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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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오랜만에 HTS를 켜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2천 8백만 원이던 기아차 주식이 25프로 가량 올라서 3천 5백만 원이 넘어있었다.
“생각해보니까... STX가 4월에 폭락하니까... 5월 풋을 사두면... 되겠는데?”
수현은 이번의 수확으로 벌어들인 돈을 보며 고심했다.
“3천만 원 까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4월에 STX 풋에 넣자.”
수현은 중얼거리며 공책에 작성해두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생각나는 것들은 모조리 공책에 적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아쉬움으로 한숨을 쉬었다.
-ㅠㅠ자기야, 나도 같이 놀러 가게 됐어...ㅠㅠ 반지는 다음주에 같이 찾으러 가자!-
연희의 아침 문자가 슬프게 그에게 다가왔다. 하긴, 어머니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본 딸과 함께 하고 싶으실 것이다. 어쩌면 계획적으로 딸의 집에 먼저 찾아왔을 수도 있다. 데려가기 그보다 쉬운 방법은 없으니까.
-아, 엄마가 꽃 엄청 좋아하셨어! 자기 센스 좋대!-
그 다음 문자가 그나마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수현은 연희와 주고받은 문자를 다시 한 번 훑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슬슬 동아리 갈 준비를 했다. 조금 미리 가서 운동을 먼저 하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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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오랜만에 혼자인 주말을 보내며 늦잠을 잤다. 연희와있으면 가까운 어디라도 즐겁게 다녔을 텐데, 조용한 시간이 영 지루한 느낌이었다. 그는 공책을 펼쳐 사업 구상을 하려고도 해봤지만, 특별히 더 나아가지는 것이 없었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현은 연희라고 생각하고 후다닥 다가갔다. 하지만 의외로 고등학교 친구인 대흥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수현이 반가움에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한 번 연락을 해서 다 쏴야했는데, 학기 초라고 다들 바빠서 모이질 못했었다.
-야! 오늘 뭐하냐?-
대흥이 신나게 물었다. 뒤로 차 소리가 들리는 것이 밖인 것 같았다.
“나 오늘은 집. 여자친구 어머니랑 여행가서.”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 개굿. 오늘 동현이랑 술먹기로 했는데 너도 와라.-
대흥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만? 애들 더 부르지.”
수현이 하품을 하며말했다.
-지금 전화 돌리는 중이지. 일단 너 오는거지?-
“언제까지? 지금 가?”
-예압. 나 지금 일산 가는 중임. 한 시간이면 갈 듯.-
“오키. 지금 준비하고 나감.”
-오키여. 빨리 와. 심심해.-
수현은 전화를 끊고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여럿이 모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1차 정도는 과외도 있었고 하니, 자신이 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현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든든한 자금이 있으니 마음이 여유로웠다.
수현은 어차피 다들 느릿하게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30분 정도 늦게 약속 장소에 나갔다.
“와, 이게 한 시간이냐?”
그럼에도 수현은 동현과 함께 30분을 더 대흥을 기다렸다.
“아, 차가 밀려서 그래.”
“지랄. 요즘은 지하철도 밀리냐?”
동현이 주먹을 쥐고 말했다.
“아, 어디로 갈 거임? 오늘 내가 쏨.”
수현이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오, 드디어 쏘냐? 난 네가 입 닦고 모르는 척 하는 줄.”
동현이 한 번에 기분이 풀려 좋아했다.
“오, 그럼 고기 먹어도 되냐? 고기?”
대흥이 곧바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돼지까지 고.”
수현이 말하자, 대흥과 동현이 좋다며 소리를 지르고 앞장을 섰다.
“다른 애들은?”
수현이 물었다.
“먹다보면 오겠지. 늦는 것들이 손해 아님? 가자. 고기 조지자!”
재빨리 태세전환을 한 대흥이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슬슬 하나 둘 올 시간이었다.
“여기 저번에 먹었더니 괜찮았음.”
대흥이 흥겹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주문을 마치고 먼저 나온 소주부터 따서한 잔씩 돌렸다.
“크-.”
안주도 없이 곧바로 들이킨 소주잔을 내리며 세 명이 인상을 썼다. 각자 콜라와 물을 마신 그들은 그제야 서로 무얼 하고 살았는지 안부를 물었다.
소주 두 병째가 따졌을 때부터 한 명씩 나타난 아이들이 둘러앉자 테이블이 2개가 되었다.
“야, 1차는 뿜빠이 하고, 있다가 2차나 쏴라. 존나 많이 나오겠다.”
대흥이 세 번째 갈아지는 불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살게. 이번에 소현이 성적 올라서 보너스도 받았어.”
수현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아, 들었음. 성적 엄청 올랐다며. 거의 2등급 가까이 된다던데.”
대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가르치는 거 좀 잘 하는 듯. 정현아, 형 보고 배워라. 이게 교사다.”
