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천마출옥 天魔出獄
무진이 앉은 좌석은 일반석이었다. 옆의 수하가 특실을 예약해 보자며 보챘지만, 일반 객실의 모습을 느껴보고자 했던 무진에 의해 묵살되었다.
분명 어떠한 낭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리라.
며칠 동안 이어지는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풍류. 우연히 닿은 인연에 대한 것들이었다.
"기대되는군."
좌석은 푹신했다. 상당히 질 좋은 가죽과 솜털로 마감되어 있었기 때문.
아무리 일반석이라 한들, 평범한 이는 올라 타볼 엄두를 내보지 못한다. 푯값 때문이다. 비싼 돈을 받아 처먹는 만큼의 값은 하였다.
"저는 상당히 자주 타 봤는데, 사실 기차 여행에서 낭만은 그리 찾기가 어렵더랍니다."
"많이 타 봤다고? 그건 조금 부럽구먼."
"……실언했습니다."
"굳이 실언까지야. 내가 옥에서 폐관하는 동안 수고해준 걸 알고 있어."
무진이 제 수하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창문 너머의 풍경이 슬며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받이와 맞닿은 부분에 느껴지는 압력.
새로운 느낌이다. 바닥 면에서 올라오는 떨림이 감정을 대변했다.
한참 동안 그 감미로운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무진의 정면에서 얇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두 분이 다니시는 건가요? 여행?"
어느새 여인 한 명이 맞은편 좌석에 착석해 있었다. 무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부 너머로도 탄력이 느껴져. 무인인가?"
무진의 눈동자가 어느새 그녀의 팔을 향한다. 탁자 위로 깍지 쥐고 있는 손에서 오랫동안 검을 쥔듯한 굳은살이 보였다.
검객.
그것도 나이에 비해 상당한 공력을 쌓았다. 집중하고 보니 전신 혈도에서 맥동하는 진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우연히 합석하게 됐네요. 천유월이라고 해요. 며칠 동안 마주 봐야 할 텐데, 잘 지내봐요."
무진이 뭐라 입을 떼려던 찰나, 옆에 있던 수하가 먼저 반응했다.
"아, 예. 물론입죠! 저는 허유(許柔)라고 합니다! 잘 지냅시다. 허허허……"
허유의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 너머로 여인의 신형이 비추어 보인다. 그 너머로 속내가 훤히 보였다.
……무진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무진(無進)이요."
"이쪽 분은 조금 무뚝뚝하시네요. 그래도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소."
첫인사 이후로 대화는 물꼬를 튼 듯 순조롭게 흘러갔다.
주로 수하인 허유와 맞은편의 천유월 사이에서 오갔는데, 무진은 창밖의 풍경을 더욱 즐겨 주도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그러던 와중, 천유월이 무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두 분도 무림인이신가요? 이쪽 사정에 좀 밝으신 거로 보이는데……"
천유월은 그러며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검 코등이 위로 조그맣게 난 곤륜의 글자가 선명하다.
딱히 관련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무진은 대충 말을 끊기 위해 둘러댔다.
"……아버지가 무림인이셨소. 그 이상의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가요? 혹시 부친분의 별호가……"
"이젠 없소."
단칼에 자르듯 내뱉어진 어투.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봤네요."
별호가 사라졌음은 그 무인의 행적이 끊겼음을 방증한다. 무림인이 무림에서 사라지는 경우는 단 두 가지다.
금분세수(金盆洗手) 하였거나, 죽었거나.
보통은 죽는 편이었다.
무림의 은원은 깊다. 때로는 쇠사슬보다도 깊고 단단하게 얽혀있기도 한다.
곱게 가지 못하였음을 뜻했다.
"……괜찮소. 오래전 일이니."
"그래도……"
무진은 그녀가 뭐라 말하려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애초에 이미 풍화된 지 오래인 기억이었다. 마음이 조금 싱숭거리는 것으로 그칠 터. 무진은 겉으로 보이는 연배에 비해 꽤 오랜 삶을 살아왔다.
