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67 (67/94)



〈 67화 〉67

수현은 대충 옷을 낑겨 입고 방을 나왔다. 그는 문을 닫기 전에 웬만한 호텔 침대는 평범한 수준으로 만들어버릴  같은, 넓고 안락했던 고급스러운 침대를 돌아보았다. 파란색의 체크무늬가 인상적인 침대였다. 수현은 돈을 벌면 침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 브랜드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방문을 닫았다.

수현은 안방을 나와 고요하고 햇살  드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예상과 다르게 주형이 혼자 사는 집이었는데, 그의 성격을 말해주듯 심플한 디자인으로 고급스럽게 마감이 되어있었다. 헤링본 스타일의 짙은 원목 바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딸칵-.

복도 끝 쪽의 방문이 열리고 민형이 배를 부여잡고 나오다 수현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아무래도 어제 어린 아이처럼 울던 게 쪽팔린 눈치였다. 수현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병신...일어났냐?”

수현이 작게 킬킬거리며 말했다.

“어... 여...여기 있었냐?”

민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수현이 방에 안 보이자 집에 간 줄 알았던 것 같았다.

“너희 형님이자고 가라고 하던데?”

수현이 턱으로 안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형이? 그럼 형은?”

민형이 당황한 얼굴로 묻더니, 쫄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너 침대에다 내려놓자마자 토해서 그냥 안방 주시고 본집 가셨어...”

수현이 말투는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놀리듯이 입에 손을 대고 토하는 척을 했다.

“씨...씨발....”

민형이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억이  건지, 아니면 그냥 쪽팔림만 몰려온 건지는 모르지만 귀까지 빨갛게 되어있었다.

“나랑 형님이랑  치웠다. 감사해라. 개새꺄. 그거 치우느라 술 깼네...”

수현이 큭큭거리며 말했다. 주형은 민형과 나이차이가 많아서 그런지 의외로 동생을 잘 돌보는 것 같았다. 하긴 10살이 넘게 차이가 나면, 애가 애를 키운다고 했다. 재벌집들은 싸우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쪽은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형이  일방적으로 동생을 보살피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하....좃됐다. 시발... 이거로 한 삼년은 놀리겠는데...”

민형이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감쌌다.

“뭔 개소리야. 평생 놀림감이지, 병신아.”

수현이 킬킬거리며 민형에게 말했다. 무슨 서당개도 아니고 3년뿐인지.

“아...씨발...! 우리 형 말하는 거야... 너...씨발...딴 데 가서 말하면 뒤진다...”

민형이 강민이나 병훈이 같은 경우가 생각이 났는지 후다닥 외쳤다.

“쳐보든가! 좁은 링에서도 한 대를 제대로 못 맞추는 새끼가 입은 살았죠?”

수현이 본격적으로 민형을 놀리며 말했다.

“아... 시발....내가 미쳤지... 또라이  명을 엮어놨네...."

민형이 후회를 하며 중얼거렸다. 수현이 킬킬거리며 다시 토하는 척을 했다.

"후... 야, 지랄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뭐 먹을래?”

민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차피  끌고 나가봐야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형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안방까지 내준 걸 보면 마음에  든  같은데, 둘이서 같이 지랄이라도 했다가는...자신은 뭘 할  있는 게 없었다. 헤비백과 똑같았다.

“흐흐흐. 야, 라면 있냐? 해장은 라면인데.”

수현이 주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쪽은 매트한 회색 계열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라면이 있을 것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현은 일단 물어보기는 했다.

“우리  집에 그런  없을 걸...”

민형이 약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와...씨. 역시 재벌은 다르다 이거냐?”

수현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민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미친 새끼야...그게 아니고 형 약혼녀가 그런 거 보면 다 내다버려서 그런 거야... 우리  오짬 매니아야...뭔... 아씨 야, 그냥 해장하게 짬뽕 시킬래?”

민형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수현은 어쨌든 재벌집 약혼녀네 집은 라면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야, 그래도 양주가 좋긴 한가보다... 그렇게 처먹고 토하고 지랄해도 다음날 음식 땡기는  보면.”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아, 시발! 먹을 거야 말거야, 씹새야...”

민형이 민망한 듯 욕을 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흐흐흐흐. 야, 근데 여기도 배달 오냐?”

“아, 씹!”

