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85 (85/94)



〈 85화 〉85

연희는 아쉬운 얼굴로 수현의 품에 안겼다. 서울에 올라 온 이후로 내내 붙어 지낸 수준이었지만, 일주일을 거의 같이 보내던 그들에게는 너무 짧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연희 동생의 시합 장소가 집보다 조금 가까운 강릉이라서 저녁은 제대로 함께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면 아버님이 나오시는 거지?”

수현이 연희를 가볍게 토닥이며 물었다. 연희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가서 동생 응원 잘 해주고.”

수현도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연희가 수현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그나저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딩들 주제에 예쁜 건 알아서··· 남의 여친한테 응원을 와달라고 하고··· 참나! 연희야, 넌 아버님 옆에 꼭 붙어있어야 돼. 알았지?”


수현이 일부러 조금 화난 목소리를 연기하며 말했다. 연희가 피식 웃었다.

“뭐야··· 자기, 머리에 피도  마른 중딩들한테 질투해?”


연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전직 십대 남자라서 잘 아는데··· 얼굴만 어려 보이지 속은 다 시커먼 나쁜 놈들이야. 속지마. 알았지?”

수현이 마치 계몽주의자처럼 말했다. 연희는 웃음을 가볍게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연희의 몸을 떨어뜨리자, 연희가 재빨리 발을 살짝 들었다. 둘의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자기도 알지? 내가 전직 여고생이라 아는데, 다 겉만 순진한 음흉한 애들이야. 그리고 내가 현직 20대 여자라 잘 아는데, 걔들은 제일 위험한 애들이니까 말도 섞지마.”

연희도 당부하듯 말했다. 사실, 위험요소가 도처에 깔린  오히려 수현 쪽이었다. 당장 여기 문만 열고 나가도 예쁜 여자들 천지였다.

“응.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게. 24시간 아무때나 전화해서 확인해도 돼.”

수현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연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어주고는 수현의 허리를 다시 꽉 끌어안고 놓아주었다. 버스가 곧 출발 할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아쉬움을 담아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

연희는  밖을 보던 와중에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버스가 완전히 주차를 마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온 뒤에야 잠에서 스르르 깨어났다. 연희는 거의 마지막으로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고는 핸드폰을 들고 부재중 전화를 눌렀다. 신호음은 짧게 울리다 끊어졌다.


-응. 연희야! 지금 도착한 버스지?


“응. 엄마! 자느라 못 받았었어. 나 지금 버스에서 내리는 중! 아빠 와 있어?”


연희가 버스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딸! 연희야!”

핸드폰과 멀리  쪽에서 동시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방향을 봤다. 조금 멀리서 엄마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발을 빠르게 굴려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 엄마가 나온 거야? 아빠는? 왜 아빠가 안 오구?”

연희는 바로 엄마의 옆으로 붙어 팔짱을 끼며 애교 있게 물었다.

“아빤 네 동생 근육 풀어준다고 마사지 중. 오늘 훈련  가볍게 해야 하는데, 조금 무리를 했나 봐. 그래서 엄마가 왔지.”

연희의 어머니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연희가 살갑지 않은 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 애교가 넘치는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대학에 들어가고 오히려 애교가 늘어난 편이었다. 부모 입장에서 싫은 건 절대 아니었지만, 남자친구 덕이라는 걸 눈치 채고 나서 남편은 종종 투덜거리고는 했다.


“히히. 엄마랑 둘이 가는 것도 좋다. 우리, 아예 드라이브 좀 하다 갈까?”

연희가 냉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연희의 어머니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다 너희 아빠  삐친다. 둘만 놀다 왔다고 삐친  풀어주려면 괜히 힘들어~. 엄만 가끔 애  키우는 기분이라 좀 힘들 때가 있단다.”


연희의 어머니는 가볍게 차로 이동하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표정만은 환한 것이 전혀 싫은  같지 않았다. 연희는 자신도 저렇게 오랫동안 연애하듯 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여러 풍파를 맞아가면서도 서로에게 애정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특히 더 대단해 보였다.


“우리집이 애만 셋이긴 하지! 근데, 그래도 내가 첫째지?”

