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무진은 아직도 그 날의 일을 기억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십만대산의 비옥한 대지 아래 황(皇)이 적힌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서양 열강의 문물을 들여와 신식으로 탈바꿈한 청의 군대는 막강했다.
황군의 대열이 십만대산의 앞에 펼쳐졌다. 중원의 인구수 답게 막대한 물량이었다. 그야말로 아닌 때 불어온 추풍(秋風).
떨어지는 나뭇잎들은 붉었다. 선선한 혈기가 산을 물들었다. 걸을 때마다 발에 채이는 것은 거뭇케 죽어나간 낙엽들.
단풍이다.
다만 때가 가을이 아니었을 뿐.
- 대열을 무너뜨려라!
고수의 움직임은 때로는 날렵하게 움직이는 묘(猫)와 같고, 그 속도는 사냥감을 뒤쫓는 산군(山君)과도 같다.
턱없이 부족한 황군의 숙련도로는 고수를 쏴 맞힐 수 있을 리가 만무.
그마저도 한 발을 쏜 후에는 반드시 긴 재장전 시간을 거쳐야만 했다. 고수들은 그 간격을 파고들어 전선을 붕괴시켰다.
때문에 다시금 승기를 잡아가려던 신교 고수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중원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씨발……중원 놈들이 왜 여기 있어!
-황군과 붙어먹었구만. 쌍놈 새끼들!
-보신경을 펼쳐라! 중원 놈들에게 발목이 묶이면 죽어!
수십 년간 정종 무학을 공부하며 막대한 내력을 쌓아온 정파의 거두들이었다. 그 깊이가 남다를 수밖에.
본래 신교의 고수들도 장로급의 인사들이라면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런데 심지어는 일대일의 생사 결도 아닌 전쟁이다.
조금만 발목이 붙잡혀도 쇠 구슬이 소나기처럼 몸을 두드린다. 처박힌다. 마침내 근육의 한올 한올을 찢고 목숨을 앗아간다.
제대로 조준한 총기의 위력이 그랬다.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 그 와중에 신교의 무인 수십을 충살(衝殺)한 불승의 소문이 있었다.
-아미타불.
항상 부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온몸에 피를 칠갑하고 다니는 미친 괴승.
소림의 상승 절기를 이어받고, 대환단까지 고스란히 녹여낸 탓에 당대의 상승고수 반열로 평가받던 무인.
지광이었다.
한계까지 단련된 외문무공(外門武功)과 반야공(般若功)의 중후한 내력은 도저히 뚫을 방도가 없는 거성과도 같았고.
바위와 같은 근육으로 내력을 담아 펼치는 전신 발경은, 수백년을 헤아린 고목을 일장으로 꺾어 부러뜨릴수 있었으니, 마치 충차와 같았다.
지광이 펼치는 달마십팔수(達磨十八手)에 죽어나간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무진은 기억한다.
흘러내리는 핏물 사이로 부릅뜬 두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지광의 얼굴을.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기억 속의 괴승 지광과, 늙어 추레헤진 소림의 방장 지광의 음성이 겹치며.
무진은 현실을 마주했다.
"그래, 이십년 만이지."
근육이 가득찼던 과거의 팔뚝과 달리 지금은 앙상한 노인의 뼛다귀뿐이다. 정종 무공은 심후하여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한다고 하던가.
그 역시 흐름 앞에선 장사가 없었다.
예전보다 나아진 점이라면 호흡이 좀 더 깊고 정순해졌다는 것뿐. 지광이 지녔던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은 진즉 깨졌다.
다만 비대해진 기가 정을 붙잡아두고 있는 모습.
무진이 그런 지광의 모습을 훑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성을 유지할수 있을지 고민했건만, 조그만 감정의 동요조차 일지 못하는 몰꼴.
"추레해졌군, 늙은이. 대산을 짓밟았던 괴승의 풍모는 어디로 갔나."
