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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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희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거울을 보았다. 오늘부터는 수현과 제대로 캠퍼스 커플다운 시험기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촬영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를 이리저리 넘겨보다가, 신발장 위에 올려둔 유리병을 들고 그 안을 바라보았다. 유리병 안에는 말린 장미가 예쁘게 정리 되어 들어있었다.
“흐음-.”
실제로 꽃내음이 나지는 않았지만, 연희는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그때 그 순간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향기가 방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 들었다. 연희는 그렇게 잠시 그 때의 기억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음, 말려두길 잘했다. 응.”
연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병을 살포시 내려두었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는 드라이플라워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연희는 오늘따라 그 점이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다시 거울을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도 괜찮은 느낌의 얼굴이었다. 연희는 현관문을 나와 시간을 확인하고는, 놀란 얼굴이 되어 빠른 걸음으로 역을 향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조금 지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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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연희가 빠르게 달려 올라오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달리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약속 시간에 좀 늦었다고 후다닥 뛰는 것이 귀여웠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중간에 책을 놓고 온 것을 깜빡해서다시 방에 갔다 오는 바람에 그녀는 30분가량 늦어버렸다.
“괜찮아. 뭘 뛰고 그래. 수업 늦은 것도 아닌데.”
수현이 연희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더 중요한 건데...”
연희가 말하자, 수현은 그 말만으로 만족한다는듯이 연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연희가 약간 민망한 웃음을 지으면서 수현의 옆으로 바짝붙었다.
둘은 중앙도서관까지 가벼운 이야기들을 하며 걸었다. 둘 모두 걸음걸이가 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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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공부를 끝낸 둘은 간단한 점심을 먹고 중앙도서관으로 돌아왔다.
“흐아암!”
수현이 기지개를 크게 켜고는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마실까?”
수현이 가볍게 제안했고,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털컹!
자판기에서 음료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여기.”
수현이 캔을 꺼내 하나를 연희에게 건넸다.
“고마워! 잘 마실게!”
연희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약간 큼직한 상의 때문에 소매 끝으로 손가락만 살짝 나온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수현은 그녀가 모양 좋은 자그마한 손으로 캔을 따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연희는 여자 치고는 키가 약간 큰 편이었지만, 손발은 그에비해 자그마한 편이었다.
“뭐야아. 왜 그런 눈으로 봐.”
연희가 캔을 따고 수현을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응? 내가 뭘?”
“아니, 무슨 약간... 우리 애기 다 컸네. 그런 느낌인데? 아빠가 딸 바라보는?”
연희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뭔가 진짜 싫다기 보다는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장난스런 느낌이었다.
“뭐 좀 비슷하긴 한데? 왜, 싫어?”
“싫다기 보단... 뭔가 어린애 보는 느낌이라 그렇지!”
연희가 조금 더 듣고 싶은 대답 쪽의 힌트를 던졌다.
“음... 김연희.”
하지만, 수현도 순순히 대답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일부러 연희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수현은 연희가 자신의 어떤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왜, 왜.”
연희가 살짝 당황했다.
“귀 대봐.”
수현의 얼굴에 장난기 많은 악마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왜...”
“크게 말해?”
“아, 알았어.”
연희가 약간 머뭇거리며 수현 가까이 다가왔다. 수현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유지한 채,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쓸어 올려 귀를 드러나게 했다.
능숙하게 손가락으로 살짝 귀를 스치는 것이 연희를 작게 움찔하도록 만들었다.
“연희야.”
수현이 그녀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다시 작고 낮게 연희를 부르며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흣!”
불시의 습격에 연희가 약하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놀란 연희가 몸을 뒤로 물리려 하자, 수현이 잽싸게 그녀의 몸을 잡아 끌어안았다.
“아빠는 딸한테 이런 거 하고 싶어지지 않지. 난 방금도 너 귀여워서 야한 짓하고 싶어졌는데... 이게 어린애보는 시선이야?”
수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연희를 끌어안고 작게 속삭였다.
“아니...나,난 그냥 괜히 투정 한 번 해본 건데...”
연희가 괜히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적당히 장난치려다가 훅 들어온 남자친구의반격에 놀란 듯 했다.
“넌 나 놀려 먹으려면 아직 한참 일러.”
“씨...”
“한 백년 쯤 사귀면 그 땐 져 줄게.”
수현이 약간 분하다는 듯이 올려다보는 연희에게 말했다.
“치... 그때면 결혼을 했어야지. 왜 사귀기만 해.”
연희가 괜시리 투덜거렸다.
“그럼 둘 다 하면 되지 뭐. 더 좋네.”
둘은 서로를 보며 픽 웃고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근데, 우리 이러고 있으면 또 한 소리 나오겠다...”
