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2화 〉82 (82/94)



〈 82화 〉82

가볍게 하품을 한 수현은 미리 불러둔 콜택시에 올랐다. 앱만 사용하다 콜을 하려니 영 어색했다. 수현은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 택시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감사합니다.”

수현이 짧게 인사를 하고 캐리어를 꺼내 신호등 앞에 섰다. 수현은 혹시 모르는 마음에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자기야!

건너에서는 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의 표정도 덩달아 환하게 변했다.

“혹시 잠 설치다가 늦게 일어나는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아닌  같네. 어디야?”

수현이 약간 놀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는 기분이 많이 좋은지 그저 맑게 웃었다.

-나 지금 지하철 안이야!

연희가 목소리를 살짝 줄이고 말했다.

“벌써?”

수현이 신호등을 건너며 물었다.

-잠은  잤는데, 일찍 일어나져서 그냥 바로 나왔어. 나 8시  넘어서 도착할 것 같은데?

연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빨리 가야겠네.”

수현이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다행히 시간을 딱 맞출 것 같긴 했다.

-천천히 와! 나 구경하고 있을게!

연희는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알았어. 외국인이 번호 물어보면 영어 모른다고 하고.”

수현이 작게 웃으며 말하자 핸드폰 너머로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있다 봐!

수현은 핸드폰을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에 올랐다. 그는 오르자마자 안경을 벗어두고 곧바로 잠을 청했다. 그를 태운 버스는 시원스럽게 도로를 달렸다.

“하암-!”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 수현은 슬쩍 스트레칭을 하고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여름이라고 뜨듯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쾌적하게 변해서 그를 감쌌다. 그는 연희에게 온 문자를 보고 체크인 장소로 향했다. 수현은 장난을 치기 위해 일부러 연희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수현은 카운터 근처에 다가갈수록 홀로 존재감을 뽐내는 연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대단한 미인들이 모두 그렇듯 무표정할 때는 서늘하고 다가가기 힘든 기운을 뿜었다. 어쩌면 연희의 주변에 엄한 인간들이 자주 꼬이는 것은 자신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몸을 낮추고 조금 발을 빠르게 굴려 멀리 돌기 시작했다. 연희는 핸드폰을 힐끔거리며 연락을 기다리는  했다. 수현은 연희의 뒤쪽에서 살짝 숨을 고르고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요.”

수현이 약간 목소리를 달리하며 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연희는 단번에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연희도 멀리서 오는 수현을 눈치채고 있었다. 엉성하게 숨는 모습이 웃겼지만, 연희는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녀는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도도한 표정을 연기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없이 살짝 위아래를 훑는 시선이 말 그대로 여왕님 같았다. 수현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왜 그러시죠?”

연희가 쌀쌀맞은 말투로 그를 향해 말했다. 연희에게 은근히 붙어오던 시선들이 노골적으로 변했다. 아주 흥미로운 영화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음,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알려주실  있을까요?”

수현이 슬쩍 핸드폰을 꺼내 연희에게 건네며 당당하게 말했다.

“죄송한데, 절 언제 봤다고 덜컥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저 그쪽보다 잘생긴 남자친구 있어요.”

연희는 조금 싸가지 없어 보일 정도의 냉정한 말투로 말하며 핸드폰을 슬쩍 밀었다.

수현이 웃음을 참으며 아예 연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주변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뭣하면 미녀를 도와주는 전사가 되려는 남자들도 있는 것 같았다. 수현은 아쉽지만 적당히 끝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음, 혹시 그 남자친구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나요?”

수현이 마치 느와르 영화 주인공처럼 안경을 벗고는 슬쩍 윙크를 하며 말했다. 결국  참으며 연기를 하던 연희가 빵터져 깔깔거리며 웃었다. 약간 긴장감이 있던 분위기도 순식간에 어리둥절해졌다.

“아, 진짜! 적당히 맞춰주려고 했더니! 왜 항상 개그로 끝나는 거야?”

연희는 웃으면서도  한결같다는 표정으로 그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수현이 멋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당겨 안자, 연희는 눈을 흘기면서도 그에게 기대왔다.

