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6화 〉76 (76/94)



〈 76화 〉76

*

수현은 탈의실에서 먼저 나와 연희를 기다렸다. 수현이 최종적으로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 스파가 있어서였다. 호텔의 야외 스파는 조경도 좋았고, 무엇보다 바다 정면이라는 위치 때문에 따듯한 물에 들어가 있으면 바다와 연결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수현은 슬쩍 하늘을 보았다. 서쪽으로 충분히 넘어가고 있는 해는 조금씩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기야...”


수현은 어색하게 자신을 부르는 연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조금 얌전한 디자인의 비키니를 입고 있는, 하지만 얌전하지 않은 몸매를 가진 연희가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예쁘다...”

수현은 연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연희는 어색하게 그의 손을 잡아왔다. 연희는 처음 입어보는 비키니가  어색한 것 같았다. 스파에는 비수기임에도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사람이 있었는데, 연희를 본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연희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연희는 약간 그 시선이 불편한 것 같았다.

“연희야, 진짜...  보면 옷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돼...”


수현이 약간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뭐가...”

연희가 어색하게 말했다.


“옷 디자인이 얌전해도, 네가 입으니까 하나도 안 얌전하잖아.”

수현이 연희를 사람이 없는 쪽의 따듯한 탕 안으로 이끌며 말했다.

“야아!... 부끄럽게...”


연희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렇게 싫지는 않은 얼굴을 했다.

“흐음. 어쨌든 물 안에만 있게 해야겠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 눈이 따라오네!”

“치...”

수현의 말에 연희는 슬쩍 눈을 흘기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조금 불편했지만, 수현이 그걸 걱정해주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음, 자기야. 저기 봐. 노을 엄청 예쁘다. 방에서 봤던 거랑 또 느낌 다르다!”

연희는 슬쩍 탕의 앞쪽으로 향해 벽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앞에 붉게 물들고 있는 하늘이 가리는  하나 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흐흐흐. 이거 보여주고 싶었어.”

수현이 뿌듯하게 말하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멋진 광경이긴 했다. 하지만... 수현은 촉촉하게 물에 젖은 연희를 바라보았다.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이 하늘에 펼쳐진 장면보다도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크흠. 근데 자긴  계속 나만 봐...”

연희가 그의 뜨거운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싫어?”


수현이 낮게 속삭였다.

“아니, 좋아...”

연희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사실대로 말했다. 수현의 시선이 다른 어디에도 닿지 않는 것이 기뻤다. 큰 가슴을 뽐낸 여자도, 늘씬한 다리를 자신 있게 드러낸 여자도, 심지어  태양도 그의 시선을 잡아 두지는 못했다.

“이리와 봐. 여기 이렇게 기대서 보면 바다랑 연결  것 처럼 보여.”


수현이 연희의 손을 잡아 슬쩍 뒤로 끌어 탕의 벽에 기대게 했다. 연희는 그를 따라 몸을 움직여 등을 기댔다.

“와-. 그러네... 되게 멋지다...”

연희가 감탄을 내뱉으며 노을 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현은 그녀가 그렇게 순수하게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좋았다. 수현이 뿌듯한 미소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도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그녀도 눈을 피하진 않았다. 노을 빛을 받아 짙은 그림자가 진 수현의 얼굴이 그의 분위기를 조금 날카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자기야, 고마워.”

연희는 결국 눈을 살짝 돌리고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더 보다가는 여기서 그에게 입을 맞춰버리고  것 같았다. 수현이 살짝 연희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들은 잠시 멍하게 노을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기대 있는 사이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고 해는 이제 거의 다 저물어있었다.


“조금 작은  가볼래? 해도  저물었는데.”

수현이 은근히 쏠리는 시선에 연희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음, 마저 보고 가면  될까?”


하지만 연희는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현은 잠깐 멈칫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도 해가 저물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하늘이 완전히 까맣게 되었다. 조금씩 들어오던 조명들은 이제 어둠 속에서 스파 전체를 아기자기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제 다른 곳도 조금 가보고 방에 가자.”

연희가 작게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들은 탕을 나와 조금 작고 조명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이 몇  있었지만, 아직 자리는 여유가 있었다.

“와-. 예쁘다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런 노천탕 같은 거 집에 만들고 싶다.”

연희가  주변의 조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연희 돈 많~이 벌어야겠네.”

수현이 어린 아이 같은 꿈을 말하는 연희의 말에 피식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치... 왜 나만 많이 벌어, 자기도 많이 벌어야지!”

연희는 슬쩍 그의 옆구리를 찔러오면서 말했다.

“푸하하하! 뭐야, 방금. 지금 프러포즈 한거야?”