연희가 동조하듯 웃으며 조수석으로 다가가 말했다.


“그럼! 46살 짜리가 제일 철이 덜 들었는데, 당연히 걔가 막내지.”

연희의 어머니는 픽 웃으며 말하고는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두 명의 아름다운 모녀가  차는 천천히 숙소를 향해 움직였다.


“아빠한테 잘 도착했다고 문자  해둬. 연재 재우고 보겠지.”


“응!”


연희는 엄마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

부부와 남매는 주말 오전부터 실내 체육관에 나와 있었다. 연희의 남동생인 연재는 컨디션이 좋다며 밝게 웃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기분 좋게 몸을 풀며 유도부의 아이들과 웃고 있었다. 연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자기 주변에 있는 남자들은 신기하게도 운동들을 하나씩은 상당히 좋아했다.

연희는 수현에게 보내주기 위해 체육관 전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멀리서 연재네 유도부 멤버 몇 명이 그녀가 손을 흔들어주는 줄 알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옆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크게 웃었다.

“참, 누가 내 딸 아니랄까 봐!”


연희의 어머니는 뿌듯한 표정을 한 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합장 가까이에 있던 연희의 아버지가 상황을 눈치채고 아이들에게 뭐라고  소리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근데 갑자기 사진은 왜 찍었어?”


“헤헤. 남자친구 보내주려고. 울 자ㄱ···.걔도 운동 좋아하거든.”


연희가 어머니의 물음에 배시시 웃으며 말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자기 소리를 삼키며 말했다. 연희가 슬쩍 어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으이구··· 엄만 상관 없는데, 아빠 앞에선 조심해... 괜히 또 심술 부린다.”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연희가 작게 혀를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시합 하려면 아직 많이 남았지?”

“한 삼 사십 분? 왜?”


“나 화장실 갔다가 전화 좀 하고 오려구···”

연희가 살짝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그런 모습을 보며 그저 귀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늦지 않게 와. 네 동생 친구들 상태 보니까  없으면 기운 빠지겠더라.”

연희의 어머니는 방금  일을 생각하며 아이들 쪽을 가리켰다.

“헤헤. 대신 미모의 강희선 여사가 여기 있잖아!”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애교 있게 말했다. 희선은 그 넉살에 웃으면서도 됐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연희가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연희는 볼일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오며 핸드폰을 들고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희세요?

건너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뭐야아, 언제적 전화 받기야?”

연희가 웃으며 타박하듯 말하고는 근처 그늘이 있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수현의 멋쩍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올드했어?


“음, 귀여웠어.”

연희는 등을 기대고 발장난을 하며 말했다.

-뭐, 그럼 성공이네! 아직 경기 시작 전이야?

수현이 그럼 됐다는 듯 시원하게 웃고는 연희에게 물어왔다.


“응. 한 삼십  정도 있으면 시작. 근데 난 음흉한 십대들 응원보단 누구 목소리가 더 고파서 나왔지.”

연희가 약간 애교부리 듯 말했다. 수현이 웃으며 잘했다며 칭찬을 했다. 둘은 그렇게 사소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잠시 통화를 이어갔다.

“··· 헤헤. 자기야. 나 이제 가봐야겠다. 시간 거의 다 됐어···그래도 행운의 여신이 시합은 봐줘야지.”

연희가 아쉬움을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감추며 웃었다.

-응. 그럼 또 전화할 수 있으면 전화해. 수건 같은  있으면 웬만하면 히잡처럼 쓰고.


수현도 아쉬움을 담아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연희가  말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들은 가볍게 다시 인사를 하고 수화기에 입 맞추는 소리를 내며 통화를 종료했다.


*
수현은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나갈 준비를 했다. 지방에 내려갔던 친구들도 다 같이 모이는 만큼 반가울 얼굴들이 많았다.


“야, 이 새끼는 어떻게 살이 더 쪘냐?”


홍철이 킬킬거리며 상훈에게 말했다.


“새끼야, 벌크업 모르냐? 이건 운동도 안 해본 놈이...”


“벌크업은 무슨...딱 봐도 존나 물살이고만.”


