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70
*
벌레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수현과 연희는 말없이 서로에게 기대있었다.
“우리도 참 잘나서 문제다...그치?”
한참 만에 연희의 입에서 한숨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화 풀렸어?”
수현이 나직하게 물었다.
“몰라... 근데 그냥 자기 탓하고 싶진 않아... 일단 그게 그 여자가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연희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끊어내질 못 했어. 미안해.”
수현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실토했다.
“그래. 그건 맞아.”
연희가 수현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아파?”
연희가 물었다.
“괜찮아.”
수현이 조용히 말했다.
“아프냐구. 괜찮은 게 아니라.”
연희가 재차 물었다.
“...아파.”
“멍청이.”
“응.”
수현의 대답에 연희가 잠시 생각을 고르는 듯이 말을 멈췄다.
“...그래도 좋아.”
한참 만에 연희가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
연희는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기분 어떻게 풀어줄 거야?”
“...모르겠어.”
수현이 우물거리다가 작게 말하자 연희가 픽 웃었다.
“그거 알아? 자기 입에서 모르겠다는 말...처음 나온 거?”
“그랬나...”
“응. 그랬어.”
연희는 뭔가 조금 기분이 좋아진 듯 말했다.
“그것도 모르지?”
연희가 자신이 꼬집었던 수현의 손을 들어 가볍게 문지르며 나직이 물었다.
“뭐를?”
“그런 모습들이 때론 불안하게 했다는 거.”
“그런 모습?”
“응. 여유로운 거. 뭔가 다 잘 아는 것 같은 거. 뭐든 혼자서 잘 하는 거.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거.”
연희가 수현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냥, 내가 필요 없어 보일 때가 있었어. 웃기지? 열등감 같기도 하고... 질투 같기도 하고...”
연희는 천천히 속에 있던 말을 더 꺼냈고, 수현은 말이 없었다.
“근데 이런 허당 같은 모습 보니까, 뭔가 사람 같아 보여.”
“난 항상 너 보면서 그랬는데...”
“내가 예뻐서?”
연희가 짓궂게 말했다.
“그것도 있고, 언제나 밝아서. 혼자도 잘 빛날 수 있는 것 같았어.”
수현이 연희의 말에 동의하면서 천천히 말을 했다.
“그래서... 오늘 네가 화내는 모습, 소유욕 넘치던 모습이 좋았어.”
수현이 말하자 연희가 피식 웃었다.
“우리도 참 멍청이다.”
연희가 수현의 손을 들어 입을 맞췄다.
“응. 그러네.”
수현이 연희의 손을 들어 입을 맞추며 말했다.
“바보.”
둘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진짜 잘나서 문제였네...”
연희가 말하며 수현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수현이 그녀의 어깨를 꽉 감쌌다.
“나 어떻게 풀어주는지 알려줘?”
연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응. 알려줘.”
“일단, 사과는 그만 해. 할 거면 사랑한다고 해.”
“사랑해.”
수현이 즉시 말했다.
“세 번 더 말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여덟 번 웃어 봐. 나 보고.”
수현이 연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비밀번호 486...
“이제 한 번.”
연희가 엄격하게 말했다.
“오늘 아직 안 끝났잖아.”
수현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좋아. 두 번. 그럼 그 이후는 뭔지 알지?”
“여섯 번은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참아 봐.”
“벌이야?”
“응. 내일부턴 늘려줄게.”
수현은 가볍게 연희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진하지도, 아주 가볍지도 않은 애정 어린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제 한 번. 오늘 안에 채워.”
“응.”
수현이 연희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둘은 서로의 온기를 조금 더 느꼈다.
“근데, 진짜 과외 관둬도 괜찮겠어?”
연희가 불쑥 말했다.
“응. 내일 알려줄게.”
“알려줘?”
“응. 알바 안 해도 되는 이유.”
“...그래.”
“응. 고마워.”
그들은 그 자세에서 조금 더 있다가 산을 내려왔다. 그들은 연희의 자취방까지 말없이 손을 잡고 걸었다. 하지만 올 때처럼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축제의 둘째 날이자, 옵션 만기일인 목요일은 늦잠과 함께 시작되었다. 화들짝 깨어난 연희는 시간을 보곤 약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수현의 품에 다시 들어갔다.
“뭐야... 일어났으면 깨웠어야지...”
연희가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나도 일어난 지 얼마 안 지났어. 이렇게 된 거 그냥 더 있다가 주점이나 가자.”
수현이 연희를 단단하게 안으며 말했다.
“와, 나 늦잠자다가 학교 안 가는 건 또 처음이야...”
“좋은 경험이네...”
