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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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은 능숙하게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고, 곧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현과연희는 생소한 음식들을 신기해하면서도 맛있게 먹어갔다.
적당히 즐거운 대화가 오갔다. 대부분은 수현의 어릴 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현이 이야기를 풀면 연희가 반응하고, 수현이 정정하는 식의 대화였다.
“참, 삼촌 아까 그 말, 진짜예요?”
수현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응? 뭐? 어떤거?”
정현이 음식을 먹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연희 광고 모델로 삼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수현이 차 안에서의 말을 짚었다.
“아~.응. 이번에 새로 들어온 광고가 있는데, 딱 보자마자 거기 제품 느낌이랑 잘 맞겠다 싶었지. 근데, 거긴 이미 모델 계약이 끝나서. 왜? 여자친구 이쪽으로 관심 있어?”
정현이 포크를 내려 놓고 물었다.
“아... 적극적으로는 아니고... 알바 형식으로 피팅 모델 같은 거 생각 중이거든요...”
연희가 대답했다.
“음, 일반인 모델 쪽도 있긴 하지... 근데 우린 보통 사진보다는 영상이나 온라인 위주라...”
정현이 간단히 말하며 다시 포크를 들어 한 입 먹었다. 수현이 정현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며 이런 쪽으로 조금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으... 그런 놈들이 요즘도 있구나...”
정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흠... 우리는 주로 일반 기업쪽이라, 인터넷 쇼핑몰 쪽이랑은 그렇게 컨텍이 많진 않은데...”
정현은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잠겼다.
“흠, 지금 당장은 생각이 안 드네. 한 번 알아보고 연락 줘도 될까?”
정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 당연하죠. 급하진 않아요. 웬만하면 여성 옷 전문으로 하는 곳이면 좋겠구요.”
수현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연희의 얼굴이 붉어졌고, 정현이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아무리 여자 옷만 취급해도 스텝은 남자도 있을 수있어. 특히 촬영 쪽은.”
정현이 큭큭대며 말했다.
“그래도...”
수현이 아차 싶었지만 의견을 굽히지는 않았다. 정현이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내가 오늘 얘 새로운 모습 많이 본다. 맨날 오면 애늙은이처럼 이렇게 앉아 있던 것만 기억나는데...”
정현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무슨...”
“야, 어른들 앞에서 사근사근하기만 하고... 딱 어른들이 원하는 참한 손자 타입 아니었냐?”
정현이 아니라고 말해보라는 듯이 말했다. 수현은 딱히 할 말이 없어 조용히 있었다.
“오늘은 애 다운 맛이 있어서 그래. 보기 좋다.”
정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좀 알아보고 연락 줄게. 여자 옷만 취급하는 쪽으로.”
정현이 뒷말에 강조하며 말했다. 두 남녀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며 정현은 즐거워했다. 그에게는 돈이 아깝지 않은 식사자리였다.
정현은 둘을 신촌에 내려주고는 저녁도 맛있는 걸 사먹으라며 두둑히 용돈도 쥐어주고는 사라졌다.
“되게 활기찬 분이셨어.”
연희의 평가였다.
“그치? 내가 말했잖아. 젊다고.”
수현이 연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의외인 곳에서 일이 풀렸네.”
연희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지? 나도 솔직히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아까 삼촌이 모델 삼고 싶다고 하는데 갑자기 퍼뜩 생각이 나더라고.”
수현도 그 걸음에 맞춰 즐겁게 말했다.
“사실 나도 그때 떠오르긴 했는데, 물어보기 좀 그래서 참았어.”
연희가 고마움을 담아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말 잘 했지?”
수현이 연희 쪽으로 몸을 약간 숙이며 말했다.
“응. 내 남자 최고야. 근데 그것 때문에 만났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연희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수현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도 걱정을 곁들였다.
“괜찮아. 그 정도로 속 좁은 분 아냐.”
수현이 연희를 이끌며 말했다.
둘은 밀렸던 공부를 같이 하기로 했기에, 학교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앉은 수현과 연희는 책을 펴고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둘 모두 녹슬지 않은 수험생의 자세가 남아있었다.
“아으... 이 부분이 이해가 안가...”
연희가 이미 문제풀이를 끝낸 수현을 톡톡치며 시간가치 부분을 가리키고 말했다.
수현이 피식 웃었다. 사실 되게 별 것 아닌데, 처음에는 괜히 잘 헛갈리는 부분이었다.
“잘 봐. 현재가치로 올 때는 1기초, 그러니까 제로 시점으로 끌고 오는 거야. 1기말 시점이 아니고. 근데, 미래가치는 기말시점으로 끌고 가는 거지.”
수현이 설명했다.
“음...?”
연희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1기말 금액만 놓고 보면 이해가 좀 될 거야. 여기 1기말 100원을 10퍼센트 할인율로 현재가치로 당기면?”
수현이 간단하게 줄을 그어 설명했다.