“함 뜨실?”


이런 정겨운 대화가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미친놈들아, 쪽팔려. 길에서는  얌전히 걸으면 안 되냐?”


수현이 방방 뛰는 둘을 보고 말했다.


“크, 우리 파이터가 또 조용히 하라는데, 어쩔 수 없지... 조용히 하자.”


상훈이 쫄은 척을 하며 말했다.

“미친놈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절로 욕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엔 4명이었던 그들은 10명이요!를 외치며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가 두 병이 비워질 때쯤, 아이들의 대부분이 모였고, 근황토크가 계속 이어졌다.


“어? 저기  누님 아니냐?”


즐겁게 먹고 마시던 와중에 상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현을 툭치며 말했다.

“... 맞아.”

슬쩍 뒤를 돌아본 수현이 소향과 눈이 마주치고는 말했다. 소향은 그를 보고는 분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휙 돌렸다.

“야... 근데  누님 표정이 왤케  좋냐?”

“뭐야, 방금 존예랑 이 새끼랑 아는 사이임?”


홍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닥쳐. 미친놈아.”

“아, 누군데? 시발 존나 예쁘던데.”


“아, 왜 저번에 우리 단체로 경찰서 갔다했잖아. 그때  누나임. 근데 너한테 왜 저러냐?”

상훈이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수현에게 물었다.


“그러게...  똥 씹은 표정이던데...”

미녀 레이더를 항시 발동 중인 놈들은 모두가 그녀를 봤는지 수현을 향해 눈을 빛냈다.

수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지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 이 새끼 용 되더니, 카사노바 된  보소...”

동현이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수현의 잔을 꽉 채웠다.


“존나 사랑하는 만큼 줬다.”

동현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미친... 막상 현실이면 좋지도 않거든?”


수현이 말하자, 아이들의 야유가 그를 향했다.


“근데 존나 아깝긴 하다... 존예인데...”

홍철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내 여친이 더 예뻐.”

수현의 말에 술자리가 걸죽한 비명으로 가득찼다.


“씨발 진짜....  새끼도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는구나...”

누군가 술을 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수현이 민망함에 웃었다.


“아, 근데 솔직히 인정이긴 해.”

“아, 리얼?  사진 밖에  봤는데 사진 그대로임?”

“더 쩔어.”


“남 여친 품평하지 마라.”


“아 씨발! 진짜!”


각종 대화들이 중구난방으로 오가고 술병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담탐 하실 분?”

몇몇 담배를 피는 아이들이 화장실  담배를 피기 위해 일어났고, 수현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 같이 일어났다.

“야, 근데  때 보니 그 누님도 성깔  있던데, 너 찾아오는 거 아니냐?”

상훈이 세면대에서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모르지... 피곤하다.”


수현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존나 복에 겨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홍철이 말했다.


“개소리 그만하고 나가기나 해. 미친놈아.”

수현이 홍철을 밀며 말했다. 홍철과 밖으로 나오던 수현은 마침 여자화장실에서 나오는 소향과 마주치고는 표정을 굳혔다.

수현과 소향 사이에 있던 홍철이 눈치를 보았다.


“죽고 못 사는 여친은 어디 뒀어? 헤어졌나?”

소향이 까칠하게 말했다.

“그럴 일 없는데요. 그냥 서로 모른 척 하면  될까요? 나한테 미련 남았어요?”


수현도 까칠하게 말했다. 홍철이 화장실 안의 상훈에게 눈짓을 보냈다. 상훈은 눈을 피하며 괜히 머리를 더 만졌다.

“하! 원래도 그냥 가지고 놀던 건데, 무슨 미련?”


“그럼, 그렇게 과민 반응할 이유도 없겠네요. 전 가보겠습니다.”

수현이 뒤를 돌았다.


“야!”


소향이 분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수현은 경고하듯 눈을 맞추고는 홍철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상훈이 허둥지둥 따라왔다. 그들은 몇몇 아이들이 이미 담배를 피고 있는 곳으로 나왔다.


홍철이 호들갑을 떨며 방금의 이야기를 전달했고, 수현은 홀로 담배를 피지 않고 질문 공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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