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72
*
수현은 바쁜 일요일을 예상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운동과 토토의 산책을 마친 그는 깔끔하게 몸단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하...”
수현이 카페 앞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 주변을 살폈다. 소현이는 일찍 나와 있었다.
“소현아.”
수현이 가볍게 소현을 부르며 앞에 앉았다.
“...결국은 이렇게 되네요...”
소현이 빨갛게 된 눈으로 말했다.
“... 너한테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수현이 말을 고르다가 결국 그렇게 말했다.
“너무해요...”
소현이 울먹이며 말했다. 수현은 왜 여태 자신은 이 아이의 마음을 몰랐는지 신기했다. 심지어 단 한 번 본 연희도 안 것 같던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네가 원하면 내 친구들 중에 좋은 애들 중에 추천해줄 수 있어.”
수현은 소현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말했다. 모질다고 할 수 있지만, 어차피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것 때문 아니에요...”
소현이 결국 말을 했다.
“...미안해.”
수현도 진지하게 말했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방금 알았어...”
“하...”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어차피 안 될 거... 알았어요. 그래도... 나 때문도 아니고, 언니 때문에 이렇게 된 건 너무 억울해요.”
소현이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하고는 싶더라구요. 저 쌤 좋아해요.”
소현이 결국 입 밖으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 미안해.”
수현은 요 며칠사이 어쩐지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쌤이 일찍 알았어도, 의미 없었겠죠?”
소현이 허탈하게 말했다.
“... 네 맘이 깊어지기 전에 끊을 수는 있었겠지...”
“그건 지금 너무 잔인한 말이에요...”
소현의 물기 어린 말에 수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만족했는데...”
소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사랑은 순수했다. 정말 학생 때 할 수 있는 선생님에 대한 동경. 그래서 수현도 더 미안했다.
“쌤, 친구 중에... 누구 추천해줄 수 있어요?”
소향이 한참 만에 말했다.
“여자앤데, 착해. 너랑도 잘 맞을 거야...”
수현이 소영을 떠올리며 말했다. 소영은 자신이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 소개시켜주세요.”
“꼭 할 필요는 없어.”
“그러는 편이 쌤도 마음이 더 편하지 않겠어요?”
소현이 약하게 훌쩍이며 말했다.
“네 의견이 중요하지.”
“저도 하고 싶어요. 쌤 친구는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가끔 소식 전해들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소현이 뒷말을 삼켰다.
“그래... 월요일 원래 수업시간에 시간 비워둔다고 했어...”
수현이 무겁게 말했다.
“네...”
대화는 다시 끊겼다.
“그럼... 가보세요. 전 마시던 거 마저 먹고 가고 갈래요...”
소현이 억지로 말했다. 수현도 그 마음을 알았지만, 더 있어봐야 상황만 나빠질 뿐이다.
“그래...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네...”
“그럼,,, 가볼게.”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시 입을 뗐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무언가 말을 해봐야 개선될 것이 없는 사이였다. 그는 천천히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현은 그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겼으나, 수현은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카페문에 달린 작은 종이 소현의 첫사랑의 끝을 알리듯 작게 울렸다. 소현은 머리를 떨궜다.
*
수현은 강남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해결은 했지만, 깔끔한 맛은 아니었다. 입이 텁텁했다.
수현은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갤러리아 명품관에 들렀다가 가면 적당히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
수현은 백화점에 들러 에르메스에서 넥타이 하나 구매하고 교환권까지 챙겨 H주택단지로 들어섰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애매한 선물은 아예 안 하는 게 나았다. 그렇다고 덩그러니 몸만 갈 수도, 아주 비싼 선물을 사 갈 수도 없었다. 수현의 생각에 제일 적당한 느낌이었다.
수현은 담벼락 높은 집들 중에서도 제일 고급스러운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까만 대문은 관리가 잘 되어 반질거리는 윤기가 있었다. 그는 숨을 내뱉고 가볍게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는 의외로 평범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수현이 슬쩍 문을 밀고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자 널찍한 잔디가 있는 마당이 보였다. 해가 지면 조명으로 더 예쁘게 보일 것 같았다.
“야!”
민형이 현관문을 열고 걸어 나오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수현도 손을 살짝 들어 인사했다.
“야... 집 어마어마하다. 축구 가능하겠는데.”
수현이 픽 웃으며 민형에게 말했다.
“미친놈...오바는. 들어가자. 야, 근데 무슨...에르메스 사온 거야?”