연희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신경 쓰인다는 듯이 말했다.
“연희야. 저기를 봐. 솔직히 저 옆에도 끌어안고 있는 건 똑같은데? 솔직히 우리가 잘나서 그런 말들 나오는 거야. 안 그래? 그러려니 해.”
수현도 이젠 너만 잘났어가 아니라 우리가 잘났어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나름대로 상당한 발전이었다.
“요즘은 자뻑도 잘 하고! 우리 자기도 많이 컸네!”
연희가 피식 웃으며 수현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말했다.
“뭐, 그리스에선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뽑았고, 한국에선 김연희가 나를 뽑았잖아. 그러니까 인정해야지 뭐.”
수현이 뭐 어쩔 수 있냐는 투로 말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둘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정도면 귀여운 자뻑이었다. 그리고 사실, 누가 봐도 그럴만한 커플이었다.
“그만 들어갈까?”
“응. 나 조금 있다가 모르는 거 물어봐도 돼?”
“그럼 아예 카페로 갈까?”
“음, 아니. 카페는 있다가 저녁 먹고 가자. 지금은 개인 공부 더 하고.”
연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수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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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과 연희는 도서관에서 개인 공부를 마치고 근처 카페에 앉아있었다. 본격적인 시험기간에 들어서서 그런지 카페는 공부와 팀플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연희는 틀린 문제나 궁금했던 것들을 가져와 수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어차피 1등은 힘든 거, 1등에게 지식을 훔쳐가겠다는 꽤나 생산적인 모습이었다.
“이건 말장난 문제네. 넌 당기초 가격 구했는데, 여기선 당기말 가격을 물어본 거구."
수현이 피식 웃으며 문제를 가리켰다.
“아! 그러네... 왜 못 봤지?”
“너무 숫자에 몰입한 거지 뭐.”
연희는 가끔 엉뚱하게 틀린 문제를 보면 화가 난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는데, 수현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가르쳐 주는 내내 즐거울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학생들은 둘 다 가르치는 맛이 있었다.
“어, 경영대 부부. 여기 있었냐?”
수현이 한창 즐거운 얼굴로 연희를 가르치고 있을 때, 옆에서 그들을 아는 채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젠 아예 부부냐?”
수현이 불청객들을 향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연희도 그들을 돌아보며 반갑게 손을흔들었다.
“김연희, 올만?”
“아오, 황수현, 김연희 그만 좀 붙어 다녀라. 안 질리냐?”
“야이 새끼들아, 컵홀더 좀 들고 가라. 물 존나 흐른다고! 어, 니들도 여기 있었냐?”
민형, 병훈, 강민이 수현과 연희를 보고는 다가오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소영은 보이지 않았다.
“니들은 셋이 사귀냐? 볼 때마다 붙어있는데.”
수현도 반갑게 말을 돌려주었다. 아직 민형과 소영이 사귄다는 언급을 하지 않아서, 수현과 연희는 여전히 모른 척을 하고 있었다.
“아, 미친 새낀가... 우린 팀플 때문에 왔지. 와, 그거 아냐? 병훈이 저새끼 존나 구멍이야... 술자리에선 사회도 보는 놈이 발표 나가서 턱 덜덜 떠는 거 보고... 하... 난 담번엔 팀플 없는 과목으로만 간다.”
강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너희 셋이 팀이야?”
“아니. 두 명 더 있는데, 한 명은 아버지 입원이고, 한 명은 할아버지 병문안.”
민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데, 둘이 사귐. 느낌 오지?”
다들 허탈하게 웃었다. 대학생이 팀플을 하면서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무임승차문제였다.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은 밍기적 밍기적 비어있는 수현과 연희의 옆 좌석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펴기 시작했다.
“야, 니들 왜 여기서 하냐. 저리가. 저기가 더 넓어.”
수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세 명을 향해 말하자, 연희가 그를 작게 타박했다.
“니들이 전세 냈냐? 그리고 우리 가면 둘이 뭐하려고?”
“그렇지. 우리가 너희 공부에 집중하게 도와주는 거야. 고마워해라.”
삼인방은 콧방귀를 뀌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들은 수현에게 하던 거 하라는 듯이 손을 작게 저었다. 그러더니 정말 그쪽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셋다 노트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니들 내가 시험 끝나고 링 올린다.”
“녜, 녜, 녜. 그러시던지요.”
수현이 경고했지만, 셋은 귀를 후비며 대충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에 연희가 피식 웃으며수현을 톡 쳤다. 그녀는 볼펜으로 문제 하나를 톡톡 건드렸다. 결국 수현도 작게 웃고는 불펜을 들어 다정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민이 인상을 쓰며 토하는 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