"옥에서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건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는군. 그래. 소림을 짓밟을 생각인가? 천마(天魔)."
"알고 있었잖나."
"혼자서?"
지광은 실소를 참지 못하고 끅끅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건 전대의 천마가 재림해도 불가능한 일이지. 무얼 원하고 왔는지 알아. 암. 알수밖에."
"이봐, 지광."
"응?"
"딱 두 가지만 말하지. 첫째. 나는 천마의 이름을 버렸다. 둘째. 시간이 없다. 말라 비틀어진 주둥아리 그만 놀리고 용건만 말해."
소림의 방장이 무진의 뇌까림을 듣고는 실소한듯 웃어제꼈다. 오늘따라 웃음이 많다며 중얼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허, 허허허허… 천마의 이름을 버렸다니. 그 무진이?"
지광은 이십년간 옥중의 소식을 늘 주시했다.
이십년 전의 무진의 눈에 어린 독기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무재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그가, 경지를 이루게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출옥을 막지 못해 기여코 이 자리까지 찾아오게 만들었다. 소림의 방장이 가진 권력으로도 부족했던 걸까.
무진이 덧붙였다.
"이젠 의화단주(義和團主)지."
"흐… 그래. 보나마나 비밀 결사일것 같은데, 내게 알리는 이유가 뭔가."
"당신이라면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분명히 그럴 거야."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정보였다.
출소한 이후로 불분명했던 무진의 행적을 낱낱히 파헤칠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지광은 웃으며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그래, 아무튼. 무얼 원하는지 대강 예상은 가네만, 아무래도 직접 듣는게 편하겠군. 말하게."
"이십년 전, 신교 정벌전의 원인과 배후. 그리고 전대 천마의 죽음에 관한 일."
"바라는게 너무 많아. 다 알려줄 수는 없어."
무진이 물었다.
"없는건가, 아니면 못하는건가."
"여전히 눈치가 빠르군. 못하는 것에 가깝지. 이유는 알테고. 내가 아는건 정벌전의 원인에 불과해. 듣겠나?"
영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 소림의 방장쯤 되면 앉아서도 천리 밖을 내다보는 듯한 정보가 있다고 들었건만.
사실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어쩌면 지광이 방장이 된 것은 스스로 쟁취하였기보단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어쨌건 안듣느니만 못한것은 사실이다. 무진은 흔쾌히 승낙했다.
"…듣겠다."
"앉게. 대신 다 듣고 나서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하네."
"하는걸 봐서 그리하지."
지광이 먼저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펼치고, 무진이 그 앞으로 마주보며 앉았다.
지광이 펼친 무언가는 꽤 자세히 들여다 보고서야 형태가 드러났다. 가로와 세로로 각각 그려진 열 아홉개의 선.
"바둑?"
"오랫동안 면벽을 하느라 적적하던 참이었어. 어울려 주겠나?"
지광은 그러곤 흰 돌 하나와 검은 돌 하나를 집어 올린다.
각각 좌상귀 외목. 그리고 우하귀의 오오에서 세칸 위쪽. 그것을 본 무진이 '허….' 하고 실소를 흘린다.
신강.
십만대산.
그리고 하남.
숭산.
두 바둑돌의 위치가 너무나도 절묘했다. "이런 식이군, 늙은이…" 무진이 혼잣말로 읊조리고는 말했다.
"…어울리지."
첫번째 흑돌이 놓였다. 숭산이 위치한 하남에서 조금 올라간, 우변의 위쪽.
북경.
황군이다.
뒤이어 지광이 무진이 돌을 놓을 곳을 읊었다.
"우하귀, 고목."
딱ㅡ.
돌이 놓인다.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의 위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대충 하나 더 올려두어라."
"대충?"
"두어라. 답을 원하지 않나."
딱ㅡ.
그러라 하기에 하나 더 놓았다.
곧이어 비좁은 방장실 안에는 두 사람이 착수하는 소리만 울렸다.
