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81
“우와-! 끝났다!”
연희가 하늘을 바라보고 기지개를 켜며 기분 좋게 소리를 질렀다. 수현이 느긋하게 뒤따라나오며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연희가 뒤를 돌아 수현을 보며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듯 손을 내밀었다. 환한 웃음이 맑은 햇살과 함께 어우러져 하이틴 영화의 한 장면인 것처럼 빛났다.
“왜 이렇게 발걸음이 느려!”
연희가 느릿하게 손을 잡아오는 수현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연희는 수현의 손을 꼭 잡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연희야, 시험 끝나니까 그렇게 좋아?”
수현이 즐겁게 걸음을 옮기는 연희를 보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날이 더웠지만 다행히 드문드문 큰 나무에 가려 뜨거운 정도는 덜 했다.
“응! 자기는 안 좋아? 난 자기 덕분에 시험도 잘 본 것 같고, 장학금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완전 즐거운데! 게다가 바로 방학이고!”
연희는 통통 튀는 걸음으로 신나게 길을 내려가며 말했다. 연희는 아무래도 장학금 부분에서 가장 신이 난 것 같았다. 이런 말을 다른 사람들이 하면 김칫국이겠지만, 솔직히 수현과 연희는 둘 모두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A0 아래로 내려갈 과목은 한 과목도 없었다. 외부 장학금까지 받으면 오히려 등록금보다 더 받을 수도 있었다.
“너 집 내려가야 하잖아. 그게 아쉬우니까 그렇지.”
수현이 약간 아쉽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통통 튀던 연희도 약간 힘이 빠진 듯 했다. 연희의 부모님은 예쁜 딸이 방학에는 집에 내려오길 바라셨다. 솔직히 그건 당연한 것이었고, 안 내려가겠다고 할 명분도 없었다. 연희도 남자친구를 보기 힘들다는 것만 아니었으면 사실 아무런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음, 그래도 쇼핑몰 촬영도 있고 하니까 일주일에 삼사 일은 내려올 수 있을 거야! 촬영 준비 한다고 목요일쯤 올라와서 피곤하니까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내려간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연희가 슬쩍 수현의 팔에 몸을 붙여오며 애교 있게 말했다. 수현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졌다.
“···불효녀네.”
수현이 웃는 낯으로 괜히 밉게 말했다.
“그래서 싫어? 흠, 그럼 뭐··· 촬영만 하고 후딱 올라가야겠다!”
연희도 굴하지 않고 슬쩍 입 꼬리를 올리고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누가 싫다고 했어? 내가 유교 엄청 싫어한다고 말 안 했었나?”
수현이 슬쩍 멀어지려는 연희의 손을 조금 꽉 잡고 끌어당기며 말했다. 연희가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흥! 그럴 거면서 괜히 까불고 있어!”
연희가 금방 숙이고 들어오는 수현을 당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수현이 그 모습도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들은 거의 인적이 없는 길을 가벼운 콧노래를 하며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근데 진짜 신기하지 않아?”
연희가 뜬금없이 말했다.
“뭐가?”
수현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며칠 전만해도 여기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는데, 오늘은 거의 없잖아. 완전 조용하고, 새소리만 들리고. 솔직히 벌써 우리 동네 간 기분도 든다니까?”
연희가 그렇지 않냐는 얼굴로 수현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그렇긴 하지. 뭐··· 대학은 따로 방학식이 없잖아. 알아서 종강하는 거니까. 우리가 시험이 좀 꼬여서 늦어서 그렇지 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신입생에게는 꽤나 생소한 광경일 것이다. 알아서 종강하고 알아서 개강한다. 종강총회나 뭐 그런 것들이 있긴 해도 의무적인 참석은 아니다. 실제로 금요일에 종강총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촬영과 시험공부로 참석하지 않았다.
“헤헤, 뭐 그래도··· 종강이 늦어서 이런 조용한 분위기에 자기랑 걸을 수 있었네.”
연희가 긍정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수현이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여름임에도 뽀송뽀송함을 유지하는 피부가 기분 좋은 촉감을 주었다. 수현의 입맞춤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 연희도 답장하듯 수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안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지었다.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고 흐뭇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연희야, 그럼 우리 여행 가기로 한 거··· 일본으로 가는 거다?”
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연희가 집으로 내려가기 까지는 일주일 정도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수요일부터 2박이나 3박 정도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시험결과에 따라 어디로 갈지 정하기로 했는데, 오늘 그들은 누가 봐도 장학금을 왕창 받을 수 있는 성적을 받았다.
“아··· 나 외국 패키지 아닌 건 처음인데··· 잘 갈 수 있을까?”
연희가 약간 몸을 굳히며 말했다. 생소한 경험이라 약간 겁이 나는 것 같았다. 수현이 귀엽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뭘 무서워 해! 우리 밀입국 하는 것도 아닌데.”
수현이 약간 놀리듯이 말했다.
“치··· 자기는 혼자 가본 적 있다며? 난 처음이란 말이야!”
연희가 살짝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엣헴! 그럼··· 나만 따라와. 우리 연희, 오빠 믿지?”
수현이 부담스러운 복학생 톤을 연기하며 연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연희가 그건 아무리 너라도 좀 깬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수현도 다시 팔을 내리고 연희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방금··· 많이 별로였어?”
수현이 약간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연희가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음, 난 귀여웠는데, 다른 사람이면 좀 싫었을 정도?”
연희가 살짝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녀는 손에 깍지를 끼고 다시 통통 튀는 걸음으로 학교를 나섰다.
