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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천마실록-6화 (7/29)

제 6화 양두구육 羊頭狗肉

무진은 아직도 그 날의 일을 기억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십만대산의 비옥한 대지 아래 황(皇)이 적힌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서양 열강의 문물을 들여와 신식으로 탈바꿈한 청의 군대는 막강했다.

황군의 대열이 십만대산의 앞에 펼쳐졌다. 중원의 인구수 답게 막대한 물량이었다. 그야말로 아닌 때 불어온 추풍(秋風).

떨어지는 나뭇잎들은 붉었다. 선선한 혈기가 산을 물들었다. 걸을 때마다 발에 채이는 것은 거뭇케 죽어나간 낙엽들.

단풍이다.

다만 때가 가을이 아니었을 뿐.

- 대열을 무너뜨려라!

고수의 움직임은 때로는 날렵하게 움직이는 묘(猫)와 같고, 그 속도는 사냥감을 뒤쫓는 산군(山君)과도 같다.

턱없이 부족한 황군의 숙련도로는 고수를 쏴 맞힐 수 있을 리가 만무.

그마저도 한 발을 쏜 후에는 반드시 긴 재장전 시간을 거쳐야만 했다. 고수들은 그 간격을 파고들어 전선을 붕괴시켰다.

때문에 다시금 승기를 잡아가려던 신교 고수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중원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씨발……중원 놈들이 왜 여기 있어!

-황군과 붙어먹었구만. 쌍놈 새끼들!

-보신경을 펼쳐라! 중원 놈들에게 발목이 묶이면 죽어!

수십 년간 정종 무학을 공부하며 막대한 내력을 쌓아온 정파의 거두들이었다. 그 깊이가 남다를 수밖에.

본래 신교의 고수들도 장로급의 인사들이라면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런데 심지어는 일대일의 생사 결도 아닌 전쟁이다.

조금만 발목이 붙잡혀도 쇠 구슬이 소나기처럼 몸을 두드린다. 처박힌다. 마침내 근육의 한올 한올을 찢고 목숨을 앗아간다.

제대로 조준한 총기의 위력이 그랬다.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 그 와중에 신교의 무인 수십을 충살(衝殺)한 불승의 소문이 있었다.

-아미타불.

항상 부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온몸에 피를 칠갑하고 다니는 미친 괴승.

소림의 상승 절기를 이어받고, 대환단까지 고스란히 녹여낸 탓에 당대의 상승고수 반열로 평가받던 무인.

지광이었다.

한계까지 단련된 외문무공(外門武功)과 반야공(般若功)의 중후한 내력은 도저히 뚫을 방도가 없는 거성과도 같았고.

바위와 같은 근육으로 내력을 담아 펼치는 전신 발경은, 수백년을 헤아린 고목을 일장으로 꺾어 부러뜨릴수 있었으니, 마치 충차와 같았다.

지광이 펼치는 달마십팔수(達磨十八手)에 죽어나간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무진은 기억한다.

흘러내리는 핏물 사이로 부릅뜬 두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지광의 얼굴을.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기억 속의 괴승 지광과, 늙어 추레헤진 소림의 방장 지광의 음성이 겹치며.

무진은 현실을 마주했다.

"그래, 이십년 만이지."

근육이 가득찼던 과거의 팔뚝과 달리 지금은 앙상한 노인의 뼛다귀뿐이다. 정종 무공은 심후하여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한다고 하던가.

그 역시 흐름 앞에선 장사가 없었다.

예전보다 나아진 점이라면 호흡이 좀 더 깊고 정순해졌다는 것뿐. 지광이 지녔던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은 진즉 깨졌다.

다만 비대해진 기가 정을 붙잡아두고 있는 모습.

무진이 그런 지광의 모습을 훑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성을 유지할수 있을지 고민했건만, 조그만 감정의 동요조차 일지 못하는 몰꼴.

"추레해졌군, 늙은이. 대산을 짓밟았던 괴승의 풍모는 어디로 갔나."

"옥에서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건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는군. 그래. 소림을 짓밟을 생각인가? 천마(天魔)."

"알고 있었잖나."

"혼자서?"

지광은 실소를 참지 못하고 끅끅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건 전대의 천마가 재림해도 불가능한 일이지. 무얼 원하고 왔는지 알아. 암. 알수밖에."

"이봐, 지광."

"응?"

"딱 두 가지만 말하지. 첫째. 나는 천마의 이름을 버렸다. 둘째. 시간이 없다. 말라 비틀어진 주둥아리 그만 놀리고 용건만 말해."

소림의 방장이 무진의 뇌까림을 듣고는 실소한듯 웃어제꼈다. 오늘따라 웃음이 많다며 중얼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허, 허허허허… 천마의 이름을 버렸다니. 그 무진이?"

지광은 이십년간 옥중의 소식을 늘 주시했다.

이십년 전의 무진의 눈에 어린 독기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무재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그가, 경지를 이루게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출옥을 막지 못해 기여코 이 자리까지 찾아오게 만들었다. 소림의 방장이 가진 권력으로도 부족했던 걸까.

무진이 덧붙였다.

"이젠 의화단주(義和團主)지."

"흐… 그래. 보나마나 비밀 결사일것 같은데, 내게 알리는 이유가 뭔가."

"당신이라면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분명히 그럴 거야."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정보였다.

출소한 이후로 불분명했던 무진의 행적을 낱낱히 파헤칠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지광은 웃으며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그래, 아무튼. 무얼 원하는지 대강 예상은 가네만, 아무래도 직접 듣는게 편하겠군. 말하게."

