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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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타이밍을 놓친 둘은 밀려든 인파에 다시 주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 잠깐 연희랑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급한 주문은 끝낸 수현이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야.”
수현이 연희의 손을 끌었다. 연희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수현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따라 나왔다.
“연희야...”
“저 여자... 어떻게 여기 온 거야?”
연희가 화를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봤대... 미안해.”
“엄청... 예쁘네.”
“너보단 아니야.”
수현의 빠른 대답에 연희가 말없이 그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후... 해결 된 줄 알았더니...”
“미안해... 한동안 마주치지 않아서... 포기한 줄 알았어.”
둘은 잠시동안 다시 말이 없었다. 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희야...”
수현이 연희의 손을 슬쩍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다행히 그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느 때처럼 꼭 맞잡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화나...”
연희가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어떻게...할 거야?”
연희가 수현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과외... 그만 둘게. 그리고 저 누나도 빨리 보낼게.”
수현이 곧바로 말했다. 연희가 여전히 수현의 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수현은 조급함을 숨기며 기다렸다.
“...그냥 그 쪽으로도 가지마. 무시해... 둘이 대화하는 것도 보기 싫어...”
연희가 수현을 끌어당겨 허리를 껴안고 말했다. 아이가 어리광을 피우는 듯한 느낌처럼. 강렬한 소유욕이 그녀의 말에 달라붙어 있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수현은 오히려 그런 점에 짜릿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 여자가 오면 내가 퇴치할 거야. 넌 말도 섞지 마.”
연희가 더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응...”
“대신 넌 그 변태한테 나 지켜.”
연희가 다짐을 받아내겠다는 듯이 말했다.
“응. 지킬게.”
“멍청이... 매일 잘난 척은 다하고... 저런 여자 하나 못 떨어뜨리고 와? 오늘은 좀 실망이야.”
연희가 칭얼대듯 말했다. 실망이란 단어가 수현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미안해...”
“... 과외 진짜 그만둬도 돼?”
“응. 이제 상관없어.”
수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연희는 수현을 조금 더 토닥이기만 하고 달리 말은 없었다.
“...나 지금 너무 소유욕 심해? 집착하는 것 같았어?”
“아니. 더 해줘도 돼.”
둘은 서로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키스해 줘.”
연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현이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연희를 떨어뜨리고 입술을 맞댔다. 둘은 서로에 대한 갈증을 채우듯 입을 맞췄다.
“엄마 말 틀린 거 하나 없네... 얼굴 값 엄청 해.”
연희가 툴툴거리면서도 조금 차분해진 말투로 수현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
“씨... 다 내껀데...”
“맞아.”
둘은 잠시 그렇게 더 감정을 추스르고 천막으로 향했다.
“오! 커플! 이리 와봐! 이리!”
수현과 연희가 들어오자마자 눈치 없이 그들에게 손짓을 하는 것은 당연히 방이현이었다. 그 사이 방이현의 동기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와 봐! 선배들 소개시켜줄게!”
방이현이 외치듯 말했다.
“나 혼자 갈게.”
수현이 연희를 향해 중얼거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수현이 테이블에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야, 네 여친도 오라고 해. 왜 혼자 오냐.”
방이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번 일로 제 여자친구가 불편해 해서요.”
수현이 날카롭게 말했다.
“야, 그 땐 내가 미안하다니까. 남친 있는 줄 내가 알았냐? 여기 테이블 다~ 사회 나가서 필요한 사람들이다. 여친도 데려와. 술 한 잔 하면서 오해도 풀고, 친해지면 좋잖아?”
“그래. 인마. 얘기 들어보니 그땐 얘가 좀 실수하긴 했는데, 사과할 기회는 줘야지.”
나머지 둘 중 하나가 말했다. 보아하니 전의 민형이 따까리를 하던 애들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민형도 그대로였다면 이런 애들 줄줄이 달고 다니면서 왕 노릇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약간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제 여친도 싫어하지만, 저도 싫어서요. 저한테 볼 일 없으신 거면 가보겠습니다.”
수현이 등을 돌렸다.
“아, 요즘 애들 참 뻣뻣하네. 네가 뭐 쟤 인생 책임져 줄 거야? 사회에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데. 어?”
따까리 두 명 중 하나가 말했다.
수현은 힐끗 그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나, 근데 싸가지가!”
앉아있던 방이현이 벌떡 일어나며 수현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거기, 선배님. 그만 합시다.”
뒤쪽에서 교복을 입고 소영의 손을 잡고 나오던 민형이 외치듯 말했다.
“너, 너...”
방이현이 움찔하며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내 친구 건드리고 싶으시면 나랑도 한 판 뜨시던가. 3대1은 좀 그렇잖아요. 응? 3대2는 돼야지.”
민형이 소영의 손을 놓고는 수현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너, 야, 넌 우리 쪽이지...인마...”
방이현이 손에서 힘을 풀며 말했다.
“내가요?”
“그, 그래... 사회 나가서 쟤들이랑 우리랑 같은 줄 알아?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방이현이 민형의 반존대에 분노하면서도 쩔쩔매며 말했다.
“그렇게 치면 댁이랑 나랑도 다르지. 안 그래? 보니까 내가 누군지는 알아본 것 같은데... 사이즈가 다르잖아... 아하, 이럼 되겠네. 다들 나랑 한 잔 하죠. 친해지면 댁들 인생에 도움 되는 사람 아닌가? 내가?”
