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91
-응! 자기 왜?
수현의 전화에 조금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기고 취기가 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너희 쪽은 언제 끝나나 해서.”
수현 또한 취기가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아직 좀 더 마실 것 같은데...자기네는 끝났어?
“아니... 우리도 아직 마시고 있지. 그냥 언제쯤 끝나나 궁금해서 전화해봤어.”
수현이 발장난을 하며 말했다.
-헤헤. 오랜만에 다들 모였더니 다들 재미있어서...
연희가 미안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나 없는데도 재미있어?”
수현이 괜히 삐친 척을 하며 말했다. 연희의 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자기, 오늘 좀많이 취한 것 같은데?
연희가 귀엽다는 말투로 말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까... 진짜 나 없이도 재미있나보네?”
수현이 상처라는 듯이 말하자 연희가 다시 웃었다.
-자기랑 놀 때가 당연히 제일 재미있지!
연희가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흠, 못된 놈들이 들어오거나 그러진 않았고?”
수현이 본론 아닌 본론을 말했다.
-그게 궁금했구나?
연희가 전화의 목적을 알았다는 듯이 짓궂게 물었다.
“... 네가 너무 예쁘니까 그런 거야...”
수현이 자기 탓은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내탓이다?
연희가 깔깔거리며 물었다.
“응...네 탓이야.”
수현이 말할 때, 연희의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인 것 같았다.
“아주 잠깐 통화도 못 하게 하네!”
수현이 투덜거리자 연희가 기분 좋게 웃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황수현이지? 하여튼... 그걸 못 참아요...
건너에서 더 또렷해진 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소영 맞지? 걔한테 네 남친은 너희 옆방으로 가려고 한다고 전해줘.”
수현이 코웃음 치며 말하자 연희가 깔깔대며 그대로 전해주었다. 건너에서 부끄러움으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우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알았어. 너무 마시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얼른 전화주고.”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 자기도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응. 좀 이따가 봐.”
-응!
전화를 끊은 수현은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뭐 이렇게 오래 걸려? 똥 싸고 왔냐?”
“저거 백프로 지 여친한테 전화하고 온 거임.”
“아나... 진짜...”
다른 아이들의 야유 섞인 말에도 수현은 뻔뻔하게 앉았다. 그들은 다시 술을 마시며 연애이야기를 이어갔다. 병훈과 강민의 간절함이 돋보이는 때였다.
술자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런 저런 주제들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민형이 문자를 확인하고 말했다.
“여자애들 끝났대?”
“그런 거 같아.”
“그래~. 솔로들은 비켜줘야지.”
강민이 그런 말을 하면서도 군말 없이 일어났다. 술자리 도중, 내일 점심에 최근 썸타는 여자와 약속을잡았기 때문이다. 병훈 또한 내일 저녁에 썸녀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별 투정 없이 일어났다.
넷은 나란히 역으로 향했다. 준코 근처에 있는 유플렉스 앞에서 연희와 소영이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네 남자가 유플렉스 앞 사거리에 도달했을 때였다.
“어? 저거 김연희랑 이소영아냐?”
시력이 좋은 병훈이 건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병훈이 보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자 둘에게 치근덕대는 두 남자까지 있었다.
“어? 맞는 것 같은데?”
강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의 수현과 민형을 바라보았다.
“어떤...”
“저런...”
둘의 입에서 분노가 느껴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넷은 빠른 걸음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진짜 술 한 잔만 해요!”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들의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민형과 수현의 표정은 더 사나워졌다.
“자기야!”
“여보!”
수현과민형이 한 마디 외치려 할 때, 그들을 발견한 두 여자가 반가워진 얼굴을 하며 그들을 불렀다. 두 남자가 뒤를 돌아보다가 네 명을 보며 흠칫 굳었다. 일단 수로 밀리는 것은 물론이고, 넷 모두 덩치가 괜찮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병훈과 강민은 키가 많이 컸다.
“아... 남친 있으셨구나...”
흉흉한 기세를느낀 남자 하나가 어색하게 말했다. 연희와 소영이 재빨리 자신들의 남자친구를찾아 피했다.
“아니, 그럼 있다고 하던가... 없는 척 왜 서있어...”
문제는 한 놈은 자존심인지 객기인지 시비조로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꽤나 발음이 꼬인 것이 술을 진탕 마신 듯 했다.
“저기요! 우리가 몇 번이나 남자친구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소영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분위기가 더 냉각되어갔다.
“야, 그냥 가자. 야!”