“90.91이지... 아!”
연희가 드디어 알아챈 듯 했다.
“알겠지? 1기말 미래 가치는 그냥 100 그대로야.”
수현이 대견하다는 듯이 연희를 토닥였다.
“역시 과외쌤은 다르구나. 설명을 이렇게 잘하네.”
연희가 수현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학생이 너무 똑똑해서 그렇지. 이렇게 금방 알아듣네?”
수현이 말하자 연희가 기분 좋게 웃었다.
둘은 한동안 공부이자 데이트를 병행했다.
생각보다 효율이 좋았다. 사실, 그 이유는수현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그저 쉽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연희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 중요했다.
“와, 생각보다 이런 데이트도 좋은 것 같아!”
연희가 목표치를 끝내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무료과외를 받으니까 당연한 것 아닐까요?”
수현이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긴 한 것 같아... 난 여친 남친 같이 공부하면 효율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외 경력자를 만나서 그런지 오히려 좋네?”
연희가 간단히 수긍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자기 진짜 대단하다... 같이 수업 들었는데, 언제 다 그걸 이해했어? 과외도 하고, 운동도 하고... 시간은 제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
연희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며 신기한 듯 말했다.
“난 과외 전에 시간 있잖아. 중간에 간단히 공부했지.”
수현이 적당히 꾸며 말했다. 연희가 대단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멋져 보여서 큰일이네...”
연희가 수현을 안으며 말했다. 수현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늘 느낌도 좋은데 저녁 먹고 아예 좀 더 할까?”
수현이 말했다.
“음, 아냐. 오늘 할 거 끝냈으니까! 오늘은 끝! 놀자! 아까 반 애들 모인다고 오라고 문자도 왔더라.”
연희가 기분 좋게 말하며 수현을 잡아당겼다. 수현도 불만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뒷정리를 시작했다.
수현과 연희는 간단한 저녁식사 후에 병훈을 필두로 한 반 모임에 참석했다. 1차는 역시 근처의 뚫어놓은 술집에서 시작했다.
다들 친해진 사이에 이제는 허물없이 즐기며술을 마셨다. 나이에 걸맞게 소주병은 빠르게 쌓여갔다.
“야! 오늘 2차는 노래방이다!”
소영이 막잔을 털어 넘기고 외쳤다. 아이들이 콜을 외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 그러고 보니까, 수현이랑 연희 노래하는 거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오늘 들어보는 건가?”
누군가 기대된다는 듯이 말했다.
“오, 그러네. 의외로 좀 못 했으면 좋겠다.”
“제발! 노래만은!”
아이들이 킬킬거리며 짓궂게 말했다.
“난 인정. 근데, 연희는 노래 잘 해.”
수현이 여유있게 말했다.
“왜~. 자기도 잘 하는 편이야!”
연희가 얼른 말했다.
“아, 좀!”
민형과 강민이 옆에서 짜증을 냈다. 수현이 놀리듯 턱을 들어보이자 민형이 소주병을 가리켰다. 다들 웃음이 터졌다.
아이들이 우르르 나가고 수현과 연희가 웃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근처의 노래방에 제일 큰 방으로 들어간 그들은 들어가면서부터 재빠르게 온갖 장르의 노래들을 선곡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 함께 버즈가 되었고, 엠씨더맥스의 고음 산 중턱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듀가 되어 에잇톤 트럭을몰고 가서, 타이거jk와 힙합을 논했다.
자우림이 되어 하하하 웃었고, 체리필터의 동물들이 되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연희가 마이크를 잡자 다들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선곡은 윤하의 비밀번호486이었다.
“....
하루에 네 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 번 웃고, 여섯 번의 키스를 해줘~“
연희가 은근히 수현 쪽을 보며 후렴구를 불렀다. 작게 야유가 터져 나왔다. 병훈이 다음곡을 확인하더니 수현을 쳤다. 수현이 몸을 사리면서도 빵 터져 웃었다.
잠시 후 노래가 끝나고 연희가 부끄러운 듯 들어왔다.
“아오! 이것들은 여기서도 연애질 하러 왔네!”
강민이 외쳤다.
“야, 다음곡 봐라! 저거 황수현 선곡이다!”
병훈이 걸어 나가는 수현과 화면을 번갈아 가리키며 고자질 하듯 외쳤다.
“나비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거 가사 바꿔 부르면 레알 이거 던질 거임.”
민형이 템버린을 들어보였다. 수현이 알았다는 듯이 손을 들어 그들을 자제 시키고 노래를 시작했다.
"... 나비야. 나비야. 너를 부르던 그 말~"
수현은 다행히 가사까지 바꿔부르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노래가 끝나고 그가 연희의 옆자리로 돌아가자, 연희가 민형에게 들으라는 듯 아쉽다고 중얼거렸다.
옆자리의 민형이 눈살을 찌푸렸고, 커플은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며 깔깔거리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