수현이 이번에 사범대에 합격한 정현에게 말했다.
“미친놈인가... 과외랑 여럿이랑 같냐?”
정현이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허, 물주님한테 어디 엿을...”
동현이 정현의 손을 내려치며 말했다.
“아, 맞네. 내가 배워야지.”
정현이 얼른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저거 줏대 없는 거 보면, 친일파 했을 놈이라니까? 저런 놈이 국교과인게 믿기질 않는다.”
상훈이 고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둘은 다시 한 번 티격태격했다. 다들 킬킬거리며 둘의 설전을 즐겼다.
술병이 몇 병 더 늘어나고, 다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진짜 계산 하게?”
동현이 약간 걱정스럽게 물었다.
“엉. 나가라. 계산은 내가 한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우린 몇 번 말렸다? 내일돈 보내라고 하면 죽는다?”
상훈이 나가며 말했다. 수현은 아이들을 내보내고 결제를 마친 뒤에 밖으로 나왔다.
“야, 배 너무 불러서 술도 안 들어간다. 노래방부터 가자.”
상훈이 배를 만지며 말했다.
“콜. 가자. 근데 콜라 존나 빨았더니 트름 계속 나옴. 노래하다가 나올 삘.”
동현이 길게 트림을 하며 말했다.
“아, 씨발, 드러운 새끼... 안 꺼지냐?”
옆에 있던 정현이 그의 머리를 치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다행히 큰 방 하나를 건진 그들은 안으로 우르르 들어가 눈치 보지 않고 선곡하기 시작했다. 삑사리가 나도, 박자를 놓쳐도, 심지어 요상한 춤을 춰도 상관없는 사람들 앞이었다. 그들은 빅뱅이 되어 안무를 했고, 심지어 걸그룹의 노래도 예약이 되어 있었다.
중간에 잔잔한 발라드 타임이 되자 대흥과 수현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을 나왔다.
“야, 어머님이 되게 너 맘에 들어 하시더라.”
소변을 보며 대흥이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성적 이번에 많이 오르긴 했지.”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말고도 소현이 밝아졌다고 좋아하시던데?”
대흥이 세면대로 향해며 말했다. 대흥도 대충은 소현의 집안일을 아는 듯 했다.
“그게 뭐 내 덕인가... 소현이가 잘 극복한 거지.”
수현이 대흥의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뭐, 어쨌든 내가 친한 두 명이 다 잘 되는 것 같아서 좋다.”
대흥이 기분 좋게 말했다.
“소개해줘서 고맙다.”
“야, 오늘 쏜 게 얼만데...”
둘은 그렇게 훈훈한 대화를 마치고 다시 노래방으로 들어가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를 불렀다.
노래방에서 미친 듯이 논 수현의 일행은 내일 일정이 있는 몇 명을 제외하고 3차로 술을 마시기 위해 근처 포장마차 컨셉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탕 하나에 소주를 시킨 그들은 온갖 이야기들로 안주를 삼아 술을 마셨다. 최근에 거리가 멀어져 소원해진 여자친구 이야기, 전 여친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 프리미어리그 이야기, 올해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 같은 쓸 데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수현은 정현과 화장실을 들렀다가, 정현이 담배 태우는 시간을함께 해주고 있었다. 둘은 가벼운 대화를 하며 웃었다.
“어! 쌤!”
그러던 도중 수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 금발에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현이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다.
“와, 우리 진짜 인연인가보다. 여기서 만나네?”
소향이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 일산에서 술마시면 다 비슷하죠, 뭐...”
사실이었다. 또래들은 술 마시는 곳이 비슷비슷했다. 그래서 곧잘 고등학교 동창들을 마주치곤 했다.
“누구...?”
정현이 피던 담배를 거의 놓칠 뻔 하며 물었다.
“나 과외 해주는 애 언니...”
수현이 간단히 설명했다.
“친구?”
소향이 냉큼 물었다.
“네.”
“친구도 안녕?”
소향이 약간 도도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네... 안녕하세요.”
정현이 허겁지겁 인사를 했다.
“쌤도 여기서 마셔요?”
소향이 술집을 가리키며 살갑게 물었다.
“네.”
수현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돈데! 테이블 어디야?”
소향이 반갑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무래도 술집 구조가 양쪽으로 나뉘는 구조인데, 그녀는 반대편 쪽인 것 같았다. 안 그랬다면 분명히 미녀 레이더를 가진 놈들이 못 찾아냈을리 없었다.
“저희는 왼쪽 제일 안 쪽 입니다.”
정현이 얼른 대답했다.
“아, 그래서 못 봤구나! 그럼 좀 있다가 놀러 갈게!”
소향이 배시시 웃으며 자신이 할 말만 하고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일행에게 향했다.
그녀의 일행 중에 남자들과 눈이 마주친 수현은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