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양두구육 羊頭狗肉
이른 아침, 무진과 일행을 태운 상단의 마차는 숭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근처에는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등봉현(登封縣)이었다.
새벽녘, 얇은 천막처럼 따사로운 햇살을 걸러주는 숭산의 운무가 아름답다.
괜히 중원 오악이라 불리는 절경이 아니었다. 절경이 그 자체로 영험함을 띄었다.
가만히 숭산 위를 바라보던 유월이 말했다.
"지금쯤이면 소림은 아침 예불을 지내고 있을텐데…. 너무 일찍 와버렸어요."
"아니, 그럼 여기서 죽치고 있어야 한다는거 아닙니까요…. 얼마나 더 걸립니까요?"
"아마 한 시진 정도만 있으면 끝날 거에요. 어디 연 객잔이 있으면 조찬(朝餐)이라도 먹을까요?"
그러고는 저들끼리 조찬으로 뭘 먹을지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나는 생각 없습니다. 이왕 온 김에 주변이나 한 바퀴 둘러보고 와야겠소."
유월과 허유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무진은 대충 코트를 걸치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숭산이 걸친 안갯자락의 풍취를 음미하며 등봉현의 거리를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소림의 정기와 문화를 이어받은 탓일까. 아침부터 거리는 조금씩 활기를 띄고 있었다.
모랫바닥에 보따리를 펴는 사람, 가볍게 산보를 걷는 사람 등등.
참으로 각양각색이었다.
저벅, 저벅…….
등봉현은 오로지 일문의 경제에 기대어 세워진 마을이다.
소림승이 먹는 밥. 소림승이 입는 의복과 각종 무구. 그리고 그걸 관람하러 오는 관광객까지. 하남 일대의 자금 흐름은 숭산으로 흘러간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흐름에 극단적으로 기대어 세워진 마을이 바로 등봉현.
여기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소림의 무술을 흉내내며 자란다. 거기서 재능이 조금 있다면 소림에 입적을 노려볼 수도 있고.
설령 입적하지 못한다 한들, 평생을 등봉현에서 살며 소림을 우러러본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장사가 무엇일까.
"소림의 무학이 은전 여섯 냥ㅡ! 백보신권(百步神拳)ㅡ! 철포삼(鐵布衫)ㅡ! 역근경(易筋經)ㅡ!!"
난데없이 들려온 장사치의 호객이 무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짧은 고민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다.
새벽.
산에 걸치는 햇살과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은 사람의 의욕을 고취시킨다. 아침은 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오는법.
'뭘 팔아먹기엔 최적의 시간이로군.'
소림은 머리를 썼다.
자신들이 가지지 못했던 것들. 어릴적에나 떠올렸을 법한 동심으로 범벅된 꿈을 팔아 치우는 것을 장사 수단으로 삼기로 했다.
전설로 남아 구전으로 세상을 주유하는 신공이 단돈 여섯 냥.
민초들에게도 모아놨던 적금을 깨면 그다지 머다란 꿈은 아니었다.
게다가 소림 칠십이절예(少林七十二絶藝) 중에서도 하나같이 익히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절학들이 아닌가.
지난 수 세기동안 익혀낸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알맹이만 조금 빼서 풀어버린다면 문제될 것도 없겠고.
일문의 진짜 저력이 될 단단한 뿌리같은 기초 무공들은 유출을 대비해 철저히 관리하니, 아무도 익히지 못하는 신공 따위야 이렇게라도 팔아 치우는게 이득이었겠지.
물론 선대가 쌓아올린 무에 대한 존중을 내다 버렸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사치가 따로 없군, 지광(智光).'
무진은 그 후로도 등봉현의 거리를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최대한 많은 이들의 생활상을 눈에 담았다.
나라가 왜놈들에게 패망한 후 경제가 기울었다 하였지. 그 탓인지 민초들의 눈에 수심이 깃든 광경이 역력했다.
소림의 처마 밑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그럴진대, 다른 곳은 얼마나 더 심할까.