민형이 한 번만 더 했다가는 핸드폰이라도 던지겠다는 듯이 수현을 쏘아보았다.

“아, 알았어, 새꺄! 흐흐흐. 난 짬뽕. 탕슉 까지 시켜. 이건 내가 삼.”

민형은 궁시렁 거리며 능숙하게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했다. 수현이 그 모습을보고는 아차 했다. 생각해보니 이때만 해도 배달어플이 없었다. 그는 잠시 자신이 써둔 사업리스트에 배달어플이 있었나 떠올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암-. 야, 얼마나 걸린데?”

수현이 주문을 마친 민형에게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 뭔가 이런 집에서 짬뽕에 탕수육을 시켜 먹는다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30분.”

민형이 소파  쪽에 핸드폰을 던지며 앉고는 티비 리모컨을 들었다.

“강남도 그건 똑같구만.”

수현이 중얼거렸다.

“진짜 병신인가...”

민형이 고개를 저으며 티비를 켰다. 토요일 오전이 그렇듯 별로  건 없었다.

“아, 맞다. 야, 어제 형님이 너 오늘 가족모임 잊으면 죽인다고 하고 나가셨거든? 알아서 잘 가라?”

수현이 채널이 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아... 어차피 저녁이야. 여기 좀 더 있다 가야지...”

민형이 다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집 개 좋다.... 여기가 그럼  형님 신혼집? 그런 거냐?”

수현이 재미없는 티비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보며 물었다. 작은 산의 나무들이 보였다. 잔잔한 경치였다.

“여기? 아니... 형 약혼녀가 청담동 고집해서 새로 지은 무슨 빌라로 들어가고, 여긴 형 나가면  들어오려고.”

민형이 무슨 재방송에 채널을 고정하고는 리모컨을 소파에 대충 던지며 말했다. 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태연한데, 일반인이 듣기에는 골때리는 내용이었다.

“와....시발, 갑자기 신분차이 느껴지네. 존나 시민혁명 하고 싶다.”

수현은 아직 일반인이었으므로, 그에 충실하게 감정을 표출했다.

“또라이새끼... 근데, 아직 아빠가 허락  해줘서  몰라...”

그들은 소파에 반쯤 누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배달을 기다렸다. 정말 30분을 딱 맞춰 배달 온 음식은 역시 평범한 배달음식 맛이었다. 수현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그럼 난 간다. 학교에서 보자.”

“엉. 가라... 안 나간다.”

민형이 포만감에 소파에 몸을 반쯤 묻고 손만 까딱여 인사했다.

“예의 없는 새끼. 쉬어라.”

수현도 가볍게 욕을 해주고 돌아 나왔다. 주차장에는 콰트로포르테 바로 옆에 있던 페라리 f430이 없었다. 아무래도  차가 주형이 본가에 타고 간 차 같았다. 수현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슬쩍 다시고 밖으로 나왔다.

*

수현은 아직은 조금 서늘한 밤공기를 맞으며 토토와 산책을 하며 공원을 걸었다. 수원에서 올라온 막내삼촌 가족이 자고가기로 해서 집 거실에서는 가벼운 술자리가 이어졌고, 그 틈을 타 사촌동생들은 피시방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중요한 연락을 해야 했기에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자주 쉬는 의자에 도착하자 토토가 자연스럽게 앉아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은 토토를 안아 의자에 올렸다. 그는 의자에 엎드린 토토를 쓰다듬으며, 슬쩍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응! 자기야.

건너에서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금방 받네... 기다렸어?”

수현의 표정이 따듯하게 풀렸다.

-당연하지!  그래도 내가 할까 했는데. 오늘은 시간 되는 거야? 아주 나 없을 때 마다 바쁘셔서!

“미안...”

-장난이야. 근데... 청담동 술집은 진짜 예쁜 사람들 그렇게 많아? 막 연예인도 우글우글 하다며!

연희가 킬킬거리며 물었다. 너무 정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수현이 그 노골적이고 귀여운 물음에 크게 웃었다.

“음... 김연희가 기준이면 예쁜 사람은 없다고 봐야지. 연예인 중에도 없던데?”

수현이 웃으면서도 진심으로 말했다.

-나 그렇게 예뻐? 막 연예인보다도? 막 아무도 안 보이고 그래?

