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천마출옥 天魔出獄
열차의 맞은편 지평선 너머로 울긋불긋한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피어나는 엷은 광선은 아침을 몰고 달려온다.
황야의 새벽이다.
달리는 기차의 철 바퀴 마찰 소리가 철새들의 울음소리와 섞여드는 시간. 중원의 바다 빛 하늘이 시리게 빛났다.
마치 겨우내 맺힌 얼음장을 보는 듯하여 피부에 오한이 밀려왔다. 아직은 북방의 한기가 몰려들 시기였으니 당연했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이라 해봐야 별거 없다. 기껏해야 두꺼운 털옷 대신 멋들어진 코트를 걸칠 수 있다는 것뿐.
남들 다 춥다고 벌벌 떨 날씨면 이쪽도 똑같이 추웠다. 애먼 경지였다.
후우….
무진은 바람 사이로 흩어지는 연기를 멍하니 감상했다. 연초를 태우다 보니 생각보다 맛이 좋아서 줄줄이 피웠다.
매캐하고 뻑뻑한 연기가 뭐가 좋다고 그리 피우는지 도통 몰랐는데, 인제 보니 추억의 씁쓸함을 삼켰다 뱉는 것이리라.
"…벌써 다 탔군."
허공에 연초 끝을 튕기니 재가 하늘로 나풀거렸다. 후우웅…… 살갗에 스미는 바람결이 시리다.
어느새 얼굴을 비춘 해가 눈살을 간지럽혔다. 허유가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으니 들어가야겠지. 무진은 그리 생각하며 객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언제 일어났는지, 무진이 들어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유월이 보였다.
"…"
"일어났군."
"…어…어……."
놀란 탓인지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 어제의 당차고 용맹한 협객의 풍모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무진이 조금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말을 건넸다.
"몸은 좀 어떻소. 기절한 걸 보니 내력에 충격이 있었을 텐데."
"…조금 괜찮아졌습니다."
"다행이군. 잠시 얘기를 나누고자 하…."
드르렁ㅡ.
대화를 끊고 들어오는 허유의 코골이 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잠시 나가지요. 걸을 수 있겠소?"
"그럼요…읏!"
그녀가 일어서다 말고 발목을 부여잡으며 주저앉는다. 자세히 보니 복사뼈 주변이 불그스름했는데 심하게 부어 있는 모양새였다.
족히 몇 주는 정양해야 할 부상이었다. 평야에서 객기를 부린 대가가 컸다.
"부축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무진은 어물쩍거리는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부턴 평야에서 마적을 상대할 생각일랑 관두시오. 차라리 열차 안까지 들어왔을 때 처리하는 것이 현명했을 겁니다."
"나서지 않았다면 민초들에게 피해가 갔을 겁니다."
"차라리 그편이 낫습니다. 만약 내가 그들을 막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잠깐의 침묵.
하고픈 말이 정리되지 않는 걸까. 그녀는 무어라 말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조물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말을 삼켰다.
한참의 정적이 지난 후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부 죽었겠군요."
동시에 무진도 한참을 고민했다. 이 말을 꺼내도 될까. 나름의 의기를 가지고 있을 협객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목숨보다 중하진 않으니, 할 말은 해야 했다.
"이젠 제 목숨 하나 보전하기도 어려운 시대요. 일이 항상 이번과 같이 풀릴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협행은 관두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백날 남의 목숨 살려봤자 제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그럼…"
드르렁ㅡ.
허유가 또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후우…"
기껏 잡아놓았던 분위기가 자꾸만 깨지고 있다. 이러면 말을 꺼내기 곤란해지는데.
무진은 유월의 팔을 둘러매 부축하며 옆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수심이 짙어 보였다. 정파 문도라 그런진 몰라도 그녀가 의협이란 것에 막연한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다.
그러나 꿈에서 깨지 못하면 죽을 뿐이다.
날붙이로 갈고닦은 공부는 더이상 자신의 생명을 보증하지 않으므로.
'손가락질 한 번이면 족하지.'
무진이 자신의 검지를 꿈틀거리다, 이내 상념을 흩어버리며 객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유월을 부축해 창문가 옆에 있는 적당한 빈자리를 골라 앉았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는 경치가 부산스럽다. 초목이 우거진 산이며 들이 나오는 탓이었다.
그것은 기나긴 황야를 뒤로한 채, 산서의 초입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기차로 만 하루.
중원의 끝과 끝을 오가는 시간이었다.
"소저는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저는 하남으로 가요. 소림에 볼 일이 있거든요."
"그러면 태원(太原)에서 곧장 내려가시겠군요.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와 같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동행이요? 은인께서도 소림으로 가나요?"