자신의 은원과는 별개로, 장차 의화단은 저들을 위해 활동해야 하리라. 무진은 그리 마음먹었다.
'음……'
시간 사이에 상념 따위를 흘리던 무진이 문뜩 걸음을 멈춘 곳은, 인적 드문 공터였다.
그 사이에서 무성의하게 바닥을 구르는 낡은 서책 한 권. 그 옆에선 앳된 소년이 필사적으로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전신 근육의 힘을 제법 담아내는 듯한 움직임. 대충 보기에도 재능이 있어 보였다.
허나 그뿐.
이미 잘못된 무공으로 경지를 쌓았다.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 무재가 심히 안타까웠다.
'돈에 눈 먼 땡중들이 사람 여럿 망치는군.'
둘러보니 등봉현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혹시 내가, 혹은 내 자식이 무술에 재능이 있다면.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 무공 비서를 구매한다. 모아뒀던 자금을 털어서.
문파가 비급을 고스란히 팔 리가 있겠는가.
소림은 등봉현의 믿음을 배반했다.
"쯧……"
걷다 보니 안개가 걷혔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게다가 더 이상 볼 것도 없었고.
언젠가 자신의 옆에 투옥되었던 파계승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소림? 불승은 무슨, 이미 다 썩어 문들어진 나무요.
무진은 돌아가는 동안 한참이고 그 말을 곱씹었다.
* * *
"아미타불. 방문을 환영합니다. 혹 사문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곤륜의 제자 천유월입니다."
"곤륜…곤륜… 천…유월. 아, 명단에 있군요. 뒤에 두 분은 동행인이십니까?"
"맞아요."
"음. 확인됐습니다. 여기 이 통행증을 가지고 다니시면 됩니다."
끼이이익ㅡ.
불승이 산문(山門, 소림의 대문)을 열어젖혔다. 유월이 가장 먼저 걸음을 내밀었고, 무진과 허유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낭창하게 휘어진 버드나무 잎새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다음은 푸른 꽃잎을 피우려 하는 수국화와, 돌을 깎아 만든 불상등이었다.
거진 백년 전, 신교의 팔대 교주가 정마대전을 일으켜 소림의 문턱을 밟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 직후가 무진인 셈이다.
"대단하군."
"뭔가 압도되는 듯한 기분입니다요."
천년 가까이 이어져온 불문의 기가 서린 탓일까.
확실히 부드럽게만 보이는 자연과 그 가공물들이 이리저리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감이 있었다.
앞서 나아가던 유월이 무진을 향해 말을 던졌다.
"알고 계시는진 모르겠지만, 먼저 대웅보전(大雄寶殿)에 가야 해요. 그 뒤로도 할 일이 많구요."
"소림의 객은 모두 한번씩 거쳐가야 한다고 하던가. 알고 있습니다."
무진은 대웅보전에 들어가 예를 올렸다.
평소 같았으면 가슴 깊이 감복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겠지만, 지금은 백도총회가 열리는 기간.
같은 정파의 지붕 아래서 살아간다고는 하나 불문과 도문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 정파의 거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무당이 특히 그랬다.
때문에 무량수불의 상을 앞에 두고 허레허식이 오간다. 명문 정파라더니 꼴이 우스웠다.
"슬슬 가죠."
유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무진과 허유가 뒤따랐다.
그 뒤로도 유월을 따라 정파의 여러 후기지수들의 면식을 익히고. 간간히 체면을 위시한 비무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무진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행적이 노출돼서는 골치아파질 뿐. 시선이 분산될 시기를 노려야 했다.
"대협. 이제 곧 친선 비무회가 열리는데, 혹시 보러가실 생각 없나요?"
"비무회라…."
이참에 강호 후기지수들의 무공을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비무회라 하면 본래 이목이 크게 쏠리는 행사다.
때마침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법.
"그럽시다."
"그러면 본전 앞에 있는 상석(床石)으로 가요. 비무는 그 돌 위에서 일대일로 치뤄져요."
