오는 팔을 상체를 돌려 슬쩍 피했다. 살랑이는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곧바로 이어지는 난격.
중의 왼팔과 오른팔이 쉴 새 없이 휘둘러졌다. 짧게 끊어치는 듯한 움직임. 다채로운 변화를 포기하고 오로지 속도에 치중한 공격이었다.
후우웅ㅡ!
일직선에 가까운 투로. 힘의 방향을 비틀기도 그만큼 쉬웠다. 무진이 팔을 휘둘러 뻗어오는 주먹을 옆으로 쳐낸다.
공격이 전부 무위로 돌아가자 소림승의 민머리 사이에 깊은 골이 패였다.
쓰으으읍……
숨을 한껏 들이쉬는 소리. 무승의 폐부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근접 승부에서 밀리자 커다란 한 방을 준비하려는 모양새였다.
커다란 공격에는 그만큼의 빈틈이 존재하는법.
근접 박투에서 밀리자 급해진 탓인지 잘못된 판단을 한 모양이다.
무진이 도수(徒手)를 세우며 달려나간다. 타다다닥!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무진이 팔을 앞으로 뻗었고.
쯔저억!
"커허어어…."
무진의 손이 숨이 차올랐던 폐부를 꿰뚫었다. 무승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장실로 향하는 통로는 좁다. 사람 하나가 겨우 팔다리를 놀릴 수 있을 정도.
한 명이 허무하게 죽자 무승들은 곧바로 방식을 바꿔 통로를 빠져나갔다.
대신 그 앞에서 진을 치고 무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나간다면 합격술에 당하고 말것이다. 무언가 주의를 흐뜨려놓을 물건이 없을까 고민하던 무진의 눈에, 지광과 두었던 바둑판이 들어왔다.
'저거면 되겠어.'
쿠웅!
무진이 발을 크게 한 번 굴렀다. 지광의 시체 옆에 놓여있던 바둑판이 통째로 흔들렸다. 촤르르르! 순식간에 바둑알들이 허공으로 비산하고.
무진이 그것들을 방장실의 입구쪽으로 전부 쳐내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액!
흰색, 검은색 바둑알들이 기를 머금고 앞으로 쏘아진다. 그 광경이 밤하늘을 주유하는 유성우와 같았다.
밖에서 짧막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순식간에 생겨난 빈틈. 무진이 바둑알들의 뒤를 쫒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바깥의 빛이 가까워진다.
곧 자신을 잡기 위해 진을 치고있던 무승들의 모습이 보이고.
몸이 비좁은 통로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순식간에 여덟명의 무승이 팔방을 점하며 달려들었다.
무진의 동공에 뻗어오는 권각들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친다.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어보이는 협공.
펄ㅡ럭!
주먹과 맞닿은 코트 이곳저곳이 볼품없이 구겨지며 허공을 날았다. 무승 하나가 생각했다. 손맛이 가볍다고. 이건 절대로 사람의 몸뚱이를 때린 감촉은 아닐진대.
순간 위화감을 느낀 그가 하늘을 쳐다보고는 외쳤다.
"위다!"
어느새 코트를 벗어던진 무진이 허공 사이를 돌아, 소림승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뻐억!
무진이 중 하나의 머리를 걷어차며 숲 속으로 도약했다. 곧바로 무승들이 그 뒤를 맹렬하게 쫒았다.
타다다다닥!
무승 하나가 무진의 바로 옆까지 따라붙었다.
손과 팔에 넘실거리는 법력의 기파.
무진을 향해 용권연신(龍拳練神)의 제 이초 금룡헌조(金龍獻爪)가 펼쳐진다.
우우우웅!
수기(手氣)에 담긴 불문의 영험한 구결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가까스로 상체를 숙여 피한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 사이로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무진이 곧바로 마진팔나수(魔進八拿手)를 펼쳐 팔뚝을 붙잡았다.
"…!"
혈도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마기에 승려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곧바로 무진이 팔을 쭉 당기며 승려의 명치에 장법을 내질렀다.
쩌어억ㅡ!
무진의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패여들어간 승려의 명치.
"크헉…!"
입술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고. 우드득…… 어깨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무진이 잡고 있던 팔을 놓자, 승려의 몸이 공중에 붕 떠 날아가더니 나무에 쳐박힌다.
쿠웅….
충격에 떨어진 나뭇잎이 허공 사이로 흩날린다. 무진이 그 사이로 질주했다. 열 다섯의 인영이 그 뒤를 쫒았다.
쏘아지는 주먹을 허리를 숙여 피했다. 동시에 놈의 면상에 일장을 내질러 안면을 으깨었다.
뒤에서 휘둘러지는 각법을 비껴 흘리며 그대로 디딤발을 걷어찼다. 무승은 꺾여진 무릎을 쥐어잡고 주저앉았다.
한두명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출난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열댓명을 전부 죽이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쿠웅ㅡ!
무진이 각법을 펼쳐 땅을 크게 박찼다.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튀어오른다.