"소림에 꼭 만나봐야 할 분이 계신데, 이번이 아니면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 백도총회가 열린다고 하여……"
무진이 말끝을 조금 흐렸다. 그러자 그녀가 반색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보증해 드릴게요. 동행인 자격이면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무진이 일어나 고개를 숙이려 하자 유월이 만류하며 말했다.
"그러지 마세요. 대협께선 제 구명의 은인이십니다.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으니, 나중에 곤륜을 방문하시면 크게 사례하겠습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시기에…"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남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분이 아니시라서."
"그렇군요... 알겠어요."
오히려 자신이 앞장서 그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꺼려야 할지도 몰랐다.
팔대호원(八大護院)으로 주변을 꽁꽁 에워싸고도 모자라, 사방 한 장 정도 되는 방 안에만 틀어박힌 이였으니.
무진이 보기에 그는, 망해가는 무림 꼭대기에 우두커니 앉아서 이 배는 언제 침몰할까 관망하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니 폐인이 따로 없군.'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내다본다는 소림의 방장(方丈)을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이는 무진이 유일할 터였다.
누군가 무진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기함을 지를법한 이야기.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러한걸.
"그런데 대협. 어제는 왜…"
유월이 무언가 운을 떼려던 찰나, 허유가 객실의 문을 열며 나타났다. 분명 곤란한 질문이 던져졌을 터.
이번엔 등장하는 시기가 꽤나 적절했다.
"일어났더니 다들 안 보여서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구만들."
"일어났나."
"아니, 들어오시는 건 보고 눈붙이려 했는데 대체 밖에서 얼마나 있으셨던 겁니까."
"해가 뜨는 것까지는 보고 왔지."
"밤을 새우셨다는 소리구먼요."
무진이 허유와 말을 주고받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허울뿐인 성곽 아래로 이 층짜리 석제 건물이 즐비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활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무진은 그 광경이 새삼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와는 다른 별세계라고 느꼈다.
승무원이 열차 통로 사이를 바삐 뛰어다니며 외쳤다.
"곧 태원(太原) 역에 도착하오ㅡ! 채비를 단단히 하시오ㅡ!"
짐이랄 것도 없었다. 무진이 코트 자락과 옷 앞섬을 매만지며 일어났다.
"도착한 모양이군. 일단 나가지."
* * *
산서의 중앙에 있는 대도시답게 태원의 거리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특히 번화가로 나갈수록 더욱 그랬는데,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인파를 뚫고 나가다 일행과 떨어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정도였다.
게다가 기다란 서양식 코트에 이발까지 한 무진의 외향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어서,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온 탓에 번잡함이 더해졌다.
"빨리 마차를 찾아야 하는데 말입죠."
"아마 외각에 나가야 찾아볼 수 있을 거다."
또 한참을 걸은 끝에야 물밀듯 밀려오던 인파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고, 길 주변의 건물들이 점점 허름한 모습으로 변하고 나서야 그들은 숨통을 틀 수 있었다.
태원의 외각이었다.
하남의 숭산으로 향하는 길목. 그 앞에 상행이라도 다니는지 여러 대의 마차가 짐을 싣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무진은 그 앞으로 다가가 상단주로 보이는 이에게 물었다.
"혹시 상단주 되십니까?"
"예."
"이 행렬이 숭산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까?"
"그렇소만."
"급하게 일이 생겨서 그런데, 혹시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상단주가 무진과 일행을 잠시 흘겨보더니, 유월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에 시선을 던졌다. 언짢은 표정이었다.
"…혹시 무인이요?"
"그렇습니다."
"열 푼만 주시오. 맨 뒤 마차에 올라타시면 될 거요."
무진이 철전을 건네고 돌아서자, 상단주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은 산적도 드문데, 쯧…." 확실히 산서와 하남은 북경 근처이기도 하니 산적이 없을 법했다.
결국, 칼 휘두르는 깡패 몇 놈이 무인이랍시고 따라붙은 게 아닌가. 상단주의 입장에선 실로 그랬다.
무인이라 설치는 이들 중에 수틀리고 자존심 상하면 사람부터 죽이고 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받아줄 수밖에.
무진이 유월과 허유를 향해 말했다.
"맨 뒤 마차."
"잘 풀렸나 보군요. 다행이에요."
"그래도 조금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구먼요."
"…그러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행이 숭산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하였듯 산적은 진작에 쓸려나가 없었고, 종일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만이 요란하게 반복되었다.
마차 안에서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는 것이 대부분.
힘을 쓰는 건 가끔 구덩이에 빠진 마차를 꺼내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였다.
그러기를 꼬박 며칠.
마침내 무진은 중원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이라 불리는 숭산의 초입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