흑과 백이 하나씩 놓여갈 때마다 기보는 흡사 지도와 같이 변한다. 그러길 한참. 어느새 각 세력의 위치를 상세히 나타낸 세력도가 완성되어 있었다.
각 대문파의 위치에 하나씩 놓여진 흑색의 돌. 그리고 남경과 신강, 서장 등의 새외무림에 하나씩 놓인 흰색의 돌.
마지막으로 화북과 화중에 마구잡이로 놓인 흰색들.
'중원을 두 세력으로 나눴군.'
검은색이 청 황실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인 반면, 흰색 돌들은 모두 적대 관계.
분명 신교의 징벌전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것이라. 고민이 필요했다.
공통점은 황실에 반역한 세력들.
무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찾을수 있었다.
'난(亂).'
염군(捻軍)의 난.
그리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깨달은 모양이야."
열강과의 두 번째 전쟁과 더불어 감옥 안까지 소식이 들려올 정도로 커다란 사건들이었다. 눈치채지 못할 리가.
"……이미 두 번의 난을 겪은 황제에게 신교는 골칫덩이에 불과했군. 황군은 미리 싹을 밟아두려 했어. 그게 무리해서 징벌전을 연 이유야."
"정확하네."
"그럼 한가지 더."
"뭔가."
무진이 기세를 가다듬고는 지광을 노려보았다.
"정파는 어째서 신교의 징벌전에 참전했지?"
딱ㅡ.
소리가 난 직후 좌상귀에는, 검은색 바둑돌 한 개가 더 놓여 있었다.
무진이 착수한 돌이었다.
"맨입으로 알려줄 순 없지. 이기면 알려주도록 하겠네."
"아까 말한 부탁이 그거였나?"
"아니... 늙은이의 여흥이야."
무진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래. 한판 두지."
* * *
"승자는 종남의 유백홍!"
상석(床石) 위에서 희비가 교차한다. 주변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유월은 비무대 위의 모습을 눈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무인으로썬 귀한 장면일 것이다. 타 문파의 신공을 눈에 담는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러나 허유는 아까부터 자꾸만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유인 즉슨, 단주인 무진이 홀로 방장을 만나러 본전 앞마당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백도총회 기간 동안은 소림의 출입 제한 구역이 제법 널널하게 풀어진다지만, 팔대호원(八大護院)과 방장실이 있는 곳은 언제나 예외였다.
강호 무림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 거하는 곳이니 더욱 그러했다.
'아유… 거 참 미치겠네….'
그런데 아까부터 온 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무승들이 자꾸만 팔대호원쪽으로 빠져나가는게 아니겠는가.
본래 비무란 언제든 부상이 발생할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를 대비해 본전의 앞마당 이곳저곳에 호법을 서던 무승들이 있었을 터인데.
허유는 고개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갔구만.'
사방 그 어디를 둘러봐도 무승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허유는 무진이 향했던 방향으로 달려가는 무승 한 명의 그림자를 목격했다.
"저곳은… 단주님이 가셨던 곳인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부하느라 시간이 밀려서 겨우 한 편 썼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양두구육<羊頭狗肉>
황군이 십만대산의 땅을 밟은 날, 신교의 거진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양이들의 대포와 총칼을 앞세운 상승군(常勝軍)의 막강한 화력 탓이었다.
그러나 무인들의 목숨줄은 말의 힘줄과 같이 질기다.
살아남은 무인들은 십만대산의 빽빽한 수림 사이로 숨어들었다.
이후 수십 일에 걸친 토벌전.
질척한 싸움이 이어졌다.
무인들은 십만대산의 산맥을 제집 안방처럼 뛰어다녔고, 황군은 그들을 쫓기 바빴다.
나뭇가지를 밟고 머리 위를 나는 무인들을 어찌 총으로 쏴 맞출까.
처음엔 일렬이었던 전열이 지형에 맞춰 조금씩 지저분해졌다.