민형이 수현이 들고 있는 것을 보더니 뭘 이런 것 까지 사왔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새꺄, 그럼 친구네 집 초대 받았는데, 맨몸으로 오냐? 이 새낀 상도가 없어...”
수현이 혀를 차며 말했다.
“미친 새끼...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야... 야,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우리 아빠가 좀 집요해도 좀만 참아주라.”
민형이 좀 찝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돈 던져주시냐? 내 아들이랑 헤어져. 이렇게?”
수현이 봉투를 던지는 척 하며 말했다.
“아, 시발! 진짜 이거 미친 새끼네... 넌 드라마를 끊어야 돼.”
민형이 기분 잡쳤다는 표정으로 수현을 노려봤다. 수현이 킥킥거렸다.
“야, 20살들 걸음이 뭐 이렇게 느려! 빨리 안 들어 오냐!”
주형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주형의 외침에 빠른 걸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현관부터 대리석이 아낌없이 쓰인 것을 보고 수현은 민형을 향해 작게 엄지를 올려보였다. 민형이 인상을 썼다.
수현은 고개를 돌리다 중문 앞에 나와 있는 남자를 보고 작게 놀랐다가 곧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음, 자네가 황수현인가? 생각보다도 훤칠하구만. 반갑네. 내가 민형이 애빌세.”
머리를 뒤로 넘기고 몸관리를 열심히 한 듯한 장년의 남성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수현이 얼른 그 손을 마주잡아 악수를 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수현은 곧바로 거실로 안내되어 소파에 앉았다. 널찍한 거실은 남자 네 명이 앉아도 휑할 정도였다.
“아직 식사 준비가 좀 덜 되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큰 건 아니지만 빈손으로 오긴 뭐해서... 작게 준비했습니다.”
수현은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다행히 민형의 아버지는 고맙다며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무거운 주제들은 아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탁은 호화로우면서도 정갈하게 세팅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꽤나 똑똑하다고 내 들었는데, 장래희망은 따로 정해둔 게 있나?”
민형의 아버지는 중간 중간에도 종종 날카롭게 수현을 떠보곤 했는데, 어느 정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 일단은 학교 공부에 집중하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등학교 때는 그저 대학을 목표로 공부만 했었습니다. 어차피 제 재능은 공부 쪽이니 대학에 와서 찾아보자...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주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민형의 아버지는 썩 마음에 드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살다보면 느끼겠지만, 항상 멀리 볼 필요가 없어요. 분기점까지 가는 큰 길을 잡았으면 그때부턴 앞만 보고 가면 되는 건데, 계속 딴 짓이나 하고 저 멀리만 보면서 가니 다들 사고가 나는 거거든.”
민형의 아버지가 기특하다는 듯 말하면서 술병을 들었다. 수현이 작게 동의하며 얼른 잔을 들었다. 분명 뼈가 있는 말이었다.
“나도 뭐 내 아버지께서 닦아놓으신 길 따라 온 입장이지만, 내 길이다 생각하고 고민 없이 쭉 달려오니 그만큼 좋은 게 또 없어. 멀리 보는 것도 때가 있는 거고, 길에 올랐으면 달릴 땐 앞만 봐야지. 그리고... 좋은 길이 눈앞에 있는데, 돌아가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지.”
민형의 아버지는 모두의 잔을 다 채워주고 가볍게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슬쩍 자신의 자식들에게 눈짓을 하는 것이, 너희들도 잘 들어두라는 표정이었다.
뭐, 둘의 스타일을 보니 이리저리 튕겨나간 적이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했다. 주형은 무슨 이야긴지 알아들었으니 그만하시라는 표정이었고, 민형은 아직 조금 반항이 남은 표정이었다.
“어이쿠, 거 내 새끼들이지만, 눈빛 한 번 살벌하다. 이젠 이 애비 머리도 깰 거냐?”
민형의 아버지가 픽 웃으며 말했다. 민형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가볍게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다.
“뭐... 민형이 이놈이 그래도 새 친구는 잘 사귄 것 같구만. 전에 온 놈들은 영 비리비리해서 똘마니 같은 애들만 줄줄이 달고 다니는 꼴보고 걱정이 많았는데, 눈빛도 괜찮고 생각도 마음에 들어.”
민형의 아버지가 수현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들은 호화로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서 가볍게 술을 조금 더 마셨다.
