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천마출옥 天魔出獄
난데없이 한 기척이 그녀의 옆을 스쳤다.
분명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어야 할 칼이, 어느 순간 남자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
"칼 좀 빌려 가마."
투우우웅ㅡ!
무진이 검면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리자 검이 공명음을 흘리며 진동했다. 그 모습이 심히 예사롭지 않았다.
동시에 달려들고 있던 마적 하나가 창을 크게 휘둘렀다.
크가가각!
검날이 휘둘러진 창날과 마찰했다. 거센 불똥이 튀어 별무리 사이로 녹아든다.
무진의 가슴팍으로 날아든 창이 어느새 검과 함께 흐르더니, 순식간에 등 뒤를 넘어가고 있었다. 완벽한 흘리기.
직후 무진의 팔이 휘둘러졌다. 가볍게 팔을 털어내는 모양새. 쾌검결의 검초가 말의 넓적한 허벅지를 스치듯 베고 지나갔다.
스걱!
마적 하나가 넘어진 제 말과 함께 뒹굴었다. 말에 머리부터 깔렸으니 모가지가 무사하지는 못할 터.
말은 절뚝거리며 황야 너머로 달아나고, 기괴하게 목이 비틀린 시체 하나만 남아 거품을 물었다. 즉사였다.
무진이 제 손에 들린 칼을 보며 중얼거렸다.
"좋은 칼이군."
철웅은 계집의 칼을 뺏어 들고 앞에 선 놈을 보았다.
외모는 곱상한 게 기생오라비같이 생겨서는.
놈의 손에 들린 칼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느낌이 범상치 않다.
"아주 쌍으로 협객 나셨구먼. 객차 안에서 눈이라도 맞았나? 응? 대답해 봐."
니미.
생긴 것처럼 싸가지도 없어서는. 어른이 말하는데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철웅이 제멋대로 지껄였다.
분명 감정을 흔들어 보고자 하였는데 무진의 입꼬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대신 검을 다르게 고쳐 쥐었을 뿐.
"제법 한 수가 있어 보이는데…… 어디 좀 배워먹은 부잣집 도련님인가?"
"그런 거 같습니다, 형님."
"어디 보자……계집은 이미 못 움직이고. 저 새끼, 사지 근맥만 잘라서 데려와라. 분명 비쌀 거야."
수하들은 대답 대신, 혀로 입가를 훑는 비릿한 소리만을 내었다. 직후 가볍게 고삐를 쥐는 손놀림이 있었다.
이랴아ㅡ!!
힘찬 기합과 함께 고삐가 당겨지고.
끼히히히힝!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진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난다.
보잘것없는 흑도 들의 무예. 투로를 파악하기는 식은 죽 떠먹기보다 쉬웠다.
'왼쪽 허벅지. 오른 종아리. 그리고 어깨.'
말의 속도와 함께라면, 별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한들 내력을 가득 담아 휘두른 일 초와 비슷한 힘을 낸다.
거기에 무공까지 익혔다면, 그 어떤 강호의 노고수가 와도 위력만큼은 감히 비할 바가 되지 못하리라.
결국 피한다면 그만인 얘기였다.
히히히힝!
마적 하나가 무진의 오른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창이 휘어진 초승달의 형태를 그리며 휘둘러졌다. 날 끝에서 불어온 바람을 따라 덧씌워진 금빛 모래가 농민의 추수를 보는 듯하다.
쐐애액ㅡ!
아래서 위로, 좌하단을 노리고 쏘아진 신월참(新月斬). 분명 그대로 힘을 실어 두 다리를 모두 베어낼 요량이었다.
무진이 마치 산보를 뛰듯, 사뿐히 뛰어올라 창대 위를 즈려밟지만 않았더라면.
손목에 실린 무게가 가볍다.
창대 위에서 곡예를 피우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사내의 모습은, 그가 초상비(草上飛)의 경지에 올랐음을 뜻했다.
"어어……"
칼날이 빛난다. 미처 놀랄 새도 없이 마적 놈의 머리통 하나가 하늘을 날았다. 스걱…………
직후 숨 돌릴 새도 없이 이어져 오는 연격. 곧바로 따라붙은 마적 두 놈이 단창을 꼬나쥔 두 팔을 맹렬하게 휘저었다. 노리는 곳은 머리와 가슴.
앞선 놈의 죽음을 보고 생포를 포기한 탓인지는 몰라도, 급하게 초식을 뒤튼 탓에 불안정해진 투로가 눈에 띄었다. 악수(惡手)였다.
무진이 주저앉듯 무릎을 굽혔다.
부우웅!
머리맡을 스치는 창날.