"이십년 전, 신교 정벌전의 원인과 배후. 그리고 전대 천마의 죽음에 관한 일."

"바라는게 너무 많아. 다 알려줄 수는 없어."

무진이 물었다.

"없는건가, 아니면 못하는건가."

"여전히 눈치가 빠르군. 못하는 것에 가깝지. 이유는 알테고. 내가 아는건 정벌전의 원인에 불과해. 듣겠나?"

영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 소림의 방장쯤 되면 앉아서도 천리 밖을 내다보는 듯한 정보가 있다고 들었건만.

사실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어쩌면 지광이 방장이 된 것은 스스로 쟁취하였기보단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어쨌건 안듣느니만 못한것은 사실이다. 무진은 흔쾌히 승낙했다.

"…듣겠다."

"앉게. 대신 다 듣고 나서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하네."

"하는걸 봐서 그리하지."

지광이 먼저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펼치고, 무진이 그 앞으로 마주보며 앉았다.

지광이 펼친 무언가는 꽤 자세히 들여다 보고서야 형태가 드러났다. 가로와 세로로 각각 그려진 열 아홉개의 선.

"바둑?"

"오랫동안 면벽을 하느라 적적하던 참이었어. 어울려 주겠나?"

지광은 그러곤 흰 돌 하나와 검은 돌 하나를 집어 올린다.

각각 좌상귀 외목. 그리고 우하귀의 오오에서 세칸 위쪽. 그것을 본 무진이 '허….' 하고 실소를 흘린다.

신강.

십만대산.

그리고 하남.

숭산.

두 바둑돌의 위치가 너무나도 절묘했다.  "이런 식이군, 늙은이…" 무진이 혼잣말로 읊조리고는 말했다.

"…어울리지."

첫번째 흑돌이 놓였다. 숭산이 위치한 하남에서 조금 올라간, 우변의 위쪽.

북경.

황군이다.

뒤이어 지광이 무진이 돌을 놓을 곳을 읊었다.

"우하귀, 고목."

딱ㅡ.

돌이 놓인다.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의 위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대충 하나 더 올려두어라."

"대충?"

"두어라. 답을 원하지 않나."

딱ㅡ.

그러라 하기에 하나 더 놓았다.

곧이어 비좁은 방장실 안에는 두 사람이 착수하는 소리만 울렸다.

흑과 백이 하나씩 놓여갈 때마다 기보는 흡사 지도와 같이 변한다. 그러길 한참. 어느새 각 세력의 위치를 상세히 나타낸 세력도가 완성되어 있었다.

각 대문파의 위치에 하나씩 놓여진 흑색의 돌. 그리고 남경과 신강, 서장 등의 새외무림에 하나씩 놓인 흰색의 돌.

마지막으로 화북과 화중에 마구잡이로 놓인 흰색들.

'중원을 두 세력으로 나눴군.'

검은색이 청 황실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인 반면, 흰색 돌들은 모두 적대 관계.

분명 신교의 징벌전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것이라. 고민이 필요했다.

공통점은 황실에 반역한 세력들.

무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찾을수 있었다.

'난(亂).'

염군(捻軍)의 난.

그리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깨달은 모양이야."

열강과의 두 번째 전쟁과 더불어 감옥 안까지 소식이 들려올 정도로 커다란 사건들이었다. 눈치채지 못할 리가.

"……이미 두 번의 난을 겪은 황제에게 신교는 골칫덩이에 불과했군. 황군은 미리 싹을 밟아두려 했어. 그게 무리해서 징벌전을 연 이유야."

"정확하네."

"그럼 한가지 더."

"뭔가."

무진이 기세를 가다듬고는 지광을 노려보았다.

"정파는 어째서 신교의 징벌전에 참전했지?"

딱ㅡ.

소리가 난 직후 좌상귀에는, 검은색 바둑돌 한 개가 더 놓여 있었다.

무진이 착수한 돌이었다.

"맨입으로 알려줄 순 없지. 이기면 알려주도록 하겠네."

"아까 말한 부탁이 그거였나?"

"아니... 늙은이의 여흥이야."

무진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래. 한판 두지."

* * *

"승자는 종남의 유백홍!"

상석(床石) 위에서 희비가 교차한다. 주변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유월은 비무대 위의 모습을 눈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무인으로썬 귀한 장면일 것이다. 타 문파의 신공을 눈에 담는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러나 허유는 아까부터 자꾸만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유인 즉슨, 단주인 무진이 홀로 방장을 만나러 본전 앞마당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백도총회 기간 동안은 소림의 출입 제한 구역이 제법 널널하게 풀어진다지만, 팔대호원(八大護院)과 방장실이 있는 곳은 언제나 예외였다.

강호 무림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 거하는 곳이니 더욱 그러했다.

'아유… 거 참 미치겠네….'

그런데 아까부터 온 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무승들이 자꾸만 팔대호원쪽으로 빠져나가는게 아니겠는가.

본래 비무란 언제든 부상이 발생할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를 대비해 본전의 앞마당 이곳저곳에 호법을 서던 무승들이 있었을 터인데.

허유는 고개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갔구만.'

사방 그 어디를 둘러봐도 무승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허유는 무진이 향했던 방향으로 달려가는 무승 한 명의 그림자를 목격했다.

"저곳은… 단주님이 가셨던 곳인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부하느라 시간이 밀려서 겨우 한 편 썼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현생 공부와 별개로 바둑에는 문외한인지라, 다섯시간동안 영상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눈 빠지는 줄 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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