얼마 후, 민형의 아버지와 주형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서재로 들어갔다. 수현은 민형과 마당에 나와 잠시 테이블에 앉았다. 잘 가꿔진 조경이 은은한 조명과 만나 예쁘게 빛났다.
“하-.”
민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네가 한숨을 쉬냐...”
수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새꺄... 네가 우리 아빠를 몰라서 그래... 전에는 거의 취조하는 수준이었는데... 야, 넌 좀 그래도 진짜 맘에 들었나보다. 다른 새끼는 운 적도 있어.”
민형이 맥주를 한 캔 건네며 말했다.
“다행이네. 아, 아닌가. 돈 봉투를 못 받았으니...”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하고는 캔을 땄다. 시원하게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 씹! 진짜... 뒤진다.”
민형도 툴툴거리며 캔을 땄다.
“야, 근데 이런 마당 관리하려면 얼마나 드냐... 존나 예쁘네.”
수현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가 어케 알어...아빠도 잘 모를 걸?... 근데 넌 뭐 알 필요 없지 않냐? 서민이?”
민형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농담조로 말했다. 하도 수현이 재벌 재벌 거리니 종종 저런 소리를 했다.
“야, 넌 가끔 그 재수 없는 소리만 안 하면 친구 더 사귈 수 있을 거다. 하암-. 그나저나 여기 있다가 우리 집 가려니까 현타오네...”
수현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한소리를 하고는 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와?”
민형이 되물었다. 아무래도 이 시절에는 없던 말인 것 같았다.
“아...현실 타격. 저 거실 크기면 우리집 거실이랑 부엌 합쳐도 안 될 걸.”
수현이 대충 설명하며 넘어갔다.
“병신... 차 시간은 되냐? 맞춰가라. 안 재워준다.”
민형이 슬쩍 시간을 보며 물었다.
“정 없는 새끼...이제 슬슬 가봐야지. 내일부터 또 오전 수업인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수현은 민형과 한 캔을 더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형의 아버지께서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 인사 없이 가도 된다고 했기에 수현은 민형의 배웅만 받으며 집을 나섰다.
수현은 길을 걸으면서도 강남에 이렇게 고즈넉한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는 천천히 높은 담벼락을 둘러보며 역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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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넌 어때 보이더냐?"
법무법인 태양의 실질적 오너인 김강훈은 자신의 첫째 아들을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저번에 본 것도 그렇고... 말하는 거나 행동 보면, 똘똘하고 괜찮습니다. 뭐 콩고물 얻어먹으려고 들러붙은 것 같지도 않고. 민형이 상태도 많이 좋아 보여요. 저랑 다르게 어릴 때부터 여린 놈이었잖습니까. 전 다행인 것 같은데요."
주형이 술을 한 잔씩 따르며 말했다. 어린 동생의 불안정 했던 감정은 거의 평생을 따라 다녔다. 좋은 애인을 만나면 그래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했지만, 친구로 그게 채워질 줄을 몰랐다. 물론 얼마 전에 본 여자친구와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했다. 어쨌든 항상 걱정이던 동생이라 한시름 놓은 기분이 들었다.
"뭐...아직 어린놈이라 그럴 수도 있지."
강훈은 아주 믿지는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쁘게 보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들은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그렇긴 하죠."
주형이 씁쓸하게 말했다. 자신도 그런 쪽으로 상처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 그건 뭐 그렇다고 치고. 결혼식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냐?"
강훈이 방향을 돌려 주형에게 물었다.
"네..."
"내가 이런 말 하면 너희들이 비웃는 건 안다만, 그래도 좋은 가정을 꾸려라."
강훈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마당에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겁니다."
주형이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다음 인사이동 때는..."
강훈이 고개를 돌려 주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그건..."
주형이 조금 격양된 말투로 강훈의 말을 끊었다.
"녀석아. 어차피 네가 이 애비 그늘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태양 후계자 딱지는 어딜 가나 붙어. 애비 말대로 해."
강훈이 달래듯이 말하면서 남은 술을 들이켰다.
"...네."
주형도 남은 술을 들이키고 작게 대답했다.
"자고 갈 거냐?"
강훈이 약간은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집이 코앞인데요. 가정에 충실해야죠."
주형이 결국 약간 빈정거리듯 말했다.
"이 놈이나 저놈이나... 애비 품을 못 벗어나서 안달이구나. 알았다. 좀만 더 마시고 가."
강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애증의 아버지였다. 넘치는 사랑에 숨이 막히곤 했다. 주형은 급하게 술을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