공기를 가르는 둔탁한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소리가 멀어진 직후 무진의 무릎이 펴지며, 몸뚱이가 한계까지 억눌렀던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무진의 어깨가 기마병의 눈높이까지 치솟은 직후.
피잉ㅡ!
사진기의 플래시처럼 반짝이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미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쾌검결이 뒤따라 창을 휘두르려던 다른 마적의 목까지 일 합에 날려버렸다.
목이 달아난 시체들이 말 위에서 위태로이 흔들린다.
팔이 휘둘려졌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저 쪼개어진 달빛만이 뇌리에 각인되어, 날붙이가 나아가던 순간이 있었음을 반증할 뿐.
"개씨발……재수 옴 붙었군."
철웅이 입으로 쌍욕을 내뱉으며 황급히 기수를 돌렸다. 여기서 저런 고수가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칼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의 검이 아닌데도 그랬다. 본신의 무력을 가늠할 수 없다는 뜻. 철웅이 다급한 마음에 말을 재촉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선회가 느렸다. 한시가 바쁘건만.
"빨리 좀 쳐 가라 이놈아!"
파바박!
철웅이 소리침과 동시에 수풀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수풀? 여긴 사막이었다. 자세히 들으니 모래가 흩날리는 소리다. 아뿔싸.
"니미……"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무진이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웬 모래 구덩이 하나만 덩그러니 패여 있었다.
순간 등골을 죄여오는 소름.
'어디냐!'
어둠 사이로 숨은 놈의 코트 자락이 보이지 않았다. 철웅의 동공이 다급히 굴러간다. 오늘만큼 안법의 성취가 아쉬운 날이 또 있었을까.
'어디야!'
순간, 오른쪽 아래서 섬광이 일었다.
철웅이 기척을 쫓아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달빛이 그의 눈앞에 성큼 다가와 목을 가르고 있었다.
살덩이를 가르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렸다.
스걱ㅡ.
데구르르…………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통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감기지 못해 잔뜩 충혈된 눈 사이로 모래가 덕지덕지 묻었다.
무진은 징그러운 모가지를 툭 차서 밀어 버리고는 시체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고자 하는 물건이 없다.
계속 이상한 잡기들만 집혀 나오는데, 대부분 잘 묶인 말총이나 검은색 갑(匣) 따위들이었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무진의 손이 겉옷의 앞섬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종이 하나를 집고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마침내 원하던 물건이었다.
'그냥 창만 든다고 마적 질을 할 수는 없지.'
일개 마적 놈들이 열차를 노략질하려면 반드시 뒷배가 있어야 했다.
더 큰 마적단이던, 약탈한 물건을 대신 처리해주는 상인이건 간에. 불문율이었다.
무진은 시체의 품에서 나온 종이를 펼쳐보았고,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쯧…… 썩을 대로 썩었군."
무진이 다시 일어서 칼을 챙기자 그제야 허유가 멀리서 뛰어오기 시작했다. 천유월을 바닥에 눕혀놓고 온 듯한데, 진작에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상처는 없어도 어깨 인대가 죄다 나갔을 텐데 통증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닐 테니 그러려니 했다.
허유가 무진의 행색을 보고는 말을 던졌다.
"어이쿠,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시구만요."
"무엄하다. 본좌가 고작 저런 놈들 상대로 다칠 경지는 아니다."
"아무렴요. 다시 천마라고 불러 드릴깝쇼?"
"됐다. 농이다."
"그런데 그건 뭣입니까?"
허유가 무진의 손에 들린 갑(匣)을 보고는 물었다. 그것을 열자 기다랗고 통통한 연초가 몇 개비 들어 있었다.
"연초로군."
"이거 고급품이네요. 이러면 처리하기도 뭣하고…… 차라리 단주님이 피워 보시는 게 어떨련지요?"
"옥에 있을때 아편 피우고 들어온 병신을 얼마나 봤는데. 차라리 모래 속에 묻어 버리는 게 낫겠구나."
"이건 시가라고 완전히 다른 물건입니다요. 부작용은 아편의 발톱 때만큼도 못 미칩니다. 관료들도 가끔 즐긴다는 사치품이지요."
"흠……"
무진은 잠시 고민하다, 시가를 품에 넣어 갈무리했다. 열차는 아직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한참을 멈춰선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군. 자세히 보니 기관사가 죽어 어쩔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행이 열차를 운행할 정도의 승무원은 남아 있는 모양.
"들어가자."
무진은 죽은 마적 놈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승무원 셋이 죽었다. 마적 놈들의 창날에 의해서다. 돌팔이 의사가 개복한 듯 창날에 꿰뚫려 삐뚤삐뚤하게 열린 흉부가 심히 안쓰러웠다.