전설상으로만 전해지던 반로환동의 경지는 아니었다. 애당초 무림인은 늦게 늙는다. 죽음이 오래도록 유보된다는 뜻.
무진은 유보된 죽음을 하나의 안식처쯤으로 생각했다.
떠나간 자들은 그곳에서 편히 쉬고 있기를 바랐다. 언젠가 자신 또한 그리될 것을 소망하면서.
'아버지. 그곳에선 평안하시오?'
질주하는 기차의 뭉개진 절경 사이로 무진은 닿지 못할 물음을 던졌다.
그 옆에서 허유와 천유월의 대화는 느긋하고 길게 이어졌다. 주로 최근 무림에서 일어난 기사(奇事)에 관한 것이었다.
여자에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은 안심해도 될 터.
무진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나름 경지가 높은 무인의 명상이었다. 해가 슬그머니 움직여 지평선 너머로 숨어버릴 때까지도 생각은 이어졌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이를 방해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가령, 명백한 적의와 살의로 무장한 기척이라든지. 혹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무언가라든지.
'……돌겠군.'
그리고 무슨 우연인지, 무진의 기감에 그런 기척이 하나둘씩 잡혀 들기 시작했다.
우선 눈앞의 여자는 아니다. 열차 안의 사람들 또한 당연히 아니었다. 눈앞의 여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일반인이거나, 삼류 수준의 호위무사에 불과했으니.
승무원이 객실의 문을 열어젖히고는 다가왔다.
"곧 열차가 분기선에 도착하오ㅡ! 멈출 때 잠시 충격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시오ㅡ!"
그와 동시에, 무진은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열차가 점점 감속하는 가운데, 되려 속도를 높이며 따라오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도 꼬랑지에 시커먼 먼지구름을 매달고서.
두두두두두두!
대지를 울리는 발굽 소리가 실로 요란하다.
천유월도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듯, 자리에서 일어나 검집에 손을 올렸다.
"니미……좀 편하게 가나 했더니."
허유가 걸쭉한 욕설 섞인 불평을 내뱉음과 동시에, 열차로 다가오는 놈들의 모습이 육안으로 들어왔다.
마적(馬賊).
열차가 멈추는 때를 틈탄 습격이었다.
* * *
마적(馬賊)은 말 그대로 말을 타고 다니는 도적을 이른다.
첩첩산중이나 물가에 채를 올리고 활동하는 다른 도적들과 달리, 몽고 대평원의 유목민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실제로도 유목민 중에 마적으로 전향한 이들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날 때부터 평원에서 자라고 말과 가족처럼 뒹굴었다.
탁 트인 평원은 제집 안방과 다를 바 없다는 뜻.
대륙의 중앙에 있는 사막은 본래 아무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척박한 땅. 그러나 철도 선이 깔린 이후에는 얘기가 달랐다.
사막 한가운데서 치솟는 검은 구정물도 보물이라며 떠받든다는데, 귀한 짐 덩이들을 이끌고 황야를 달리는 철마들은 얼마나 먹음직스러울까.
때마침 인연이 닿아, 막연한 생각을 현실로 이룰 기회를 받은 이들이 있었다.
지금 말을 몰고서 열차를 향해 돌진하는 두철웅 또한 그러했다.
"열차가 멈춘다! 주변을 둘러싸!"
열차 하나를 털면 나오는 수입으로 부족 하나를 몇 주에서 길면 몇 달을 먹여 살릴 수 있었으니, 눈 질끈 감고서 사람 몇 놈만 담그면 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
이따금 무림인들이 토벌을 나오는 일도 있었지만, 해봐야 중원 한복판에서 칼질이나 하던 놈들이 아닌가.