수현이 그녀의 말뜻을 알아채고 크게 웃으며 물었다.


“흥. 몰라아.”

연희가 조금 토라진 척을 하며 주변을 괜히 다시 둘러보았다.

“음...그럼 난 결혼 선물로 아예 이런 호텔 하나 사줄게. 어때?”

수현이 그녀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진짜로 계획대로만 된다면, 아니 계획에 반만 성공해도, 몇 년 안에 아예 호텔 그룹을 인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푸핫! 진짜... 말은...”

연희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수현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와? 오빠야 한 번 믿으봐라! 호텔은 아예 니 앞으로 해주께!”


수현이 갑자기 거들먹거리 경상도 사투리를 영 어색하게 연기를 하며 말했다.


“꺄하하하하! 그게 뭐야아!”

연희가 수현의 어색하지만 능청스러운 연기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조금 더 집중 되었다. 수현은 믿지 않는 연희를 보며 여유 있게 미소 지었다. 진짜로 해주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했다.


“정말... 귀엽다. 귀여워! 이걸 허세라고 해야 돼? 아니면 사기결혼이라고 해야 돼?”

연희가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킬킬거리며 말했다.

“음... 사랑? 아닐까? 엘, 오, 브이, 이?”

수현이 능청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하자, 연희가 다시 크게 웃었다. 그녀는 수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연희야, 그렇게 너무 붙어오면...  일어나기 좀 힘들어지는데?”


수현이 자신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킥킥거리는 연희에게 작게 속삭였다. 연희는 웃음보가 터진 건지 그 말에 다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가 진정하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수현도 입에 작게 미소를 걸고 그녀의 웃음이 잦아  때 까지 기다렸다.

“으휴,  웃었니?”


“흐흐흐. 응...프흡.”

연희가 여전히 웃음기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참...  것도 아닌 걸로 잘 웃는다. 응?”

수현이 연희의 머리를 뒤로 넘겨 정리해주며 말했다.

“프흡. 자기가 웃기잖아.”


연희는 눈꼬리를 살짝 닦아내며 대답했다.

“뭐? 마! 니 내 말이 우습나? 으이?”


수현이 다시 엉망인 사투리 억양으로 인상을 웃기게 구기며 역정을 내듯 말했다.

“꺄하하하하! 자기야, 이제 그만! 제발!”


연희가 거의 잦아들었던 웃음을 다시 터뜨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아무래도 수현은 연기 쪽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고마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


수현이  작게 연희의 귀에 속삭였다. 연희가 거의 죽으려고 했다.

“...이제 진짜 안 할게. 우리 연희 이런 거 좋아하네.”


수현의 말에도 연희는 반박하지 못하고 웃음을 참느라 몸을 떨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정보다 조금 늦게 탕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연인의 후끈한 밤이 지나고, 둘은 늦은 아침을 시작했다.


“어제 빵 사두기를 잘했지?”


연희가 테라스에 앉아 빵을 자르며 상쾌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응. 아이디어 좋았어. 역시 똑똑해.”

수현이 커피 두 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오며 말했다.

“엣헴! 비싼 방인데! 아주 뽕을 뽑아야지!”


“푸핫! 그래.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 커피 받아 봐. 우유 가지고 올게.”

수현이 커피 두 잔을 넘기자 연희가 썰던 케이크용 칼을 내려두고 냉큼 받았다.


“음, 자기 이건 별로라고 했지?”

연희가 다른 빵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어? 아, 응. 너무   같아서.”


수현이 냉장고로 향하다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연희는  빵은 자신의 앞에 두었다.


“그럼 자기가 이거 더 먹어.”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빵을 하나 들었다.

“응. 알았어.”


수현이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며 말했다.

“오케이! 세팅 끝! 자기야, 빨리 와! 경치 좋다아!”

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바닷가를 둘러보며 말했다. 수현이 피식 웃으며 냉장고 내부를 쓱 확인하고 발로 슬쩍 밀어 닫았다. 그가 우유를 들고 다시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오~. 우리 자기 멋있네!”

연희가 걸어 나오는 수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 취향의 셔츠와 바지 조합이었다.

“푸흡. 너도 엄청 예뻐.”


수현이 밝은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러자 연희가 커피잔을 들고 다리를 꼬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 올렸다.

“흠-. 어때?”


연희가 커피 향을 맡는 듯한 포즈를 취하곤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수현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크흡. 예뻐. 도도한 것도 좋다.”

“치, 뭐야, 근데 왜 웃지?”


연희가 표정을 풀고 웃는 얼굴로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당연히 김연희가 좋으니까 웃지. 우유 따라 줄까?”