"이참에 좋은 구경 하겠구만요."
무진은 슬며시 뒤로 빠져서 허유에게 말을 전했다.
"나는 비무가 시작되면 잠깐 좀 다녀오마."
"…만나러 가시는겁니까?"
"그래.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아."
다시 앞을 보고서 유월의 뒤를 따라가기를 한참. 소림은 산의 정상과 중턱에 걸쳐 지어졌음에도 그 크기가 무척이나 넓었다.
새삼 그 크기가 실감되는 순간.
마침내 무진은 소림의 본전(本殿)의 앞에 당도했다. 몇 층이고 올려진 붉은칠 목재와, 그 위로 장식된 검은색 기와의 모습이 마치 승천하는 용의 머리와 같았다.
건물 하나하나에서 그 저력이 느껴질 정도.
실로 중원의 태산북두라는 말이 맞았다.
"저 앞에 있는게 상석인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보이질 않네요."
저 모두가 중원에서 나름 날고 긴다는 무인들이었다. 한 세대에서 거르고 거른 옥석들. 쇠퇴해 가는 무림인데도 그랬다.
전성기에는 그 위세가 얼마나 강성했을까.
"비무를 시작하오ㅡ!!"
마침 시기가 맞아떨어졌는지, 곧바로 첫 번째 비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개시를 알리는 심판의 수도(手刀)가 허공을 가름과 동시에, 두 청년이 서로를 향해 내달린다.
자신만만하게 펼쳐전 검이 허공을 가르고, 머리칼 몇 올이 비산했다. 날이 날카롭게 선 진검. 반면에 상대는 두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
후욱ㅡ!
주먹이 뻗어졌다. 쉴 새 없이 펼쳐지는 검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검수의 턱에 꽂혔다.
붉은 매화가 그려진 도복이 하늘을 날았다.
털썩.
화산의 매화검을 파훼하는 훌륭한 일초. 두 사람 모두 연배에 비하면 무공의 완성도가 높았다. 지켜보는 유월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완전히 비무에 빠져든 모습.
경공법을 운용한 무진은 쏟아지는 함성 사이에 걸음소리를 묻으며 슬며시 뒤로 빠졌다. 본전 앞마당의 바깥으로 향해, 담장 지붕과 전각을 타넘으며 이동했다.
비록 무진이 소림에 발을 딛는것이 처음이라지만, 어찌 길을 잃겠는가.
우우우웅ㅡ.
멀리서 느껴지는 기가 이렇게도 선명하건만.
'나를 부르고 있군.'
솨아아….
산맥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바람소리가 시끄러웠다. 오랜 악연을 만나러 가는 탓일까. 차라리 제 마음을 저 소음 속에 파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진은 순간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고개를 내젓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작은 생각에서조차 도망쳐서는 안되는 법이다. 지름길만을 찾는 인생은 언젠가 지나온 길처럼 꼬이기 마련이니.
'다만, 내가 놈의 앞에 서서 이성을 유지할수 있을지가 문제군.'
무진이 당도한 곳은 사방으로 전각이 세워진 한 동굴의 입구였다. 저 전각들은 아마도 팔대호원(八大護院)이리라.
입구의 맞은편 정면에 있는 전각은 아마도 감원(監院)이겠지.
그렇다면 저 좁은 동혈이 방장실(方丈室)이라는 소리다.
도저히 사람이 살 거라고 믿어지지 않는 비좁은 동굴. 성인 한 명이 겨우 몸을 뉠 수 있는 가로세로 한 장의 너비 안에 그는 있었다.
녹옥불장(綠玉佛杖)을 쥔 채로 마치 수련이라도 하듯 두 눈을 감고, 고작 한 치정도 떨어진 벽을 마주하면서.
'지광(智光).'
그가 바로 태산북두의 꼭대기이자, 소림의 방장.
끝내 열리지 않을것만 같던 노승의 말라 비틀어진 입술에서 힘에 겨운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그래. 이십년 만이지."
무진이 노승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