마상 창술을 받아쳐 보겠다고 뻗대다가 하나둘 곤죽이 되는 동료들을 보고는, 꽁무니 빠지라 도망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간혹 신강(新疆)에서 내려온 이들이 마적 떼를 토벌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 마교는 이미 옛적에 사라진 지 오래.
"조여ㅡ!!"
두다다다다!
여섯의 말들이 일제히 기수를 틀었다. 나무를 오르는 한 마리의 뱀처럼 기다란 열차를 조인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몸통을 틀어쥐려는 의도.
실로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두철웅은 여러 번의 열차 약탈을 진두지휘한 경력이 있다. 그의 창날에 베여나간 무림인만 어느새 십이 넘었다.
기관차의 선두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철웅이 말의 고삐를 한 차례 당겨 쥐었다.
끼힝힝힝!
말이 거칠게 투레질하며 멈춰섰다. 철웅은 제 등에서 각궁을 하나 꺼내어 시위를 먹인다.
끄드드득ㅡ!
철마가 나아가기 위해선 분기선에서 철로의 방향을 바꿔 주어야만 한다. 보통은 기관사나 승무원이 직접 나와 전철기(轉轍器)를 당겨 조종했다.
마적이 다가오면 그것을 더욱 서두르는 편이었다. 재빨리 선로를 바꾸고 속도를 높인다면 쫓아가지 못할 테니까.
보라. 벌써 양복을 걸쳐 입은 샌님 하나가 달리고 있다.
아직 멈춰 서지도 않은 열차에서 뛰어내려 눈앞의 막대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게 마치 늙은 순록처럼 보였다. 활을 쏘는데 대강의 가늠조차 필요 없었다.
피이잉ㅡ!!
늘어지는 화살의 궤적. 그 끝에 달리던 승무원의 다리가 놓여있었다. 허벅지 안쪽에 푹 처박힌 나뭇가지의 감촉이 선명하다.
"끄아아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 샌님의 고통에 호응하듯 객실 안쪽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동맥에 맞은 걸까.
높게 튄 피가 객차의 유리창에도 묻어 있었다.
샌님이 엉금엉금 기었다. 흘러나온 피가 돌바닥을 길게 적신다. 철웅이 활을 집어넣으며 단창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앞쪽에서는 총성이 몇 번 울린다. 그저 다른 승무원들이 쏘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호신용 조총 따위에 당하면 그것대로 병신인 법.
"대장ㅡ!"
앞쪽에서 수하 하나가 소리를 질러댔다. 쳐다보니 손가락 두 개를 접는다.
둘이 죽었다는 뜻.
씨익……
철웅의 면면에 웃음이 피었다. 병신 두 명 몫이 줄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말을 앞으로 몰아 단창을 땅에 박아넣었다. 푸욱…… 흙 대신 거뭇한 피가 튄다.
샌님이 늘어져 죽었다.
"꺄아아악!"
허공을 수놓은 핏물을 본 것인지, 객실 안이 또 한 번 시끄러워졌다. 철웅이 유리창에 단창을 내리치며 외쳤다.
쨍그랑!
"닥쳐 새끼들아ㅡ!!"
내력을 실은 외침. 승객들이 귀를 막고 주저앉는다. 그 사이에 당당히 서 있는 계집이 하나 있었다.
얼굴이 꽤 반반하다. 며칠 가지고 놀기 좋을 정도.
"흐……무인인가?"
"이 흑도 놈들이…… 너희들을 단죄해 무림의 법도를 세우겠다!"
칼을 뽑아 드는 그녀의 검집에 선명하게 각인된 두 글자가 있었다. 곤륜(崑崙). 정파 명문의 제자인 모양이다.
"고년 목소리도 좋군. 밑에 깔려 앙앙거리면 들어줄 만하겠어."
"이익……"
천유월의 얼굴이 단박에 붉어졌다. 모욕적인 언사에 화를 참지 못한 모습.
'초출(初出)이군.'
처음 문파를 떠난 햇병아리들이 보통 저러했다.
철웅은 순식간에 견적을 내었다.