“연희야, 나 여기서 더 했으면 너 구하겠다고 주변 남자들 절반은 달려들었을지도 몰라.”

수현이 자신 탓은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연희가 슬쩍 주변을 돌아보더니 작게 웃고는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작게 부볐다.

“으휴··· 내가 너무 예뻐서 어쩔 수 없었구나?”

연희가 수현의 허벅지를 토닥이며 말했다. 수현이 작게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체크인 아직 안 했지?”

“응. 자기랑 같이 해야지. 지금 하자.”

연희가 먼저 일어나 수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둘은 간단하게 체크인을 마치고 출국 심사장을 거쳐 면세점이 즐비한 곳으로 들어갔다. 연희는 즐거운 표정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수현도 느긋하게 뒤를 따라 다녔다.

“와-. 명품매장도 많다···”

연희가 살짝 입을 벌리고 둘러보며 말했다.

“들어가 볼래?”

“아니··· 눈 높아져서 안 돼.”

연희는 가볍게 웃으며 수현의 제안을 거절하고 걸음을 옮겼다. 결국 특별히 살 것도 없던 그들은 구경을 짧게 마쳤다. 둘은 미련 없이 간단한 음료만 사들고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서로에게 바짝 기댔다. 둘은 별 것 아닌 이야기나 여행에서 기대되는 것들을 말하며 웃었고, 서로의 손을 가지고 놀며 즐거워했다. 기다리는 시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일본 오사카/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이스타항공을 이용하시는 고객님께서는 곧 48번 게이트에서 탑승을 시작하오니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수현과 연희는 안내를 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줄을 섰다.

“흠, 아까 선글라스나 하나  걸 그랬다.”

갑자기 수현이 약간 후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선글라스?”

“응. 너무들 힐끔거리네··· 닳겠구만.”

수현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연희는 수현의 허리를  찌르고는 오히려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그 정도로 가려질 미모가 아니라서 어차피 안 될걸?”

연희는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어버렸다. 수현이 진지한 표정을 연기하며 그녀의 말에 심각하게 동의하자, 연희가 더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그를 쳤다.

금세 그들의 차례가 오고 티켓을 확인한 뒤 비행기에 올랐다. 예쁘장한 승무원들의 인사가 이어지고 둘은 가볍게 마주 인사를 하고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들은 재빨리 각자의 가방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흠, 내 남자··· 시선 관리 잘하는데?”

연희가 이리저리 자리 정돈을 하고 있는 수현에게 은근슬쩍 속삭였다. 수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연희를 바라보았다.

“아니··· 예쁜 스튜어디스 언니들 엄청 많았는데··· 여태까지 한 눈을 한 번도  팔길래.”

연희가 약간 기특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현이 헛웃음을 짓고는 연희의 볼을 슬쩍 잡아당겼다. 연희는 괜히 아픈 소리를 냈다.

“아닌데? 사실  몰래 엄청 봤는데?”

수현이 짓궂게 말하자 연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현이 피식 웃으며 손을 놓았다.

“씨··· 요즘 들어서 예쁜 대답이 가끔  나온다?”

연희가 볼을 만지며 볼멘소리를 했다. 수현이 킥킥거리며 웃고는 슬쩍 주변 눈치를 본 뒤에 가볍게 연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안. 그냥 너무 뻔하면 질려 할까봐 그랬지.”

수현이 토닥이며 말했지만 연희는 여전히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출제자의 의도가 확실한 정답이 있는 문젠데, 왜 틀린 답을 내. 연경 과탑 어디 갔어.”

연희가 괜히 밉다는 듯 말했다.

“제일 예쁜 여자친구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랬지~. 혼자 번쩍이더라.”

결국 수현이 웃으며 애교부리 듯 정답을 말했다.

“엎드려서 절 받기야···”

연희가 조금 더 튕기자 수현이 조금  달라붙었다. 결국 수현의 노력에 연희도 피식 웃으며 복수라는 듯이 볼을 꼬집었다. 살짝 비틀기 까지 하는 것이 조금 진심이 담겨있어서 수현은 정말 아픈 소리를 냈다. 그제야 연희는 완전히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수현의 손을 달래듯 잡아왔다.