“그럼, 일단 카페 가서 항공권 찾아보자. 너랑 지금 둘만 있는 곳 들어가면, 나 내일이나 노트북 열 것 같거든.”
수현이 연희를 근처 카페로 끌며 약간 속 뜻을 담고 말했다. 그의 말에 연희는 크게 웃었다. 이젠 이런 말이 부끄럽다기보단 그냥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연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현의 엉덩이를 작게 두드렸다. 그녀의 행동에 수현도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들은 서로를 귀엽다고 생각하며 신호등을 건너 카페로 향했다.
*
둘은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두고 바짝 붙어 앉았다.
“집에서 여권은 가져왔지?”
수현이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저번에 내려갔을 때 가져왔어. 나 오늘 가져왔는데. 볼래?”
연희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여권 사진이 보통 영 못나게 찍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응. 보자.”
수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조그만 수첩 같은 것을 꺼냈다. 겉이 민트색이었는데 빳빳한 것이 아무래도 최근에 산 여권지갑인 것 같았다. 수현이 그걸 보고 작게 웃었다.
“뭐야, 왜 웃어?”
연희가 여권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번에 여행 안 갔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여권지갑까지 예쁜 걸로 해뒀는데.”
수현이 여권을 받아 들고 지갑 디자인을 확인하며 말했다. 꽤 심플하면서도 색감이 화사한 것이 연희와 잘 어울렸다. 수현의 말에 연희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기말 시험을 한창 칠 때만해도 해외여행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굴더니, 사실은 기대감과 자신감이 가득했던 것이다.
“헤헤. 공부 가르쳐준 선생님이 누군데! 사실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 그래도 막 처음부터 너무 잘난 체 하긴 좀 그렇잖아. 괜히 부정 탈 수도 있고.”
연희가 밝게 말하며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수현도 사실 걱정하진 않고 있었다. 그는 슬쩍 연희의 어깨를 감쌌다.
“열어 봐도 돼?”
수현이 연희에게 슬쩍 묻자, 연희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수현은 여권의 인적사항 부분을 펼쳐 보았다. 여권사진임에도 전혀 흐트러짐 없는 미모를 뽐내는 연희의 사진이 떡 하니 박혀있었다.
“와··· 진짜 굴욕 사진이 나오질 않네.”
수현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연희는 그의 칭찬에 만족스럽게 웃으면서도, 부끄럽다는 듯 허리를 살짝 찔러왔다.
“내 여자친구라 그런 게 아니라, 진심 대단하다··· 연희야, 넌 출입국심사 가서도 여자한테만 받아야겠다. 남자는 번호 안 알려주면 안 들여보내 준다고 할 것 같아. 알았지?”
수현이 주접을 떨자 연희가 크게 웃었다. 엄청 간지럽긴 한데, 기분은 좋았다.
“아, 나 남자친구 아니고 매니저로 보면 어떻게 하지? 응?”
수현이 그녀의 웃음에 몸을 붙이며 한 번 더 능글맞게 말했다. 연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수현을 슬쩍 밀고 그만하라며 타박했다. 수현이 알겠다는 듯이 몸을 슬쩍 물리며 웃었다.
“흠, 그럼 한 번 찾아볼까?”
수현이 연희에게 여권을 돌려주고 인터넷을 켜며 말했다.
“근데, 이렇게 인터넷으로 찾는 사이트가 더 싸? 너무 늦게 예약해서 비싼 거 아닌가?”
연희도 화면을 보며 약간 걱정스럽게 말했다.
“음, 땡처리라고 오히려 며칠 남기고는 더 싸게 나오는 것도 있어. 그리고 호텔도 알아보고, 여행사 자유여행도 알아보고 해서 제일 저렴하게 하면 돼. 일본은 여행사에서 호텔이랑 항공권 대량 계약해서 파는 게 많아서 그게 더 쌀 때도 있거든.”
수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검색을 시작했다. 연희는 조금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현이 검색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조금 긴 시간을 들여 여러 곳을 검색한 뒤, 숙소와 비행기를 예약했다.
“와··· 자기 덕에 이번에 혼자 해외 여행 가는 법은 제대로 안 것 같아.”
연희는 카페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며 즐겁게 말했다. 원래 여행이라는 게, 비행기 타기 전 까지가 제일 즐거운 법이었다.
“다음엔 유렵 여행 도전해보자.”
수현이 즐거워하는 연희를 보고 덩달아 즐거워하며 말했다. 연희가 크고 맑게 웃었다. 다음이라는 단어가 참 기분 좋게 들렸다.
“그럼 그 다음엔?”
연희가 살짝 눈웃음을 짓더니 물어왔다.
“미국?”
“그 다음은?”
“호주?”
“그 다음은?”
연희가 일부러 아이처럼 계속 물어왔다. 수현이 슬쩍 장난기 어린 연희의 눈을 바라보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어딘가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다음은··· 김연희에게 떠나는 여행이지. 자, 선택해. 기내식을 먹고 갈래? 아니면 바로 직항으로 갈래?”
수현이 결국 신촌의 모텔 버뮤다 바로 근처에 멈춰 서서 연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연희가 작게 떨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음, 먹고 가자. 이 눈 좀 봐··· 이대로 가면 나 한 시간도 못 버티겠다.”
연희가 고개를 저으며 슬쩍 수현의 손을 끌었다. 한동안 참은 수현의 모습이 꽤나 혹사당할 것 같은 분위기라 그녀는 휴전을 선택했다. 수현이 살짝 눈을 흘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