비록 입은 뒷골목의 무뢰배와 같을지라도, 머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파 무림에서 그처럼 오래 살아남진 못했을 터.
"네년, 나와라. 이기면 살려 보내주마. 흐흐……
저급한 도발이 통한 것일까. 누군가 채 말릴 틈도 없이 천유월이 그대로 깨진 창틀을 뛰어넘었다.
부우웅ㅡ! 부웅ㅡ!
철웅의 머리 위로 단창이 불성 사납게 휘둘러졌다. 달빛을 가르며 휘둘러지는 창날이 매섭다.
유월이 검을 고쳐 쥐었다. 다리를 굽혀 중단세로 치켜든 검 뒤에 몸을 숨겼다. 운룡십삼검(雲龍十三劍)의 기수식.
곤륜파의 지파 중 하나인 곤륜검문(崑崙劍門)의 절기로 이름 높은 검법이었다.
"이랴아아!"
철웅이 힘찬 기합성과 함께 힘껏 고삐를 틀어쥐었다. 주먹 부조. 흥분한 말이 앞으로 뛰쳐나가는 속도가 날쌨다.
두두두두두!
발굽이 대지를 울렸다.
그 기세와 속도가 고스란히 날에 삼켜졌다.
늦저녁 어스름을 가르며 날아오는 창날.
후우웅ㅡ!
유월의 검결이 휘어져 곡선을 그렸다. 빗면을 따라 힘을 흘려내려는 의도였다.
허나 실전이 풍부한 흑도의 노련함은 그 수를 단번에 간파했다.
본디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에서의 이야기.
철웅의 거구에서 나오는 용력과 말의 속도까지 합쳐진 창날은, 휘어지던 그녀의 검로를 손쉽게 비틀었다.
카앙!
"끄으……"
유월이 제 오른팔을 매만진다.
막아내긴 했지만, 팔과 어깨에 충격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철웅은 그대로 크게 한 바퀴 돌아 선회하다, 다시 저 멀리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노리는 것은 팔.
사지를 불구로 만들 생각인가.
무진이 생각했다.
'검초에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의 보법을 섞지 못했어. 섞었다면 반드시 흘려냈을 텐데.'
이제 겨우 방년(芳年)을 넘겼을 연배였다. 운룡보를 그리 쉽게 녹여낼 수 있었다면 그녀가 천재였거나, 운룡보가 신공절학이 아니었을 터.
고작 몇 년의 경험이 아쉬웠다.
생사를 가르는 기로란 본래 그런 것이다. 조그만 차이 하나에 희비가 갈리는 법.
무진은 잠시 하품을 하며 고민했다.
주저앉는 그녀의 모습 뒤로 지는 해가 겹쳐 보인다. 어둠이 사막을 삼켰다.
'구해야 하나.'
쓸데없는 허울에 불과한 의협심에 나섰다가 되레 당하는 모양새.
무림에선 저렇게 죽는 것도 결국 운이고 실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말을 타고 있는 놈과 싸우는 것보다는, 놈들이 물건을 털려고 내렸을 때 치는게 더 합리적이었다.
그러다 보면 몇 명 더 죽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제 목숨보다는 낫지 않나. 이해가 가질 않는군.
무진이 제멋대로 생각하는 사이 철웅이 제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쳐라!"
뒤에서 간을 보던 마적 떼가 달려든다. 잘 갈려진 창날이 말과 함께 질주했다. 달빛이 날을 타고 흐른다.
그 광경이 새카만 밤중에 내리치는 섬전과도 같았다.
한계에 달한 유월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매일같이 휘둘러 왔을 검이 천근처럼 무겁다. 끝이구나.
유월이 그리 체념하고 있을 때.
무진의 고민 또한 끝을 맺었다.
"칼 좀 빌려 가마."
난데없이 한 기척이 유월의 옆을 스쳤다.
분명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어야 할 칼이 어느 순간 남자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