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3화 〉83 (83/94)



〈 83화 〉83

둘째 날.

수현과 연희는 오사카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교토로 향했다. 사실, 연희의 취향은 현대식 느낌보다는 옛 문화유산 위주여서  이르게 출발하려고 했으나, 연희가 의외로 도시 분위기도 즐거워해서 저녁식사 시간에 빠듯하게 맞춰 출발하게 되었다.


“너무 빠듯하게 왔나··· 나 맞춰준다고 계속 돌아본 건 아니지?”

그래도 약간 걱정되는 지 수현이 료칸으로 향하며 은근슬쩍 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전혀 아냐!  그런  걱정해! 내 표정 보면 모르겠습니까? 네?”

연희는 오히려 약간 펄쩍 뛰며 말하고는 약간 화내듯 물어왔다.

“아니··· 여행 오기 전부터도 그렇고,  취향이 그런 쪽은 아니었잖아···”

수현이 약간 우물거리며 말했다.

“음, 뭐 사실 그냥 유명한 유적지 같은 곳 다니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긴 했었지. 근데, 의외로 평범한 곳들 보는 것도 재미있는  같아.  한국이랑 조금씩 다른 분위기 찾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던데? 자기 덕분에 새로운 재미 하나 안 거지 뭐!”


연희가 수현에게 몸을 붙여 가볍게 부벼대며 말했다.


“그냥··· 사실 여행 다니면 서로 취향 안 맞아서 싸우는 경우도 많잖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지.”

수현이 그럼 됐다는 얼굴로 작게 웃으며 말하고는 연희의 손을 꼭 잡았다.

“뭐, 자기가 데려간 거기는 좀 당황스럽긴 했지.”

연희가 놀리듯 말하며 수현을 어깨로 슬쩍 밀었다. 수현도 그녀가 어딜 말하는  알아차리고 픽 웃었다.

“흠, 흠! 오늘··· 써 볼래?”


수현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연희가 벌개진 얼굴로 그의 허리를 훅 찔러왔다. 수현이 제법 아파서 헉 소리를 냈다.


“으휴··· 하는 거 봐서!”

연희는 새침하게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캐리어가 자잘한 돌에 통통 튀었다. 수현이 재빨리 그녀의 옆으로 붙어 다시 손을 잡고 배시시 웃었다. 그들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수현과 연희는 체크인 후에 유카타로 갈아입고 곧장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그들이 꽤나 기대하던 일본의 가이세키를 먹는 자리였다.


“음, 난 일본은 엄청 달고 짜게 먹는 줄 알았는데, 또 이건 아니네. 나름 고급이라 그런가?”


연희는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입에 맞아?”


“응. 여태 먹었던 다른 음식들도 나쁘진 않았는데, 또 약간 심심한  먹으니까 이건 이거대로 괜찮다. 자기는 어때?”


수현의 물음에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나도 좋지. 누가 사주는 건데.”


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사실 료칸 요금은 전부 연희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전에 부산의 호텔이 신경 쓰였는지 연희는 료칸 요금은 자신이 내겠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엣헴! 과인이 하사한 음식이니 감사히 먹도록!”


연희가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왕처럼 말했다. 수현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이 분위기 덕에 아마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지 않나 생각했다. 코스 요리로 진행된 음식들이  흐르듯 흘러가고, 맥주도 몇  새로 채워졌다가 비워져 아주 기분 좋은 정도의 취기가 그들을 감쌌다.

“잠깐 산책이나 나갔다올까?”


수현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희에게 물었다.

“응. 소화도 시킬  좀 걷다 오자. 갔다 와서 온천 가면 딱 맞겠다.”


연희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둘은  길로 건물을 나섰다. 밖은 해가 완전히 떨어져서 상당히 어두웠다.

“밤에는 꽤 어둡다···”


연희가 조금 더 수현의 팔에 바짝 붙으며 말했다.


“응··· 한국만큼 밤에도 밝은 곳은 별로 없는  같더라.”


수현도 가볍게 동의하며 말했다.


“자기 없었으면 무서워서 다시 들어갔을 것 같다.”

연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별 것 아니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남자들은 또 괜히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수현이 연희에게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만 믿어.”


수현이 가볍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연희도 그의 귀여운 허세에 살며시 웃고는 보조를 맞췄다.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을 보며 그들은 다리 근처로 향해 걸었다. 관광지다 보니 가볍게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다.

“음, 여기 내일 오전에 잠깐 들렀다 가자. 예쁠 것 같다.”


연희가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나긋하게 말했다.

“응. 그러자. 사진 예쁘게 나오겠다.”

수현이 가볍게 동의하며 말했다. 둘은 서로에게 기대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보았다.

“연희야.”

한동안 조용히 있던 수현이 나직하게 연희를 불렀다.

“응?”


“··· 그냥 불러봤어.”

