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1화 (2/29)

제 1화 천마출옥 天魔出獄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일격에 죽였다. 성능이 대단하더군. 역시 독일제 물건이었어."

"힘들게 구해온 물건입니다."

천마가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권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한다.

"과연, 천하 패도를 논할 만하군.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수십 개나 더 있다는 말 아닌가."

"예. 지난 전쟁 때 호되게 당했었지요. 양놈들이 군함에서 쏴대는 포들은 당대 최고수가 와도 막질 못했답니다. 그런데 이젠 권총만으로 어지간한 무인은 일즉살이 가능하니……"

"그 전쟁도 벌써 이십 년이 가까이 되었단 말이지…… 아직 그리 양산되지 못해서 다행이군. 장총은 개인이나 문파가 가질 수도 없고."

비록 추하게 늙었다고는 하나 전대의 이름있는 고수였던 당가주이다.

이 자그마한 권총 하나에서 그런 고수를 한 번에 보내버릴 정도의 위력이 나온다니. 본래 총이란 것은 상당히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이었을 터.

놀라운 일이다.

더 이상 무림인은 대적불가(對敵不可)의 존재가 아니다. 어린아이라도 손가락 당길 힘만 있다면 능히 고수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런 기물을, 몇 개나 더 구할 수 있겠나."

"지금 쥐고 계신 물건은 올해 막 개발이 끝난 물건인 줄로 압니다. 산동에 들어온 독일 관리가 가지고 있던 것이지요."

"그럼 맞는 탄환도 찾기 힘들겠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흐음……"

그 뒤로도 천마는 한참이나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남은 탄환은 없지만, 대신 손가락에 걸쳐진 방아쇠의 느낌을 만끽하며 여운에 잠긴 모양새.

단 한 방.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당가주, 당백위는 죽고 말았다.

과연 당가주가 영락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열강의 기술이 무림의 절학을 뛰어넘고야 만 것일까.

그 의문은 천마의 마음속에 한 차례 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나저나 이제는 의화단(義和團)이라는 새 이름도 얻었으니, 계속 천마라고 호칭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 않겠나."

"……그렇습니까. 저는 계속 천마의 호칭을 쓰셔도 상관……

천마가 수하의 간언을 자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그 이름은 십만대산(十萬大山)과 함께 묻도록 하지."

"하하. 그럽지요. 그럼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의화단주(義和團主) 무진(無盡)이 좋겠네."

"알겠습니다, 단주님."

따악!

무진이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손을 한 차례 튕겼다.

소리를 내며 떨어진 중지와 엄지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삼매진화(三昧眞火)가 무진의 기(氣)를 게걸스레 잡아먹으며 피어난 것이다.

"작별이로군……"

그는 주변을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눈에 담았다.

오랫동안 인적이 닿지 않아 여기저기 금이 간 전각의 내부. 거미줄 쳐진 구석. 그 너머로 보이는 기억 속 풍경까지.

후우……

한숨과 함께 모두 떠나보냈다.

들이키는 숨결에 석유의 내음이 뒤섞여 있었다.

"기름은 충분히 뿌렸겠지?"

"예. 분부대로 하였나이다."

"좋다."

화르륵!

사내의 손아귀에서 떨어진 작은 불똥이 바닥 면과 맞닿고.

바닥에 뿌려둔 기름 위로 시뻘건 화마가 일어났다. 수백의 세월을 헤아리던 목재가 힘없이 바스러진다.

불은 빠르게 번졌다.

바닥에서 어느새 기둥으로, 또 천장으로. 나아가 험준한 바위를 깎아 만든 전각들을. 그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을 거처들까지.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연기가 독하군. 나가지."

"……알겠습니다."

십만대산이 불타고 있었다.

과거의 잔재는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그 흔적을 모조리 연기와 잿더미 사이에 파묻는다.

무진은 산불로 크게 번진 화마를 등지며 걸었다.

그의 등 뒤로는 역시 기다란 코트 자락이 풀어진 채 휘날리고 있었다.

"단원들은 어디로 이주했지?"

"몇몇은 호독(滬瀆, 상하이)으로 이주하였고, 기존 의화문 단원들은 산동(山東)으로 갔습니다. 독일인들이 그곳에 상주하는지라……"

"홍콩은?"

"적당한 사람을 보내 두었습니다. 영국 측과 접촉하라 일러두었지요."

무진은 면도 된 자신의 꺼끌꺼끌한 턱수염을 몇 번이고 매만지며 사색에 잠겼다.

"좋군. 독일인이라……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생각을 끝마친 의화단주가 입을 열었다.

"숭산으로 간다."

"숭산이요? 단주님. 거긴 소림의 영역이 아닙니까?"

"이맘때면 슬슬 정파 놈들이 궁상맞게 앉아서 시시덕거릴 때가 됐어."

수하가 무진의 의중을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제 생각이 맞냐는 듯 물어왔다.

"허……백도 총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거긴 어째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저희가 그곳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까?"

"원래는 불가하지. 해남에 지워둔 빚이 있다. 동행인 자격으로 문턱을 밟을 수는 있을 거야. 슬슬 가자."

"받들겠습니다."

