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88 (88/94)


  • 〈 88화 〉88

    수현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강한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 특색 없이 흰 천장과 촌스러운 몰딩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만 보면 참  볼일 없는 주말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어나자마자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수현은 옆에서 들리는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반 바퀴 돌렸다.

    거기에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의 여인이 뽀얀 피부를 드러낸 채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새까만 생머리와 대비되어 더 빛나 보이는 미모에 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수현이 살짝 몸을 일으켜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어제 그렇게 불태웠음에도 다시 타오르는 욕망은 단지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밝은 빛에 그대로 드러난 연희의 알몸을 보고는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그는 간신히 욕망을 참아내며 연희의 배만 겨우 가리고 있던 이불을 넓게 펴서 잘 덮어주었다.


    “흐음, 방금은...내가 원하던 장면이 아닌데...”

    연희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깨있었어?”


    수현이 민망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침이라 잠긴 목소리였다. 연희는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방금 깼어...얼마나 시선이 뜨겁던지...”


    연희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반쯤 몸을 일으켜 수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달라붙어왔다. 그녀는 가볍게 수현의 몸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꽤 야한 입맞춤이었다.


    “우리 자기는... 몸도 달다.”


    연희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며 수현의 몸을 어루만졌다. 수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연희야... 그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수현이 반쯤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흠, 그것도 내가 원하는 반응이 아닌데... 오늘 아침엔 왜 이렇게 소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혹시 나 이제 매력이 없나?”


    하지만 연희는 대답 대신에 슬프다는 듯이 처연한 연기를 하며 혼잣말 하듯 말했다. 수현이 그 뻔뻔스런 연기에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정말, 연희야... 어딜 봐서 그게 소녀가  말이야... 도발이 아주...”


    수현이 어이없지만 귀엽다는 듯이 말하며 연희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섹시하지?”

    연희가 눈웃음을 치며 대답을 강요하듯 말했다.

    “글쎄... 내가 지금 어떨 것 같은데?”

    수현도 장난스럽게 웃으며 연희의 손을 당겼다. 연희는 작게 킥킥거리며 단단한 수현의 몸 어딘가를 느꼈다. 수현의 입에서 낮고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헤헤. 자기 계속 참을 거야?”

    연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수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수현이 결국 연희의 앙큼한 도발에 넘어가 몸을 빠르게 돌려 연희를 내려다보았다. 연희는 작게 꺄 소리를 지르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수현의 얼굴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귀한 것을 만지듯 나긋하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작은 불꽃이 튀었다.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솟구치는 감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키스...할래?”

    연희가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작게 속삭였다. 방의 공기가  달라졌다.


    *


    수현과 연희는 깔끔하게 토요일 오전을 날리고 허전한 배를 채우기 위해 서래마을로 길을 나섰다.

    “지금 가도... 아직 사람 많겠지?”


    연희가 주린 배를 움켜쥐는 척하며 말했다.


    “음, 너무 배고프면 다른 곳 갈까?”


    수현이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장난이야! 거기로 가자! 민형이 입맛은 믿을만한 것 같아!”

    연희가 팔짱을 껴오며 웃었다.


    “우리도 좋은 곳 많이 다니자.”

    수현이 연희에게 작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치,  자기랑 먹어서 여태도  좋았는데? 자긴 아니야? 그래?”

    연희가 그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수현이 연희의 찌르던 손을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둘은 마주보며 킬킬거렸다.


    “음, 여기서... 돌자.”


    수현이 연희를 골목 안쪽으로 이끌었다.


    “오! 여기야? 예쁘다!”


    연희가 2층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건물을 보며 합격점을 주었다.

    “건물은 합격?”
    “응. 합격! 민형이도 은근히 이런 곳 잘 아네.”

    “민형이 형님이랑 형수님이 데리고 많이 다녔대. 요즘 소영이랑 잘 써먹고 있지 뭐.”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이랑 사이 되게 좋은가 보다!”


    연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뭐 자기 말로는 끌려 다녔다던데... 그것도 복이지.”


    “음, 부럽다! 어쨌든 들어가자! 음식 냄새 맡으니까 배 엄청 고파졌어!”

    연희가 수현을 살며시 끌며 말했다. 둘은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정원을 지나 건물로 들어갔다.


    약간 늦은 점심임에도 안에는 웨이팅이 조금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수현이 안내하는 알바생에게 물었다.


    “한 삼십분 정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알바생은 연희를 지나치게 힐끔거리며 말했다. 수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네... 감사합니다.”

    수현이 연희를   단단히 잡아당기며 말했다. 알바생은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대기의자로 돌아서자 연희가 작게 웃으며 수현의 턱을 만졌다. 수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좋니?”


    “응. 자기 질투하는 모습 섹시해.”

    연희가 퉁명스런 수현의 말에도 킬킬거리며 더 달라붙었다.

    “어? 황수현! 김연희!”

    그들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둘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뭐야? 너도 여기 와있었냐?”

    수현이 민형을 향해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어, 소영이랑 좀 전에 들어왔지.”

    민형이 물기가 덜 마른 손으로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야, 그럼 우리도 합류하자.”


    수현이 얼른 말했다.

    “뭐 해줄 건데?”


    민형이 짓궂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 형이 점심 산다.”


    수현이 냉큼 말했다.

    “진짜?”

