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87
수현은 오전부터 연희의 패션쇼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오늘은 다른 모델과 함께 사진을 찍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모델로서 나름의 경쟁의식이 생긴 것 같았다.
어쨌든 워낙 출중한 옷걸이라서 뭘 입든 아름다웠기에 눈은 호강 중이었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 중에 하나를 자신이 골라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살다보니 다 좋아도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다.
달칵-.
또 한 번 화장실 문이 열리고 연희가 프릴이 달린 흰 블라우스에 분홍색 플레어스커트를 걸치고 나왔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책상에 놓아둔 가방 중에 작은 숄더백을 골라 메곤, 머리를 귀 뒤로 살며시 넘기며 수현에게 새침한 포즈를 취했다.
“자기야. 이건 어때?”
연희가 눈을 새초롬하게 내리깔고 붉은 입술을 작게 달싹여 물었다. 이게 힘들었다. 다 예쁜데 평가를 해야 했고. 달려들고 싶은데 참아야했다. 심지어 자신은 아침까지만 해도 둘이 함께 누워있던 침대에 앉아있었다. 아주 고통스러웠다.
“음, 그 옷이 그쪽 컨셉이랑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넌 그런 청초한 분위기가 확실히 더 살아. 뭐든 예쁘지만.”
수현이 쥐어짜내는 언어로 말을 만들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프흡. 미안··· 너무 귀찮게 했지···”
연희가 힘겹게 단어들을 늘어놓는 수현을 보고는 피식 웃어버리며 말했다. 그에겐 미안했지만, 다른 모델도 온다고 하니 괜히 여러 번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확인을 하게 되었다.
약간의 자존심 경쟁도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는 수현의 앞에서 다른 여자보다 못나 보이고 싶지 않아서 계속 신경을 쓰게 된다.
어쨌든 남자들이 진이 빠지는 1순위가 여친이랑 옷 매장을 가는 것이라던데, 그에겐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그는 여태까지 잘 버티는 편이었다.
“아···아냐. 그런 게 아니라··· 다 예쁜데 하나만 고르는 게 힘든 거지. 억지로 평가하는 느낌이고... 난 진심으로 다 예쁘거든.”
수현이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헤헷, 고마워. 음, 이거로 할까?”
연희도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아, 백은 지금 든 거 그거로 해.”
수현이 냉큼 백까지 골라주며 말했다. 연희가 다시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수현이 구두까지 골라주고 나서야 그들은 현관에 나란히 설 수 있었다. 다행히 연희는 수현의 선택을 무시하거나 번복하지는 않았다.
연희가 작은 거울 속에 있는 자신과 수현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 자기도 그렇고... 우리 힘 좀 주니까, 연예인 커플 같은데?”
연희가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말했다.
“연예인? 음... 그럼 넌 한가인보다 예쁘니까, 정훈이형 포지션은 내가 확실히 가져 올 수 있겠네. 욕 많이 먹겠다. 오래 살겠어.”
수현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먹는 욕만으로 만년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의 말에 연희는 깔깔거리며 부끄럽다는 듯이 그의 팔을 쳤다.
“그나저나, 자기 이젠 머리 잘한다··· 의외로 손재주 되게 좋아···”
연희가 웃음을 멈추고 거울에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해 보고는 중얼거렸다. 고데기로 살짝 넣은 컬이 꽤나 괜찮았다.
“흐흐흐. 내가 손재주가 좋지.”
수현이 연희의 몸을 살짝 잡아 당겨 그녀의 갈비뼈와 브레지어를 손가락으로 은근히 더듬으며 말했다. 노골적이지만 야한 느낌은 아니었다. 연인간의 짓궂은 가벼운 손장난이었다.
“못된 손!”
연희가 수현의 손을 아프지 않게 살짝 때리며 말했다. 눈을 살짝 흘기는 모습이 귀여웠다.
“미안~. 나가자. 이러다 내가 너 잡아먹을 것 같다. 오늘 너무 예쁘네.”
수현이 피식 웃으며 연희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연희도 따라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날이 무척 맑았다.
연희가 앞서서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뛰다가 살짝 발을 삐끗했다.
“앗!”