파삭ㅡ!
그리고 나뭇잎 하나를 밟더니, 더 위로 솟구쳤다.
초상비의 경지였다.
"잡아! 놓쳐선 안돼!"
필사적으로 무진을 잡아내려는 움직임. 무승들의 발재간이 점점 빨라진다.
바람이 불어와 숲을 한 차례 쓸어냈다. 무진은 나뭇가지 끝에 피어난 한떨기 잎사귀를 밟고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놓치겠소!"
"방장님을 죽인 흉수요. 기별을 넣어 숭산을 둘러싸는 포위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뒤에서 울리는 굵직한 목소리.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승들이 뒤를 돌아보자, 칠 척 근육질의 거구가 몸을 풀듯 팔다리를 휘적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의림(儀琳).
소림의 절정고수들이 속한 십팔나한(十八羅漢)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승이었다. 사실상 현재 소림에 남아있는 이들 중에선 가장 강하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내가 가서 잡지요. 그대들은 가서 방장의 유해를 수습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의림이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의림이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무진을 추격한다.
쓰으으읍……
무진의 뒤를 추격하는 의림의 폐부가 부풀었다. 동시에 염천혈에 기가 파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의림이 기파를 덧씌운 소리를 내질렀다.
- 내려와ㅡㅡ!!
숲 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무진은 급히 고막에 내력을 씌워 보호했다.
음파에 담긴 내력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과거 괴승 시절의 지광을 떠올리게 하는 심후한 내력.
"저놈이 바로 실세였군."
순간 무진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급하게 기막을 씌우느라 온전히 막아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 사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거리를 좁힌 의림이 무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가까스로 피해낸 무진이 먼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콰지직ㅡ!
뒤이어 무진이 서 있던 나뭇가지를 부수며 떨어진 의림이, 곧바로 자세를 잡고서 법력의 기운을 담은 손바닥을 내질렀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압도적인 위력으로 닿는 모든것을 으스러뜨릴법한 신공이 무진을 향해 치닫는다.
무진의 생각이 빠르게 돌아간다. 피하기엔 늦었다. 빠지는 것보다 장법의 속도가 더 빨라.
판단을 마친 무진이 손을 내뻗었다.
마기가 담긴 권격이 법력이 깃든 일장과 교차하고.
쿠웅ㅡ!
커다란 충돌음이 숭산의 숲 속을 울렸다.
* * *
비무를 관전하던 허유는 순간 느껴진 기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멀쩍이서 느껴지는 기의 충돌.
쿵ㅡ. 쿠웅ㅡ….
게다가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소리까지.
전투의 여파가 무진이 향했던 방향에서 넘실거리며 밀려오고 있었다.
순간 전신의 털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니미….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거여."
그래도 우선 하나는 알겠다. 제 주인 되는 이가 무언가 일을 크게 벌려놓았다는것. 허유는 뭔가 불안한 기색을 느끼곤,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항상 무언가 일이 잘못 흘러갈 때만 이러한 느낌을 받았었다.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일종의 예감이다.
'좋지 않은데….'
눈 앞의 상석(床石)에서 벌어지는 비무는 슬슬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수십 번의 대결 끝에 남은 후기지수는 겨우 넷.
앞으로 세 번의 합이면 시합이 끝난다. 비무회가 끝난다면 본관으로 쏠렸던 시선이 흩어질 터. 곧 다른 이들도 일을 눈치챌 것이 뻔했다.
게다가 벌써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어둠이 찾아온다는 소리다.
밤에 울리는 소음은 대게 멀리 퍼진다.
멀쩍이 떨어진 산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가 그리 귀청을 울리는데, 저만한 고수들이 휘두르는 권각과 도검의 충돌음은 어떠할까.
'우선 합류하자.'
무진이 있는 곳으로 가야 모시고 도망을 치던, 상황을 보다 혼자 내빼던 결정할 수 있을 터.
허유가 뒤로 슬쩍 몸을 내빼려던 찰나, 바로 옆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소협. 어딜 가시려고요?"
천유월이었다.
"…잠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것 같습니다요."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무진 대협의 모습도 보이질 않네요."
"주인 어르신은 먼저 일을 처리하러 가셨습니다요. 저도 곧 따라가야 하는지라…"
"그럼 저도 따라갈게요. 혹시 도울 일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그 말을 들은 허유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여기서 그녀가 끼어든다면 일이 조금 이상해 지는데. 대체 왜 오지랖을 부린단 말인가.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수 있었다. 무진에게 입은 구명지은의 탓이리라. 안그래도 그에 대한 호감이 꽤 높아 보이기도 했으니.
어떻게 한담.
고민하던 허유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래 뭐, 갑시다. 가요."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동행하는 편이 안전하기도 하고, 좋지 않나.
허유는 그리 생각하며 무진을 쫒아 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약기운때문에 하루종일 누워있다가 급하게 정신차리고 썼습니다.
안그래도 늦었는데 내용마저 부실해 보이네요. 다음편에 최대한 만회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