열차의 짐칸에 세 구의 화물이 추가되었다. 하얀 면포를 덮은 시신이었다.
무진은 새삼 생명의 무가치함을 실감했다. 그들은 아침에 본 햇살이 생전 마지막 여명임을 알았을까.
자신이 목을 친 이들도 마침 셋이니 넋두리로는 충분하리라.
"일등석은 의자도 참 푹신하구만요……"
"그 대가가 비싸다."
"아무렴요. 문주님이 사람 여럿 살리고 받은 자리 아닙니까."
허유가 한숨을 푸욱 쉬고는 말했다.
"근데도 어떻게 사람을 쫓아내듯이 보낼 수가 있는지 참. 말로만 일등석이니 뭐니…… 양심에 털난 것들이 따로 없습니다요 정말."
허유는 그리 말하면서 제 뒤에 있는 벽을 쾅쾅 쳤다.
"냅둬라. 그들에겐 똑같은 살인이었겠지. 귀하게 자란 이들이다. 강호의 풍파를 몰라."
'굳이 알 이유도 없고.'
"……이젠 무림의 위세도 다 끝물이구만요."
무림은 이제 저무는 해다. 민초(民草)들이 구태여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요즘은 멀쩡한 무림인도 공사장의 인부로 빠지거나 홍콩 쪽의 조직으로 의탁하는 편이랬다.
무림인이야 힘이 좋으니 어디서든 몸값이 제법 나갔다. 죽을 위험을 감수하며 강호에서 버티는 것보다는 낫다는 소리.
"말 그대로 끝날 때가 됐지. 소림의 무학을 창안한 달마가 벌써 십 세기도 전의 인물이야."
신교는 무공으로써 악한 기운을 통제하여 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천마는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교주가 곧 교리의 증명인 셈이었다.
그럼 무엇하나. 정작 총칼을 들고 쳐들어온 군대 앞에선 무력했던 것을.
정파 도문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검으로 도를 닦아 선계에 오르길 바랐다. 신선은 고사하고 군병들 손가락질 한 번이면 목숨이 위태로운 시대에서.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무는 어디로 갔는가. 협은 죽었는가. 그렇다면 작금의 무림은 아집에 불과한 것인가.
"무림사(武林史) 천 오백년…… 참 오래도 해먹었어."
세상은 나아가는데 홀로 남아 죽어가는구나.
무진은 그리 뇌까리며 자신의 셔츠에 묻은 핏자국을 만지작거렸다. 핏물 빼려면 고생좀 해야 할텐데.
'죽음이라.'
무진은 제 혈육들의 최후를 떠올렸다. 창살 사이로 툭 던져진 문건에 적혀있던 세 글자가 기억 사이에 낙인처럼 박혀있다.
부고문.
힘없이 나풀거리던 종이는 죽음을 담았음에도 무게가 가벼웠다. 사인을 담은 서체는 지나치리만치 담담했다.
목이 꺾여 죽었단다.
끝이었다.
'그만 생각하자.'
무진은 혀를 쯧쯧 차며, 옆자리에 뉘어 둔 여인을 한번 흘겼다.
유월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집에 선명히 적힌 곤륜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녀도 백도 총회로 가는 걸까.
곤륜이면 구파일방의 한자리에 이름을 올린 문파였으니, 아마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잘하면 해남에 지워둔 빚을 아껴둘 수 있겠어.'
해남파 대신 곤륜 후기지수의 동행인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없을 터.
무진은 생각을 마치고는 허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날이 늦었으니 눈을 붙여라. 아침에 여인이 일어나면 일러 주고."
"단주님은 안 주무십니까요?"
"잠시 바람 좀 쐬다 자련다."
밖으로 나온 무진은 객차 사이의 이음부에 섰다. 나와서 들으니 쇠바퀴가 마찰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품에서 아까 넣어 두었던 연초 하나를 빼내어 입에 물었다. 손가락 끝에서 불씨가 피어올랐다.
고절한 공부가 한낱 라이터로 전락한 모습.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연초의 끝에 불을 붙여놓았다.
후우.......
'생각해 보니 신교에도 가끔 들어오던 물건이었지. 이런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신교에 몸담던 노인이 쓰던 것을 몰래 훔쳐 피워 보려다가 된통 혼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지나간 추억이었다.
열차 바람에 밀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무진은 품에 넣어 두었던 종이를 꺼내어 펴 보았다.
달빛 사이로 비치는 옥새의 인(印)이 선명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교의 교리는 마니교의 교리를 참고하여 만듦.
중국에 전래된 마니교 = 명교 -> 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