수현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가끔은 그냥 이유 없이 말을 걸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정말 이유 없이. 연희도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가볍게 웃기만 할 뿐  물어오진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자기야.”

잠시 고즈넉함을 즐기던 연희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수현을 불러왔다.

“응?”

수현도 자신을 따라 하는 연희의 모습에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키스 하고 싶어.”


하지만 연희는 머리를 들어 수현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요구해왔다. 나는 너와 다르게 명확한 목적이 있다는 개구진 얼굴이었다. 수현도 대담한 연희의 요구에 살짝 웃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딜 봐. 나만 봐야지.”


연희는 수현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경고하듯 말하고는 먼저 입을 맞춰왔다. 수현도 연희의 몸을 감싸 안으며 조금 깊은 입맞춤을 했다. 질리지 않는 감촉이 서로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헤헤. 이제··· 들어가자.”


연희는 입술을 떨어뜨리고 작게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수현도 가볍게 웃으며 동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현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것에 대한 흡족한 보상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연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앞에 서서 옷깃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그들은 기모노 커플 렌탈을 신청했는데, 수현은 옷만 입으면 되었지만 연희는 머리까지 하는 터라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엄청 예쁘다. 물론, 원래도 엄청 예뻤지만. 신선하다는 의미지.”

수현이 가볍게 말을 하다가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연희를 보고는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연희가 피식 웃으며 수현을 살짝 흘겼다.


“뭐야. 선수치기 있어?”

연희가 싫진 않은 표정으로 수현에게 팔짱을 껴오며 말했다.

“그럼?  봐도 나올 말이 재생이 되는데? 이런 걸 복싱에선 카운터라고 하지.”


수현이 슬쩍 웃으며 자랑하듯 말했다. 연희가 피식 웃었다.

“치, 주고받는 재미를 몰라!”


연희가 수현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둘은 그런 소소한 장난을 치며 길을 걸었다.

“잠깐 여기  봐. 느낌 괜찮다. 사진 하나만 찍자.”

수현이 연희에게 말하고는 몇 걸음 앞으로 갔다. 연희는 제법 익숙해진 피팅 모델답게 금방 포즈를 잡았다. 주변 분위기와 어우러져 그녀는 아름답게 빛났다. 아니, 그녀 덕에 주변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수현이 카메라를 내리자 연희가 폴짝이며 뛰어왔다.

“어때?”


“너 때문에 주변이  보이는 정도야.”


연희의 기대어린 말에 수현이 즉시 답하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실물이 훨씬 나았지만, 그럼에도 사진은 아름다웠다. 연희는 수현의 말에 기분 좋게 웃었다.

그들은 그대로 교토 여러 곳을 돌며 사진을 찍고 구경을 했다. 물론 수현의 머릿속에는 금각사니 은각사니 하는 것들은 그저 잔상처럼 흐릿하게 남았다. 오로지 그 모든 것을 이겨버린 연희의 표정과 포즈만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담겼다. 카메라 따위로는 담지 못하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헤헤. 오늘 사진 엄청 찍었다. 피팅 할 때보다 더 찍은 기분이야.”

연희가 수현과 침대에 마주 누운 채로 디카의 사진을 넘겨보며 말했다.


“내가 너무 많이 찍었나? 피곤해?”


수현이 연희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물었다. 샤워를 마치고 자신이 바짝 말려준 머리가 뿌듯했다. 이젠 나름대로 관리하는 즐거움도 생겼다.

“설마! 나도 자기 표정 보느라 엄청 즐거웠어.”

연희가 디카를 치우고 수현에게 눈을 맞춰오며 만족스런 미소로 대답했다.

“내 표정?”

수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이 어땠는지를  수는 없었다.

“응. 진심으로 나 좋아해주는 얼굴. 자기는 항상 표정에서부터 진심이 묻어나서 좋아. 힘이 나.”


연희가 슬쩍 수현에게 깍지를 껴오며 따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마치고 수현을 향해 배시시 웃는 연희의 모습에 수현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침을 삼켰다. 연희가 그의 확실한 반응을 보고는 킥킥거리며 수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나저나 다행이지 않아? 공장 때문에 촬영 일요일로 늦춰져서. 난 우리 쪽에서 아쉬운 소리해야하나 싶었는데.”


연희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수현도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촬영이 바로 입국 다음날이라... 너 피곤할까봐 걱정되긴 하네.”

수현이 약간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가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이 웃었다.

“시험공부 밤샘하고도 가서 찍었는데, 뭐.”

연희가 가볍게 수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오히려 갈증을 유발시키는 그런 키스였다. 수현이  입을 맞추려다 약간 갈등하며 침을 삼켰다.


“음, 다리 주물러줄까?”

결국 수현은 진하게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을 참고 차선책을 꺼냈다. 분명 여기서 키스로 이어지면 그것만으로 끝날  같지 않았다. 아직 저녁식사 전이었기에 일을 치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연희가 수현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키스나 그거나 의도가 똑같은  같은데?"