“응. 고마워.”


수현이 연희의 컵과 자신의 컵에 우유를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이 경치에 김연희까지 있으니까 최고네... 루브르  가도 되겠어.”

“푸흡! 야아! 진짜아!”

연희가 우유를 마시다가 갑작스런 그의 주접에 사례가 들린 듯 콜록 거렸다. 그녀가 재빠르게 냅킨으로 입을 막았다.

“미안. 너무 예고도 없었나?”

“켁, 켁! 으휴...진짜 저 입!”

“때리고 싶어?”

“큼! 응... 확! 입술 박치기 하고 싶네.”

연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얼른 해도 되는데... 요기 약간  닦였네.”

수현도 기분 좋게 웃으며 연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둘은 잠시 짧은 키스를 나눴다.

“하-. 쪽! 이제 진짜 식사 하자!”


연희가 입을 떼고 가볍게 도장을 찍듯 마무리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둘은 시원한 바다를 배경 삼아 간단한 식사를 했다. 빵은 평범했지만, 배경과 함께 하는 사람이 워낙에 좋았기에 그들은 호텔 주방장의 요리를 먹는 것보다 더 행복한 식사를 했다.


*

“자기야. 다 챙긴 거지?”

연희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응. 방금  둘러봤어. 화장실에도 놓고 가는  없지?”

수현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며 말했다.

“응! 여기도 깨끗!”

“그럼 나가자. 체크아웃 시간 거의 다 되어간다.”


“응!”

수현과 연희는 방을 전부 확인하고 카드를 뽑고 방을 나섰다. 복도는 청소를 하는지 청소용 수레가 멀리 보였다.

“자기가 호텔 사주면 우린 스위트룸에서 살까?”


연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객실 팔아야 돈이 들어오지! 우리 연희 아직 경영학도가 덜 됐네!”

수현이 어제의 일이 생각나 작게 웃으며 말했다.

“호텔 사줄 정도면... 스위트룸 방값 정도야 내주지 않을까?”


연희가 슬쩍 수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말했다.


“뭐어? 와... 호텔도 사줬는데, 스위트룸  값도 달라고? 저기... 혹시 장래희망이 강도세요?”


수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자 연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둘은 그런 농담따먹기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그들은 체크아웃을 하고 잠시 객실 확인을 기다렸다.

“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객실 확인 잘 끝났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까지 편안한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프론트 직원이 작게 미소지으며 허리를 숙여 그들을 배웅했다. 수현과 연희는 즐거움 반, 아쉬움 반으로 호텔을 나섰다.

“하-. 뭔가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렇다아.”

연희가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럴 때가 여행 끝내기 딱 좋은 때라고 그러더라. 다음에  오자. 다른 곳도 가보고.”


“그런가? 그래도 아직 우리 시간 좀 있지?”


“응. 백사장 좀 걸을까?”

“어쩜 이렇게 내 맘을 잘 알까?”

연희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바로 김연희 전문가입니다.”

수현이 없는 안경을 고쳐쓰는 척하며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

“푸하하하! 응, 인정합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천천히 백사장으로 향했다. 여행 내내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짐 먼저 보낼 수 있는  알았으면 올 때도 그렇게 할  그랬다.”


연희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뭐,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잘 됐지. 시간 좀 여유 있으니까, 저기 동백섬까지 둘러보고, 저기서 바로 가자. 그러면 시간 충분할  같아.”


“그럼 더 좋지!”


연희가 기분 좋게 통통 튀는 걸음으로 수현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그들은 동백섬까지 올라가 사진과 추억을 남겼다.


"음, 여기 동백꽃 까지 피었으면 진짜 예뻤을 텐데. 아쉽네..."

연희가 못내 아쉬운지 나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김연희가 꽃 대신 하지 뭐."

수현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진짜! 완전 느끼해!"

연희는 약간 인상을 찡그렸지만,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간 것을 감추지는 못했다.

"이제 그냥 적응하시지?"

"아, 진짜. 오늘 따라  심한  같은데? 아침을 외국식으로 해서 그런가?"

연희가 조금 타박하듯 말하면서도 기분 좋게 수현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응. 버터 발라 먹어서 그래. 아, 연희야. 여기 서봐. 사진 한 장만  찍고 가자."


수현이 약간 말을 돌리며 말했다.


"나...꽃받침 할까?"

연희가 피식 웃으며 나무 쪽으로 걸어가더니 턱아래 손을 대며 말했다.


"크하하하! 응. 예쁘다."


수현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깨가 타는 수준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고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종종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눈을 찌푸리다가도, 연희의 미모를 보고는 이해는 된다는 듯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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