수현이 놀란 눈으로 얼른 다가가 연희를 잡았다.
“괜찮아?”
그 순간 연희가 수현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떨어지며 웃었다.
“장난이지롱! 놀랐어?”
연희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김연희...”
수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입술 조심하고 다녀. 가드가 너무 약하네. 요즘 복싱 잘 하고 있는 거야?”
연희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요게... 난 진짜 놀랐는데... 이리와...”
“꺄하하하! 싫어요! 안돼요! 꺄-!”
연희가 깔깔웃어대며 몸을 피하다가 조금 빠르게 길을 뛰어내려 갔다. 수현이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오전부터 잠시 추격전 아닌 추격전을 했다. 수현은 혹시 구두를 신은 연희가 진짜로 넘어질까봐 적당한 속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 알았어. 안 혼낼게. 그만 뛰자. 내 작품 망가지겠어.”
수현이 팔을 들어보이며 숨을 돌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꼬는 척을 하며 말하고는 항복을 선언했다.
“못 잡으면서 까불고 있어!”
연희가 살짝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고, 허리에 손을 올려 당당한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이럴 때는 표정이 개구진 것이 역시 숙녀 쪽 보다는 소녀 쪽 분위기가 조금 더 강했다. 수현이 손을 내밀었다.
“진짜 안 혼낼 거지?”
연희가 킬킬거리며 물었다.
“나 대한의 남아야.”
수현이 말했다. 연희가 살짝 눈치를 보면서도 그에게 다가와 수현의 손을 잡았다. 수현이 그녀의 손을 휙 잡아당기고 품에 강하게 안았다. 연희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있어!”
연희가 말했다.
“말은 하나만 했지. 말과 행동이 다를 뿐이지!”
수현이 연희를 풀어주고 가볍게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둘은 가볍게 서로에게 웃어보였다.
“히힛! 뛰다보니 금방 내려왔네. 일찍 도착하겠다!”
연희가 손으로 앞머리를 슬쩍 넘기며 말했다.
“중요한 촬영 가는데, 모델이 머리를 망가뜨리고···프로정신 어디갔어? 으휴. 이리와 봐.”
수현이 잔소리를 하며 연희를 잠시 멈춰 세우고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연희가 저항 없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됐어?”
“응. 예쁘다.”
수현이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담백하게 말했다. 연희가 참을 수 없어 새어 나오는 웃음을 흘렸다.
“빙구웃음... 가자!”
수현도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끌었다. 연희는 작게 째려보다가 수현의 작은 윙크를 받고는 결국 다시 맑게 웃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
*
수현과 연희는 합정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갈 장소는 딱 합정역과 홍대입구역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수현은 사방의 건물을 둘러보며 슬며시 웃었다. 슬슬 홍대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던 시점이었다. 수현이 부동산 투자를 할 리스트에 올라있는 지역 중에서도 순위를 다투는 지역이었기에 올 때마다 기분이 조금 들뜨곤 했다.
“자기야. 오늘 미팅 끝나고 케이크 사줄까?”
연희가 근처에 있는 생크림 케이크 집을 떠올리며 말했다.
수현은 나름대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라 케이크랑은 그리 가까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서 눈을 빛내며 생크림을 흡입하듯 먹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꽤나 신기한 느낌을 주었다.
“안 돼. 요즘 살쪘어. 다시 관리 좀 해야 돼.”
수현이 고개를 저으며 입맛을 다셨다. 연희가 그 모습이 웃겨서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우리 말하는 게 뭔가 남녀가 바뀐 것 같지 않아?”
“크흠. 다른 카페 가자. 근처에 새로 생긴 곳 있더라. 그러고 나서... 가볍게 소주 한 잔? 콜?”
수현이 소주를 마시는 포즈를 취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연희가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촬영이 끝나고 수현과 연희는 카페 2층 구석에 몸을 나란히 맞대고 앉았다. 연희는 조금 지쳤다는 표정으로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슬금슬금 손을 뻗어 수현의 왼손을 잡아당겼다.
당연히 수현은 아무런 저항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주었다. 연희는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수현은 오른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이고 살짝 그녀의 머리에 볼을 비볐다.