민형이 그들의 테이블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수현아, 젤 비싼 안주들로 해서 좀 주라. 선배님들이 중요한 사람 만나서 쏘실 것 같은데.”
민형이 테이블 위에 맥주랑 소주를 들고 말면서 말했다.
“야...”
“됐어. 난 우리 선배님들 술 좀 말아드려야겠다.”
민형이 거의 소주만 가득한 잔을 방이현의 앞에 두며 말했다. 근처에 있던 강민이 오케이 젤 비싼 안주!를 외치며 안쪽으로 달려갔다. 방이현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드시죠. 후배가 말아드리는 겁니다. 황수현, 너도 한 잔만 하고 가라.”
민형은 맥주만 가득 두 잔을 따라서 말했다. 명백한 네편 내편을 가르는 도발이었다. 방이현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덤벼들지 않았다.
“짠!”
민형이 술을 들고 말하자, 남자 다섯이 컵을 맞대고 들이켰다.
“황수현, 이 쪽 주문도 좀 받아라!”
수현이 컵을 내리자 병훈이 바쁜 척을 하며 외쳤다. 수현이 민형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내며 뒤를 돌았다.
수현은 한숨을 돌렸지만, 등을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소향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산 넘어 산이라는 것이 딱 지금이었다.
*
소향은 친구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보아하니, 저 남자 쪽은 수현의 여자친구 쪽을 탐내는 것 같았다.
“재미있네...”
소향이 게임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녀도 당황하긴 했다. 생각보다 수현의 여자친구는 어마어마하게 예뻤다. 자신이 인정할 정도로.
“야, 너 오늘은 성공하겠냐? 여친이 장난 아닌데?”
“하, 아까 둘 분위기 못 봤냐? 트러블 생긴 것만 해도 오늘 거 절반은 했어.”
소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둘 사이 믿음이 깨지는 것만 해도 괜찮은 성과였다. 천하의 박소향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었다.
“넌 진짜, 내 친구지만 좋은 년은 아니야.”
“그건 인정.”
소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확도 있네. 하긴 저 정도 얼굴이면 남자가 안 꼬이기 힘들지.”
소향이 기분 좋은 얼굴로 술을 따르며 말했다. 보지 않아도 계속 자신을 주시하는 연희의 눈길이 느껴졌다.
딩동댕동!
“쉬는 시간입니다! 십 분간 마음에 드는 테이블에 소주 한 병에 천원으로 마음을 담아 보내세요!”
부회장의 말에 소향이 작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굳이 냉장고 주변의 사람에게 소주 한 병을 달라고 해서 손에 들었다.
“같이 마실래?”
소향은 소주를 수현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주변의 시선들이 그들에게 쏠렸다.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그만 하죠.”
“왜? 그냥 술이나 한 잔...”
“저기요.”
수현과 소향의 사이에 연희가 끼어들며 둘을 갈랐다.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제 남자친구라서요.”
연희는 정말로 수현이 소향과 말 섞는 것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수현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래 봐야 체구가 작은 연희를 수현이 뒤에서 감싸는 느낌이었지만, 그 모양새가 은근히 소향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냥, 난 순수하게 지인으로 왔으니 술 한 잔 하자는 건데? 너도 저기 부르는 곳 있는 것 같던데...가보던지.”
소향이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두 여자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주변은 하라는 헌팅은 하지 않고, 이 싸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남의 연애사 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었다.
“... 그쪽 동생 때문에 이러는 거죠?”
연희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이 소향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
“뭐?”
“동생 기분 나쁘라고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러고 살아요? 가족한테?”
연희는 소향과 소현의 관계에 대해 듣고, 얼마 전 소현의 눈빛을 보면서 느꼈던 것을 확신하며 그대로 말했다. 그리고 연희의 말이 소향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소향의 친구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향에게는 민감한 단어였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이 미친년이 어디서 가족을 들먹여?”
소향이 소주병을 들었고, 수현이 재빨리 그 병을 잡았다.
“이거 안 놔?”
소향이 외쳤지만, 그녀의 소주병은 수현의 손에 쉽게 넘어갔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수현이 분노로 스산하게 말했다.
“뭐, 뭐?”
“소현이 때문에 그래도 참고 넘어갔는데, 이젠 못하겠네. 누구 앞에서 함부로 소주병을 들어? 당신 미쳤어?”
수현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의 눈은 정말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소향은 그 눈빛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
소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오한이 드는 듯한 느낌과 피냄새 같은 것이 진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천막 아래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수현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품에 끌어당겼던 연희의 어깨를 조금 더 단단하게 잡았다.
“나가요. 또 예고도 없이 나타나면 그 땐 그냥 안 있을 거니까.”
수현의 말에 병훈이 다가와 수현의 어깨를 잡았다. 수현의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게 느껴졌다.
“야...”
병훈이 나지막하게 수현을 불렀으나 반응이 없었다.
회장인 미현이 얼른 소향을 끌었다. 그녀는 약간의 공포와 분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끌려갔다. 소향의 친구가 얼른 자리를 정리해 일어났다.
“니...니들...”
소향이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녀의 친구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얼른 소향을 천막 밖으로 끌었다. 수현의 분위기가 정말 더 했다가는 큰일이 터질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는 수현 쪽 홈이었다. 좋을 것이 없었다.
소향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회장과 부회장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