연희가 머리를 길게 쓸어 정리하며 장난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수현이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참았다가 느긋하게 둘 다 해줘."


연희가 얼굴을 붉히고 작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흠, 흠! 밥... 먹으러 가자.”


연희가 수현에게 손을 뻗었다. 수현이  잘 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연희 곁으로 다가갔다. 연희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느낌 반, 귀엽다는 느낌 반으로 웃었다.


*


여행의 마지막 날은 절대 타이트하지 않게 일정을 잡는 것이 기본 방침인 수현은 간단히 나라에 가서 사슴들과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연희도 별 불만 없이 그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들은 적당히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나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겨울에는 노천탕 좋은 곳 가서 제대로 즐기자. 여름이라 온천을 많이 못 즐겼네.”


수현이 나라로 향하는 기차에서 어깨에 기대어 있는 연희에게 말했다.

“음? 겨울에 일본  오자고?”

연희가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수현을 바라보며 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일본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올 필요가 있나 싶은 표정이었다.

“뭐, 일본은 지진이 잘 나잖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빨리 봐야지.”

수현이 반농담식으로 말했다. 사실 반쯤은 진담이기도 했다. 내년 3월이면 방사능 유출이 있었다.

“치, 뭐... 생각해볼게.”

연희는 별 뜻 없는 농담으로 생각했는지 다시 가볍게 머리를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그들은 조용한 기차 안에서 손장난을 하며 놀았다. 시끄럽지 않고 주변 눈치도 신경  필요 없으면서도, 촉감이 만족스러운 애정행각이라 공공장소에서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었다.


나라에 도착해 사슴과의 만남을 기대하던 연희는 사슴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크게 박치기를 당한 사람을 보고는 수현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당한 사람은 남자였는데,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아서 수현도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와.... 쟤들도 한 성격하는 구나... 난 간식 하나씩 주면서 사진도 찍고 하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못하겠다.”

연희는 살짝 몸서리치며 말했다. 조금 전  장면은 운이 나쁜 케이스이긴 했지만, 수현도 굳이 위험할  있는 일을 하게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자신도 그 광경은 영 껄끄럽기도 했고. 상당히... 짤막하고도 고통스런 비명이었다.

둘은 사슴무리를 가로질러 도다이지로 들어가 구경을 했다. 연희는 옛 유적을 돌아볼 때는 한국과 비교해 가며 보는 걸 좋아했는데, 다행히 수현은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기에 가이드라도 받는 것처럼 즐겁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조금 여유있게 도다이지를 빠져나와 사슴무리를 가로질렀다.

“음,  그래도 한국 궁궐 쪽이 훨씬 예쁜 것 같아.  흥선대원군인가?”

연희가 사슴들을 슬쩍 둘러보면서 말했다. 약간 경계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취향에 따라 다른 거지 뭐. 나도 큰 건물 단위로는 한국식이 더 좋더라. 근데 좀 일반 주택 규모들은 둘  다른 매력이 있는 느낌이었어.”

수현이 연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더웠지만 참는 보람이 있었다.

“흠, 그쪽은  봐서 잘 모르겠다...아! 그나저나 이번에 기모노 입고 돌아다니다 생각난 건데, 우리 한국 가서 가을에 궁궐 투어 갈 때는 한복입어 볼래? 봄에는 어쩌다 보니 못 갔잖아. 이번에 보니까 전통 복장입고 다니는 게 되게 분위기랑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

연희가 생각난 김에 말해둬야겠다는 듯이 재빨리 수현에게 제안을 해왔다. 연희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을 알자 수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서로가 말하지 않고도 통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색다른 뿌듯함이 차오르곤 했다.

“연희야. 우리 완전 통했네.”


수현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자기도 그 생각 했었어?”


연희도 생각이 통했다는 게 기뻤는지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응. 너 되게 고울 것 같았거든.”

수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희가 얼굴을 붉히며 그를 살짝 밀었다.


“근데, 한복이 있을지 모르겠네... 한국도 대여하는 곳이 있나? 가서 한  알아보자.”

“응. 그러자. 가능하면, 자기한테 갓 씌워보고 싶다. 잘 어울릴 것 같아.”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고고한 선비 같긴 하지. 청렴하고, 절제할  알고, 학문에 힘쓰고.”

수현이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연희가 슬쩍 수현을 흘겨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 방금 뭐야? 반응이  아닌데?”


수현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절제에서 탈락 아냐?”


연희가 당연한 걸 묻냐는  말했다.

“연희야...난 매일 같이 절제해. 아니면 너 이렇게 밖에  나올 걸? 내 집착을 우습게보지 마.”

수현이 진심이라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연희가 시원스레 웃었다. 수현도 그녀에게 마주 웃어주고는 조금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아쉽지만 집에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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