* * *

쏟아질 듯 말듯 눈물이 차오른 하늘이다. 우중충한 날씨 속에 이따금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진이 감옥에 투옥당할 때도 꼭 같은 날씨였던지라 자꾸만 기억이 떠올랐다. 그 무력했던 순간을 상기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의문스러운 전대 교주의 죽음. 그리고 들이닥친 황군의 군홧발. 분명 누군가의 계략이 있었으리라.

세상이 메케한 환초 연기 속에서 의뭉스러운 꿈을 꾸던 때였다.

이십 년 전, 바로 오늘.

무진은 잠시 추억에 잠기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고작 날씨 하나 때문인지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왠지 닮았군.'

이십 년의 시간과 격차를 뛰어넘어 무진은 다시금 세상에 섰다. 그가 단지 무림에 복귀하고자 하였는지는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무진은 단지 천마 신교의 십 일대 교주이자,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가 궁금할 뿐.

과거에 있었던 일을 파헤치고자 하니, 지나간 길을 되짚는 여행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이십 오년 전 신교는 몰락했다. 쌓이고 묵혀진 은원인가. 정파의 소행인가. 그도 아니면 열강과 황제의 이해관계인가.'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찾아보면 될 일.

우선은 의화단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작금의 무림에서 독보(獨步)함은 고금제일의 무력이 있지 않은 한 커다란 약점에 불과하다.

세력을 기르고 경지를 높여 철인의 통치를 가능케 해야 한다. 강성한 세력이 그의 위세를 높여줄 터.

그리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답에 더 빨리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주님."

"음?"

"곧 열차가 들어옵니다. 준비하시지요."

딸랑, 딸랑, 딸랑……

멀리서 열차의 행진을 알리는 종소리가 퍼졌다.

그 사이로 무진은 수하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산동의 상황이 꽤 좋지 못하다던데."

"아…… 그 왜, 몇 년 전에 황실이 왜놈들에게 대판 깨졌지 않습니까. 마관조약(馬關條約, 시모노세키 조약)도 맺었구요."

"그런 소식을 들은 것 같기도 하군."

무진이 기억을 곱씹었다.

감옥에 가끔 들어오는 신문으로나 접할 수 있던 외세의 정보였다.

"양가장(楊家將) 놈들이 왜에서 온 무인들을 몰아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데, 산동 지역 문도들에게 전부 동원령을 때렸답니다. 거기에 의화문도 포함되었고요."

"왜의 무인들이라면……야쿠자인가? 산동악가(山東岳家)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말도 마십쇼. 그 악가 놈들이 바로 왜놈들과 한패였답니다."

"쯧……산동의 태산이 영락했군."

야쿠자라면 분명 일본도 따위를 들고 설치는 놈들일 텐데. 멀리 떨어진 산동까지 진출한 것을 보면 일본 제국을 뒷배로 두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총기를 더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야쿠자 놈들도 총을 쓰나?"

"관심 있으십니까?"

"없던 관심도 생기게 할 물건이더군."

"이십 육 년식 권총이라고, 리볼버라는 물건인데 지금 단주님이 가지고 계신 것과는 구조가 조금 다릅니다요."

"흥미가 가네. 그것도 한번 얻어봐야겠어."

무진은 총에 맞춰 무공을 하나 창안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야쿠자란 놈들은 이미 만들어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

생각할 시간은 많다. 객차 안에서 느긋하게 고민해 봐도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다른 안건을 먼저 물어야 했다.

"자네가 보기에는 우리가 어느 쪽을 도와야 할 것 같나."

"음……잘 모르겠구먼요. 그래도 도와야 한다면 양가장이 아닙니까?"

"왜 그러지?"

"그래도 왜놈들 아닙니까. 빨리 밀어버릴수록 좋지요."

"그렇군…… 알았네."

수하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어느새 멀리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떠오르고 있었다. 분명 철마의 보일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느새 눈앞에 멈춰선 새까만 거철.

끼이이익…………

바큇살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귀청을 울렸다.

차체에 온통 까만색을 칠한 철마가 승차장 사이에 멈춰섰다.

무진은 잠시 감상에 잠겼다.

하루에 수천 리를 나아간다니. 세상을 가르던 생사현관처럼 험준한 산지와 먼 거리가 타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상단 몇 개가 한 달에 걸쳐 옮길 양을 이놈은 하루 만에 옮긴다 들었다.

"……웅장하군."

세상이 타통되었음은, 곧 지방에서 호족처럼 군림하던 이들의 세가 약해짐을 의미했다.

요녕에서는 모용을 예로 들수 있었고, 안휘에서는 남궁이 그러했다. 본래 그 지역의 왕처럼 군림하던 이들이 요즘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무림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놈의 경적은 들어 보셨는지요? 소리가 아주 죽여줍니다."

"그건 아직 못 들어봤군."

무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열차가 경적을 뿜는다.

뿌우우우!

그 기세가 지상을 헤엄치는 고래라 해도 좋았다.

객실 칸으로 들어가는 문이 무진의 앞에 멈춰 서고, 수하가 안내한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요."

"알겠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본래 역사보다 철도 개통이 빠른 이유는, 무공의 존재로 인한 인력의 차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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