딱ㅡ.
떨어져 나간 이들은 과감히 버린다.
반대로 상대가 과하게 튀어나오면 기습해 잡아낸다.
바둑은 본래 반상 위의 작은 전쟁터와 같아서.
지광과 무진이 두는 바둑판은, 마치 그때의 참상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했다.
따악ㅡ.
선이 교차하는 점 위에 흔적이 새겨진다.
하나가 죽고, 또 하나가 놓이고.
가로세로 열 아홉 줄의 평원에 검고 흰 돌이 빼곡하다. 흰 뱀과 검은 뱀이 서로 똬리를 틀듯 영역을 구축했다.
그 모습이 마치 늘어선 전선(戰線)과도 같았다.
꼬이고 뒤엉킨 전장 사이에선, 무심한 듯 놓인 한 수가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는 비수로써 화한다.
늙은이의 심계가 깊은 탓이다.
접전이 고조되는 사이, 지광이 문뜩 입을 열었다.
"십만의 병사를 옮기는데 얼마나 많은 재정이 드는 줄 아나."
난데없는 선문답.
도저히 의중을 모르겠는 질문에 무진이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무슨 생각이지? 선문답은 네 선사(禪師)에게나 가서 떠들어라."
지광은 그러건 말건 떠들었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무한하지. 돌과 돌이 이어지는 선은 기나긴 보급로와 같고, 서로가 만나는 지점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그가 바둑알로 이루어진 단색 줄기를 훑는다.
"당연히 일전을 치르는데 들어가는 준비는 견고해야 하지. 안 그런가?"
"묻는 이유가 뭐지?"
"염군(捻軍)의 난은 민초가 일으킨 난. 태평천국은 태생이 광신 종교 집단이었지. 그런데도 반란은 십수 년이나 지속됐어.
아무리 절대고수 장락행이 그들을 이끌었다 한들, 그것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딱ㅡ.
또다시 돌이 놓인다. 삼면을 포위하려던 무진의 군사를 과감히 밀어내는 자리. 단수를 치려던 전선이 양옆으로 확장된다.
무진이 돌을 놓았다. 흰색 군사들이 적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진군한다.
그래, 보급.
전쟁을 하려면 당연히 진군로와 퇴로는 물론이요, 그 길을 통해 오갈 인력과 보급품이 있어야 했다.
"이런… 밀렸구만."
방금의 기습으로 흑돌의 세 방위가 막혔다.
무진의 백군에 둘러싸인 흑군이 퇴각을 시작한다. 좌상귀를 장악당하자 좌변을 통해 아래로 물러나는 흑돌.
퇴각하는 적의 병력을 고스란히 놔줄 생각은 없었다. 곧장 추격을 시작한다.
동시에 무진의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도 가지를 뻗었다.
민초들이 일으킨 염군과 태평천국은 어찌 십 년을 훌쩍 넘게 버텼을까. 신교 징벌전의 단초가 그곳에 있었다.
어느새 상념에 휩쓸린 손속이 마구잡이로 돌을 던진다.
따악ㅡ!
바둑돌을 내리치는 소리가 동혈 안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친다. 지광의 출수였다.
"신물경속(愼勿輕速). 생각이 삼천포로 빠졌구나."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흑의 군세가 무진의 퇴로를 끊어놓았다. 순식간에 고립된 좌변의 군사들. 순간 무진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보급.
군사력의 모든 것은 보급으로부터 나온다. 아무리 잘 관리된 창병들과 기마병들이 있다 한들, 뒷받침해줄 물자가 없다면 무용지물.
그 자체로 활로가 끊기는 셈이다.
"누군가 염군을 지원했군. 어디지?"
"글쎄, 어디겠나. 화북에는 예로부터 수많은 문파와 세가가 있었지. 자고로 민란이 성공하면 황제가 바뀌는 법 아니겠나."