“흠...자기야.”
연희가 여전히 수현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그를 불렀다.
“...응?”
수현은 다시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고 대답했다.
“자기 왼손잡이잖아.”
연희가 깍지를 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응. 그렇지.”
수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반지를 왼손에 끼면 불편하지 않나?”
연희가 그의 반지를 작게 더듬으며 물었다.
“응? 별로 안 불편한데. 괜찮아.”
수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그건 갑자기 왜?”
연희가 가볍게 콧소리를 내고 잠잠해지자 수현이 물었다.
“아니... 그냥. 만지다보니까 갑자기 생각났어.”
연희는 조금 더 수현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많이 피곤했어? 목소리가 아직 안 돌아오네?”
수현이 오른손으로 여전히 기대어 있는 연희의 볼을 살짝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오늘 촬영은 상대가 조금 까탈스러워서 트러블이 있었다. 게다가 은근히 수현에게 들이댔는데, 그 때문에 연희의 피로도가 높아졌다.
“음... 조금?”
따듯한 손길에 연희가 고양이가 뺨을 비비는 것처럼 달라붙어왔다. 다행히 여자 모델에게 수현이 단호하게 대처한 덕분에 연희의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여자가 더 까칠하게 굴어서 촬영이 더 힘들긴 했지만...
“오늘처럼 단호하게 대처해. 알았어?”
연희의 투정 어린 말에 수현의 얼굴에 미소가 짙게 번졌다.
“응. 알았어. 걱정 마.”
수현이 연희를 토닥이며 말했다. 수현은 가볍게 커피로 목을 축였다.
“... 음, 자기야. 나 갑자기 달콤한 거 먹고 싶어졌어.”
연희가 수현의 입술이 컵에서 떨어지고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음? 아, 그럼 뭐 다른 거 시켜줄까?”
수현이 엄지로 입술을 슬쩍 쓸며 말했다.
“자기 입술.”
연희가 약간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현이 갑작스런 연희의 공격에 사레가 들려 작게 켁켁 거렸다.
“크흠!...여기 사람 많은데.”
수현이 목을 가다듬고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는 조금 오픈 된 공간이었다. 물론, 제일 구석진 자리에 식물로 살짝 가려져있긴 했지만, 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구석인데?”
연희의 말에 수현이 결국 슬쩍 주변 눈치를 보고는 고개를 돌려 연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니, 가볍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조금 길고, 그리고 조금 깊은 입맞춤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입술이 닿자마자 깊게 입술을 물고 혀를 살며시 내밀어오는 연희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술이 떨어지고 천천히 눈을 뜨자, 연희가 재빨리 다시 가볍게 버드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이제 좀 만족스럽다는 얼굴이었다.
“흐흠, 연희 너 이러려고 여기로 바꿨구나...”
수현이 작게 얼굴을 붉히고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대며 말했다. 그들의 원래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진동벨이 울려 내려갔다 온 사이에 연희가 자리를 바꿔두었다. 혹시 모를, 혹은 의도적인 스킨십을 위해 여기에 앉아있던 다른 커플이 일어나자마자 냉큼 자리를 바꾼 것 같았다.
“헤헤. 나 약았어?”
연희가 충전된 목소리로 작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 잘했어.”
수현의 말에 둘은 가볍게 웃었다. 연희는 방금의 키스가 무슨 약이었던 것처럼 밝아진 얼굴이 되었다. 지쳤던 기색이 전부 가시고, 가벼운 미소만이 입가에 떠올랐다.
“음, 자기야. 우리 고기 언제 먹으러 갈까?”
“너 배고프구나.”
“응... 우리 아침 말고 먹은 거 없잖아... 자긴 배 안 고파?”
연희가 설마 나만 그러냐는 듯이 물었다.
“설마... 당연히 배고프지. 음, 그럼 한 삼십 분만 더 있다가 나가자. 지금은 고깃집 오픈시간 좀 애매할 것 같으니까.”
수현이 시간을 슬쩍 보고는 연희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연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커피를 홀짝였다. 그들은 조금 더 꽁냥거리며 애정을 나누다가, 배꼽시계가 울리는 것을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