*

수현과 연희는 착륙하자마자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입국 심사를 받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기내수화물만 가지고 온 보람이 있는 속도였다. 그들은 친절한 아주머니의 안내까지 받아 도톤보리 강 근처에 위치한 작은 호텔에  무리 없이 도착했다.

“아주머니 진짜 친절하시다··· 난 솔직히 아까 어디 팔려 가는 거 아닌가  긴장 했는데···  죄송하다.”

연희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자 다른 사람한테 까지 물어서 그들을 직접 호텔로 데려다 주셨다.  감사하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법하기도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음, 일단··· 체크인 해두고, 간단하게 점심 겸으로 타코야끼 먹고 고베 쪽으로 넘어가서 놀다가 오자. 저녁에 소고기도 먹고.”

수현이 연희를 살짝 잡아당겼다. 연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체크인과 함께 걸리적 거리던 캐리어에서 해방되어 호텔을 나왔다.

“우리 거기 가서 사진부터 찍자! 그···뭐더라? 달리는 사람!”

연희가 팔을 벌리며 신나게 말했다.

“글리코상?”

“응! 그거! 지금 찍고, 저녁에도 찍고!”

연희가 수현의 손을 끌며 말했다. 수현은 연희를 살짝 진정 시켰다.

“타코야끼도 그 근처에 있어. 천천히 가자. 코앞인데, 체하겠다.”

수현이 연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그제야 연희도 조금 진정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사실 전세계의 현대식 번화가가 그렇듯 생각보다 한국과  차이가 없었지만, 묘하게 미세한 차이나 일본어 천지인 부분이 또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여행 첫날은 무난했다. 타코야끼를 먹다가 혀를 데일 뻔하기도 했고, 고베까지 가다가 길을 조금 헤매기도 했지만, 별  없이 즐겁게 여행을 즐겼다.

“흐음, 야경 예쁘다.”

연희는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고 창 밖을 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수현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밖을 보았다. 괜찮은 야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정면을 보는 게 더 좋았다. 그들은 잠시 가벼운 대화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적당히 로맨틱한 분위기에 그들은 가볍게 서로의 손에 입을 맞추기도 하며 웃었다.

“···갑자기 엄마 아빠한테 조금 미안해진다. 시험기간 길게 말하고 와서...”

연희가 살짝 혀를 빼물고 말했다.

“들키면 내가 대신 욕먹을게.”

수현이 연희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 아빠 욕으로 안 끝낼  같은데...”

연희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수현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연희가 피식 웃었다.

“치···이리 건너와. 안아줘.”

연희가 피식 웃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토닥이며 수현을 불렀다. 수현은 군말 없이 그녀의 곁으로 가 가볍게 그녀를 감쌌다. 연희는 조금 자세를 고쳐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들은 잠시  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야경을 바라보았다. 연희가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법 트인 공간이지만 거기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외국 나오니까 대담해졌네.”

수현이 약간 짓궂게 말하며 연희를 더 단단하게 안았다. 연희도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작게 웃었다. 사실 연희는 오늘 공개적인 장소에서도 내내 조금 적극적이었다.

“응···   사람들이라 그런지, 눈치를 잘 안 보게 되긴 하네···”

연희는 쿨하게 인정하고는 다시 한 번 그의 입에 버드키스를 했다. 수현도 그 모습이 꽤 마음에 들어 답장하듯 입을 맞춰주었다. 분위기는 다시 달콤해졌다. 아니, 조금 끈적해졌다.

“음, 이거만 마시고 돌아가자.”

수현이 약간 의미를 담은 눈으로 말했다. 그는 괜히 연희의 입술을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여행 와서도 결국  생각뿐이지?”

연희가 살짝 수현의 볼을 늘리며 말했다. 하지만 수현의 표정은 당당했다.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하네?”

“뭐···나도 그렇다구.”

수현의 말에 연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을 보고 말했다. 수현이 작게 웃으며 잔을 들자 연희가 가볍게 부딪쳐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맥주는 금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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