"황제… 제왕. 그래, 제왕검형. 하나는 남궁이겠군. 놈들이 염군과 붙어먹었어."
"나머지 하나는 알겠나?"
무진의 생각이 깊어진다.
그러는 사이 백색의 돌이 흑군을 모조리 제압한다. 각 지에 뿌리를 두었던 세력들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이다.
"제갈. 그리고 태평천국."
"맞췄군."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걸까. 지광은 무진과 대화하면서도 여유롭게 수를 두었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고 움직이는 것 같은 교활함.
"이걸 왜 알려주는 거지? 본래 이기면 알려준다 하지 않았나."
"그래, 그랬었지."
순간, 지광의 면면에 웃음이 피었다.
낡은 버드나무 껍질처럼 주름진 피부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다 삭아가는 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섬뜩한 미소.
동시에 지광이 돌을 집었다.
따악ㅡ.
날카롭게 출수된 일초.
좌변 구석에 놓인 흑색 돌들을 무진의 군사들이 포위한 형세였다.
그러나 그 바깥에는 또다시 백색 군세가 무진의 돌을 포위한다. 그것이 방금 놓인 수 하나로 완성된 참이었다.
이중으로 겹친 흑백의 포위망.
그 모습이 마치 복숭아꽃이 핀 듯한 모습이어서 이르기를,
오궁도화(五宮桃花).
"그랬는데."
"……"
무진의 눈이 부릅떠진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여럿.
지광이 흘린 단서를 생각하다 그만 기감을 놓치고 말았다. 수준을 보아하니 전부 어느 정도 잘 단련된 무승들.
"시간이 남더구나."
"허, 이런…"
"남의 집에 뻔히 들어오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오만했구나, 천마."
"환격(還擊)에 당했군… 쯧."
무진은 품에서 연초를 꺼냈다.
이젠 겨우 두 개비밖에 남지 않는 고급 시가. 따악… 무진의 손가락이 퉁겨지는 소리가 방장실 안에서 답답하게 메아리쳤고.
후욱ㅡ!
순간 빛이 껌뻑였다가 사라졌다.
"음… 방금 대체…"
무진의 입가에서 피어오르는 독한 연기. 끝에 은은히 남은 열기가 방금 치솟는 화염이 실재하였음을 증빙한다.
지광이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무진. 자네 방금 뭘 한 거지?"
그러는 사이 무진은 태연히 팔을 움직인다. 덜그럭…… 무진이 통 안에서 바둑돌 하나를 집었다.
흰색의 돌. 무진의 검지와 중지 사이 위태로이 집힌 그것이 곧바로 반상에 놓였다.
따악ㅡ!
방금 놓은 한 수가 오궁도화의 맨 안쪽 겹에 갇힌 흑색 돌을 전부 죽였다.
곧이어 무진이 말했다.
"이봐, 지광."
무진의 물음은 지광의 인지에 닿지 못했다. 다만 지광이 느끼는 혼란감을 가중시켰을뿐.
그가 품에서 불쏘시개를 꺼내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노쇠했다지만 한때는 최고수의 경지를 넘보았던 몸. 착각할 리가.
다만 지광의 반응은 인지 부조화에 가까웠다. 손가락 끝에서 불을 튕긴다니.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혼란스러웠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무진은 담담히 읊조렸다.
"바둑은 모든 돌이 공평하지. 공평한 한 수야. 한 명은 절대 네 명을 이길 수 없어."
"대체 뭘…"
질문자가 역전된 선문답.
이번엔 무진이 노인을 향해 말했다.
어느새 절반 넘게 줄어든 연초의 끝을 손으로 집으면서.
"그런데, 언제부터 강호가 모든 이에게 평등했지? 그리 만만한 세상이 아닐 텐데."
설마.
지광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삼매진화(三昧眞火)라니.
그런 지광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진은 제 손으로 잡고 있던 연초를 모두 태워버리며 말했다. 순간의 불꽃에 비친 표정이 섬뜩했다.