연희도 깔깔거리며 말했다. 서로에게만 귀여운 행동이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응. 후-. 역시... 김연희가 최고더라.”

수현이 진지한 말투를 연기하며 말했다.

-꺄하하하하하!

연희가 티없이 맑은 소리로 청량하게 웃었다. 그녀의 뒤로 누군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보니 그녀도 밖인  같았다.

“연희야. 너도 밖이야?”

-응... 동생이 나한테 시끄럽다면서 막 욕했어. 혼내줘.

연희가 작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가족들이랑 다 같이 나간 거야?”

수현이 약간 부러운 느낌이 들어 괜히 돌을 발로 슬쩍 굴리며 물었다.

-응.  좋아서 뒷산 산책!

연희는 다행히 그의 울적함을 느끼지는 못했는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  많은 곳?”

수현이 항상 그녀가 강조하던 그곳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응! 별 엄청 많은데, 하나 따다줄까?

연희가 놀리듯이 말했다.

“음, 아니... 그냥 김연희 하나만 오면 돼....

-왜? 내가 별처럼 빛나서? (와-! 김연희! 미쳤냐!)

연희의 말 뒤로 이번엔 꽤나 선명한 욕이 들렸다. 막 변성기가  듯한 남자 중학생 특유의 억양이 느껴졌다. 수현이 크게 웃었다. 연희가 민망한지 동생에게 저리가라며 역정을 내는 것이 들렸다.

-뭐야! 자기는 왜 웃어! 자기야, 저게 누나한테 반말 하고 미쳤냐고 한  들었어? 진짜 저거 기저귀도 내가 갈아줬는데!

연희가 부끄럽다는 듯이 목소리 톤이 높아진 채로 다다다 말을 뱉었다.

“아...흐흐흐. 뭐... 사이좋은  같아서 좋아보이는데 뭐....”

-씨...사이좋기는...지 맘대로 몰래 옆에 와서는... 분위기 깨고 있어! ... 저게 아직 누나가 운동하는 걸 잘 몰라서 그래... 좀 있다 죽었어!

연희는 아직 조금 민망함이 덜 식은 톤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현이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러지 마... 근데, 부모님은?”

수현이 작게 그녀를 말리며 물었다.

-그쪽은 저~ 멀리서 우리보다 더 하니까 걱정 마. 아마 여태까지 별 만개는 땄을걸....

수현은 그녀의 동생이 좀 측은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래도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잠시  느끼한 말과 달달한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그들은 하루 동안의 소소한 일들을 말하기도 했고, 때론 주변을 살피고 은근슬쩍 야한 농담을 흘리기도 했다. 이젠 그 모든 것들이 부끄럽지만 자연스러운 것들이 되었다.

-엄마랑 아빠 내려온다. 얜 어디 갔지... 삐져서 도망 갔나...

연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왜? 동생 없어졌어?”

-응... 괜찮아. 옆쪽으로  하나  있거든. 거기 있을  같아.

“아... 그럼 조심해서 집 가고. 알았지?”

-걱정도많아. 우리 아빠 사진 못 봤어? 아직도 현역이야!

연희는 전혀 걱정 없다는 듯이 말했다. 부모님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깊다는 것이 티가 났다.

“사진 보니까김연희랑 결혼할 남자는 좀 고생이긴 하겠더라.”

수현이 동의하며 웃었다.

-괜찮아! 그 남자가 장모님은 꽉 잡아둬서.

연희는 조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크하하하! 장모님?”

-치...그럼 아냐? 뭐라고 할 거야, 그럼?

연희가 약간 서운하다는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수현이 달래듯이 동의했다.

-그치? 아,  진짜 가야겠다. 아빠가 부른다.

연희가 약간 아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알았어.”

수현도 약간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자기도 그럼 조심히 들어가?

“응. 알았어.”

둘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수화기 너머로 작게 입맞춤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현은 전화를 끊고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나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토토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리 옆에서 보조를 맞췄다.

띵-.

문자가 온 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본 수현이크게 웃고 말았다. 내용이 꽤나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ㅋㅋㅋㅋㅋ자기야! 내 동생 완전 웃겨! 지 여친한테 우리가 하던 거 써먹고 있었어ㅋㅋㅋㅋㅋ-

수현은 그녀의 집이 꽤나 유쾌한 집안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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