    “응. 둘 덕에 우리가 사귀는 거 아니겠냐? 형이 쏜다.”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민형의 표정이 무너졌다. 평생 그가 안고  흑역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자. 주문 했냐?”

    “새끼... 아주 놀릴 거 천지지? 했는데, 추가하면 될 거야. 방금해서.”


    민형이 앞장서며 말했다. 연희가 알바생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말하자, 알바생이 알아듣긴 한 건지 모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야.”

    수현이 연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연희는 기분 좋은 얼굴로 얼른 수현의 손을 잡아왔다.

    “여긴 알바생 교육이 다시 필요한 곳이야.”


    수현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연희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고 민형이 어지간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아오, 빨리 올라나 와.”

    민형이 계단 중간에서 말했다. 연희가 킬킬거리며 수현을 끌었다.

    “어! 소영아!”

    연희가 소영이를 발견하고 환하게 인사했다. 소영이 잠시 놀란 눈을 하더니, 반가운 얼굴이 되어 손을 흔들었다.

    “뭐야, 언제 올라온 거야?”
    소영이 앞자리에 앉는 연희에게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촬영 때문에 목요일에 올라왔어.”

    “올라오면 연락 좀 주지! 반 여자애들끼리 한 번 같이 술이나 먹게.”


    소영이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 다음엔 연락할게!”

    연희가 웃으며 말했다.

    “여자들끼리만 왜 모여?”

    “여자들끼리만 모여서 뭐하려고?”

    수현과 민형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두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희는 데이트 하듯이 둘이서도 잘 만나고, 병훈이랑 강민이까지 넷이서도 잘 만나면서 왜 우린  돼?”

    소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


    “데이트라니 말이 심하네...”


    두 남자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우린... 우리끼리 있어도 위험하지가 않잖아. 너희끼리 있으면...야, 세상이 많이 위험해.”

    수현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하자, 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너희 빼곤 다 늑대다?”


    “그렇지!”

    냉큼 수현과 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잘해! 주문이나 하자!”


    연희가 수현의 옆구리를 쿡찌르며 말했다.

    “진짠데... 야, 너흰 뭐 시켰냐?”


    수현이 궁시렁 거리며 물었다. 민형이 점심코스  가지를 가리켰고, 수현과 연희도 그들처럼 동일한 주문을 했다.

    다행히 주문은 잘 들어가서 넷의 음식은 동시에 나왔다.


    “음, 그러고보니 오늘 우리 더블데이트네?”

    소영이 음식을 뜨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밥 먹고도 같이 놀자고?”

    민형이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밥만 먹고 헤어지긴 그렇잖아. 오랜만에 봤는데.”


    소영이 말하며 수현과 연희를 바라보았다.


    “내가 듣기론 더블데이트는 위험하다던데...”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린 좀 다르지!”


    연희가 냉큼 말했다. 그녀도 오랜만에 본 소영이 반가운 듯 했다.

    “뭐, 밥 먹고 거기 카페 들러서 이야기나 하자. 애정 행각 자제 하고.”

    수현이 말했다.


    “너만 조심하면 돼.”

    민형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수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은 전체적으로 무난하면서도 조화가 괜찮은 편이었다. 위치와 분위기를 생각하면 딱 적당한 가격이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


    넷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났다. 수현이 얼른 계산을 했다.


    “커피는 내가 살게.”

    연희가 뒤를 보며 민형과 소영에게 말했다.


    “올~. 우리  번 엮어주고 잘 얻어먹는다.”


    소영이 민형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여자친구에게 까지 그 소리를 듣자, 민형은 차라리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쪽을 택했다. 나머지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거기 디저트 오늘 내가 다 먹는다.”

    민형이 궁시렁 거렸다. 넷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옮겼다. 두 여자는 곧 가게  카페의 디저트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즐거워 했다.


    “음, 그럼 그거랑, 나 저번에 당근 케이크도 맛있더라. 그거 먹자!”
    연희의 말에 소영이 냉큼 동의했다.


    “여자들은 신기하지 않냐? 배부르다고 했는데, 디저트는 따로래...”

    민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받아들여... 이해가 아니라 인정이야.”

    수현이 말하자 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카페에 들어와 넷은 여러 디저트를 고루 시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현과 민형도 디저트 배가 따로 있는 것처럼  먹었다. 두 여자가 그것을 지적하자, 두 남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렇게 노는 것도 재밌다!”


    카페를 나갈 준비를 하며 연희가 말했다.


    “조금만 안에서 기다려. 차 가지고 올게.”
    민형이 나머지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어딘데? 여기로 들어와야 하는 거면 같이 나가. 길 복잡하잖아.”


    “그래, 같이 나가자. 소화도 시킬 겸.”


    수현과 연희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뭐... 그럼 그러던지.”

    넷은 더운 공기에서도 웃으며 걸었다.

    “원래, 드라이브 좀 갔다가 영화 보려고 했는데... 야, 영화 볼래?”

    민형이 차문을 열며 말했다.


    “어후, 열기 좀 빼고 타자... 그렇게 하자. 시간 남으면 오락실 고? 지는 커플이 영화관 쏘기로.”


    수현이 차 문을 열다가 열기에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하, 콜. cgv로 가자. 근처에 오락실 있음.”


    “오, 재밌겠다! 종목은 가서 정하는 걸로 하고, 3게임 선택!”

    두 여자도 신나서 동의했다. 두 남자의 승부욕이 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