"네가 보여주었지 않나. 괴승(怪僧)."
"대체 어찌 그런 경지를…"
"해탈(解脫)을 원하고 있었군. 천마를 제물로 바쳐 공을 얻으려는 거였어. 그렇지?"
순간 무진의 손이 지광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빠르게 펼쳐지는 금나수. 동시에 치켜올려진 녹옥불장이 무진의 팔을 가까스로 막아낸다.
"흐으…"
"지옥에서 너를 기다리는 이가 많아. 지광."
불장을 잡은 지광의 팔이 사정없이 떨린다. 단 한 번의 충돌로 기력이 모두 쇠한 모양새.
밖이 소란스럽다. 방장실의 입구로 무승 여럿이 달려드는게 느껴졌다. 본래부터 둘러싸인 형국. 무진은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뱀처럼 휘어진 금나수가 또다시 지광을 향해 쏘아졌다.
기력이 쇠한 팔은 무거운 옥석으로 만들어진 녹옥불장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곧바로 노인의 턱주가리 아래를 점하는 마진팔나수(魔進八拿手).
직후, 방장실의 입구에서 그림자가 진다.
타다다닥!
발소리가 들리고.
"방장님!"
동시에 무진이 노인의 모가지를 더욱 꽉 조인다.
기류를 읽은 지광이 반사적으로 외친다.
"커헉… 들어오지마! 거기 가만 멈춰. 아무 말도 하지 마!"
"판단이 빠르군. 노괴."
"무엄하다! 방장님을 놔 드려라 마인아!"
벽을 등지고 인질을 잡은 상황. 이대로 방장을 데리고 나가 포위를 물릴까도 생각했지만. 무진은 그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모가지 잡힌 닭처럼 몸을 비틀어대는 추한 노인이, 자신이 밖으로 빠져나갈 동안 쉴 숨이 아까웠다.
그동안 더 살아 세상을 눈에 담을 일 다경의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놈을 기다리는 이가 많다.
무진이 자신의 노궁(勞宮)혈에 기를 끌어올리며 말을 내뱉었다.
"네가 정말 해탈(解脫)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나?"
"…용서해 주게 무진. 그동안 많이 반성하며 살았어. 정말이야!"
"용서?"
"그래, 용서. 지금 놔 주면 별 탈 없이 보내주겠네. 응?"
"용서라…."
지은 죄를 덮어 주는 것을 뜻하는 단어, 용서. 무진은 한참이나 그 뜻을 음미하듯 곱씹었다. 과연 그를 용서해도 될까.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영원과 같이 느껴지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무진이 답을 내렸다.
"그래, 용서하지."
"…정말인가!"
순식간에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용서할 자격이 있는진 모르겠군. 그래도 상관없다면 나는 용서하마, 지광."
"고맙네…정말 고마워!"
그러나 점점 새하얘지는 핏색.
지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함을 느끼고 되물었다. 무진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기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마기였다.
탁하고, 어두운 성질을 지닌 마인들이 지닌 기.
신에 닿기 위해 걸러 내려둔 구정물의 격류가 그곳에 있다.
지광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용서해준다며! 무진!"
"지광. 말했잖나. 널 기다리는 이가 많아."
"잠깐. 잠깐! 살려줘!"
씨익ㅡ.
곁눈질로 힘겹게 바라본 무진의 얼굴에, 그 누구보다 소름끼치는 미소가 피어 있었다. 순간 등줄기를 타오르는 오한.
그리고.
그 광경을 끝으로.
쯔저어억ㅡ!
지광의 머리통이 뽑혀나왔다.
"먼저 가 있으시게. 조금 늦게 뒤따라 갈테니."
묵빛 코트 자락의 끝을 타고 검붉은 피가 흘렀다. 조금 홀가분해 보이는 사내의 등 뒤로 무승들의 인영이 겹쳤다.
무진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마가 아니었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