다른 한 놈은 그래도 정신이 있는 모양인지 친구를 잡아끌며 말했다.
“아니, 근데...”
민형이 꼭지가 돌기 직전의 말투가 되어 이를 갈았다.
“야, 그냥 보내.”
민형의 술버릇을 아는 병훈이 민형을 잡으며 말했다.
“자기야. 진정해.”
연희도 자신의 남자친구를 다독였다. 수현은 말이 없었지만, 상대의 반응에 분위기가 훅 다운 되어있었다.
“가라.”
수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라? 가라는 반말이고! 너 몇 살이야?”
“야! 가자고!”
슬슬 분위기가 과열되려 할 때, 경찰차가 그들 옆으로 섰다.
“무슨 일들이십니까?”
“가자! 별일 아닙니다! 야!”
친구를 말리던 남자가 얼른 외치며 친구를 끌었다. 수현은 연희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향해 괜찮다는 눈빛을 보냈다.
“... 진짜 괜찮아.”
시비를 걸던 남자가 친구에게끌려가고 나자, 경찰차는 사라졌고 애매한 분위기가 그들을 감쌌다.
“아이씨... 우린 여친도 없는데 이게 뭐냐...”
강민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민형과 수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너네가 미안할 건 없고...”
병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여튼 니들도 피곤하긴 하겠다...”
강민이 네 명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너희 덕에 별 탈 없이 끝났다. 고맙다?”
소영이 먼저 조금 분위기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맞아... 고마워.”
연희까지 둘에게 말하자, 병훈과 강민은 민망함에 괜히 볼을 긁적였다.
“큼! 야, 그럼우린 간다. 커플들 잘 풀고.”
병훈이 작게 목을 가다듬고는 강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래, 잘 가! 다음에 봐!”
“가라. 담에 보자.”
커플은 사라져가는 둘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병훈과 강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무언가 어색한 기운이 두 커플들에게 남았다.
“크흠, 화났어?”
괜히 무언가 찔리는 기분이든 소영이 민형의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사실 그녀들의 잘못은 아니었지만...괜히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전혀.”
민형은 아직 조금 남은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미지근한 티가 나긴 했지만.
“참... 적응이 힘들다! 내가.”
수현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연희의 손을 꽉 잡았다.
“헤헤...”
연희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살짝 남자친구의 어깨를 밀었다.
“야, 우리도 여기서 헤어지자.”
수현이 민형을 툭치며 말했다.
“휴... 그래. 담에 보자.”
민형도 한숨을 내쉬며 소영의 손을 잡았다.
“소영아, 민형아 잘가!”
연희가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소영 쪽에서도 역시 어색하게 마주 인사를 건넸다.
두 커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찢어졌다.
“자기야... 표정 좀 풀어봐~.”
연희가 애교를 살짝 부리며수현에게 달라붙었다.
“나 아직 표정 안 좋아?”
“응. 눈썹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연희가 수현의 표정을 따라하며 말했다.
“...하여튼 여친이 너무 예뻐도 문제다, 문제.”
수현이 괜히 투덜거리며 연희를 확 끌어안았다.
“나 예뻐?”
연희가 꼼지락 거리며 물었다.
“그럼, 아까도 못 봤어? 별 놈들이 다 꼬이잖아.”
수현이 투덜대는 말투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관심 없어. 자기한테 예뻐 보여?”
연희가 수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둘은 잠시 감정을 환기시키는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마음 풀렸어?”
잠시 수현을 토닥이던 연희가 작게 물었다.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거든?”
수현이 괜히 한 번 튕겼다. 연희가 흐흐 웃었다.
“나한테는 쉬운 남자 해줘...”
연희가 수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수현이 앙큼한 그 행동에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방금 웃었지?”
연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비웃은 거거든?”
수현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닌데? 완전 다 풀린 웃음이었는데?”
“... 아니거든.”
수현의 부정에 연희가 더 애교스럽게 달라붙어왔다.
“그럼... 마지막 수단을 쓸 수 밖에 없네...”
연희가 수현의 품에서 벗어나 응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뭔데?”
수현은 모르는 척을 하며 말했다.
“따라와 봐.”
연희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수현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연희의 손길에 끌려갔다.
둘은 골목을 몇 번 지나서 한 건물 앞에 섰다.
“싫어?”
연희가 거절 당할 일 없다는 것을 아는 말투로 당당하게 말했다.
“좋아.”
수현이 연희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둘은 가볍게 웃는 얼굴을 하고는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커플들이 그들처럼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