수현이 보드라운 연희의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근데, 애들 보기 좀 부끄럽다...”
연희가 부끄러움에 중얼거리며 수현의 품에 파고들었다.
“철판 깔자.”
“될까?”
“해봐야지...”
둘은 부끄러움에 키득거렸다.
수현과 연희는 마치 주말처럼 뒹굴거리며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늦은 김에 서로의 몸을 더 탐했고, 느긋한 시간을 즐겼다.
“배고프다.”
지친 듯이 누워있던 연희가 중얼거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수현이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여기서 야한 대답하면 큰일 나겠지?”
연희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걸 굳이 묻는 이유는 잡아먹어달라는 건가?”
수현이 연희를 껴안았고, 연희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꼬르륵.
그리고 둘의 배에서 동시에 소리가 울렸다. 둘은 얼굴을 맞대고 키득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현과 연희는 가까운 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신촌으로 향했다.
“아, 맞다. 알바 안 해도 되는 이유!”
연희는 연희동의 한 카페에서 느긋하게 수현의 손을 가지고 놀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시간이... 음, 딱이네.”
수현이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HTS를 켜고 계좌를 확인했다.
1천50만 원에 샀던 STX 풋옵션은 2억3천8백만 원이 되어있었다. 기아차 주식도 그 사이 25퍼센트 가량 올라서 3천2백만 원이 되어있었다.
수현이 계좌를 연희에게 보였다.
“이...이게 뭐야?”
연희가 숫자를 세보더니 당황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2월부터 지금까지 과외로 번 돈으로 재투자해서 번 돈.”
수현이 자신감 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2억...6천만 원을... 네 달 동안 벌었다고?”
연희가 어질한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응.”
“말도 안 돼...”
“수익률 장난 아니지?”
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연희는 여전히 믿지 못 하는 눈빛으로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 학교 수업을 왜 그렇게 쉬워했는지 알겠다...”
한참 만에 연희는 허탈한 듯 말했다. 투자의 귀재가 옆에 있었다.
“하... 과탑이 중요한 게 아니었네?”
연희가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른하게 자신에게 설명해줄 때, 스터디를 할 때도 혼자 여유를 부리고도 죄다 쉽게 설명해줄 때, 솔직히 조금 얄미운 느낌도 있었다. 근데, 이제는 그런 기분이 전혀 안 들었다.
“멋있어?”
“몰라... 이게 말이 되는 수익률이야?”
“멋있다고 해줘 봐.”
수현이 연희를 끌어안고 말했다.
“나 아직 꿈인 것 같아...”
“아~. 말해줘...”
수현이 작게 애교를 피웠다.
“멋있어... 내 남자 대단해.”
“이유로 충분해?”
“넘쳐서 문제지...”
연희의 말에 수현이 만족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말로만 듣던 엄친아가 옆에 있었네...”
연희의 혼잣말에 수현이 더 즐겁게 웃었다.
수현은 연희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근데, 학생한테 좀 미안하긴 하네...”
연희가 충격에 지친 듯 수현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가 찝찝한 말투로 말했다.
“응... 그래도 난 네가 더 중요하니까. 일단 과외 자리 넘겨 받을만한 애 알아봐야겠어.”
수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마음을 잡은 듯 했다.
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연적들에게 기회를 계속 줄 만큼 자신이 착한 여자는 아니었다.
“강민이 어때? 집도 그리 안 멀고... 아니면 소영이한테 물어볼까?”
연희가 머리를 굴리다가 얼른 말했다.
“아, 소영이한테 먼저 물어보는 게 낫겠다... 일단, 그쪽 소현이랑 부모님께도 말을 좀 해야겠지만...”
“응...”
“오늘 부모님께는 먼저 연락드리는 게 낫겠다.”
그 뒤는 생각보다 일사천리였다. 아니, 소향의 부모님으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소향이 집에 가서 무슨 땡깡을 부렸는지, 그녀의 부모님도 대충 상황을 아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전화 건너 소향의 어머니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저도 죄송합니다... 제가 아예 처음부터 단호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제 딸 성격을 제가 모르나요... 근데, 소현이한테는 선생님이 연락 좀 주시겠어요? 많이 의지했는데... 그래도 직접 연락해 주시는 게 저희 딸한테 좋을 것 같아서요...-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현이는 주말이라도 따로 시간을 좀 내서 만나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수현은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안 어른들은 되게 좋으시네...”
“응... 그래서 좀 죄송하네.”
수현이 가볍게 연희를 토닥이며 말했다. 둘은 잠시 더 그렇게 서로를 토닥이다가 주점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판... 알지?”
“...해볼게.”
둘은 약간 얼굴을 붉히고 서로에게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