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
*
복싱부의 입부서는 금방 가득 쌓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당연히 미모의 두 남녀가 끌어당기는 매력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수현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새 부풀려져 떠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와... 이 정도면... 오히려 우리가 뽑아야겠는데...”
혜정이 중얼거렸다.
“저희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수현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 순간, 멀리서 몇 명이 수현과 연희를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민형, 병훈, 강민, 그리고 소영이었다.
“뭐야, 너희들...”
수현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와... 술자리에서부터 알아봤다. 그러니까 김민형 이게 연장을 들어도 눈 하나 깜짝을 안 하지.”
병훈이 얘가 내 친구라는 듯이 어깨동무를 하며 나머지 셋에게 말했다.
“아, 나 또 뭐, 미친놈아.”
민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희야, 내가 엮어 준거다? 알지?”
소영이 연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이니?”
말을 놓기로 한 석경이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도 입부서 내려고 왔습니다!”
병훈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눈치는 빠른 놈이었다.
“아. 그럼 여기. 내가 친구들 입부서는 따로 챙겨둘게.”
혜정이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감사합니다아.”
병훈이 목소리를 낮추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는 입부서를 4장 받아 나머지들에게 나눠주었다.
수현과 연희가 눈을 맞추고 어깨를 으쓱였다.
“야, 너희 둘은 어떻게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동아리를 정하냐... 섭하다.”
강민이 입부서를 쓰며 말했다.
“우리도 얼떨결에 오늘 한 거야... 너희는 여태 든 곳 없었어?”
수현이 물었다.
“걍 여기저기 다니면서 술만 마셨지. 생각도 잘 안 나네... 근데, 또 마침 우리의 커플 이야기가 들려오더라고? 이거다 싶었지.”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넷은 우르르 입부서를 제출했다.
“너희 언제 끝나?”
소영이 말했다.
“우리 방금 끝났어.”
연희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저녁 콜?”
병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술이겠지.”
수현이 정정했다.
“둘이 같은 거야.”
병훈이 진심처럼 말했다. 몇 사람이 터졌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수현과 연희가 인사를 했다.
“응. 잘 가고. 다음 주 금요일에 첫 운동이랑 환영회 있으니까 그때 보자.”
석경이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여전히 약간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
수현과 연희는 그들에게 이끌려 밥을 먹고 얼떨결에 반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평일엔 알바, 주말엔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다보니, 사실 반 참여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수현과 연희는 마당발인 병훈과 소영의 서포트 아래 특유의 유명세로 금방 중심이 되어 어울렸다. 술게임이 돌아가고, 1호 커플이라는 타이틀 답게 수현과 연희는 흑기사나 흑장미에 이어 러브샷까지 막힘없이 진행했다.
“와-. 진짜 둘이 그림이라 내가 봐준다!”
누군가 외쳤다.
“네가 안 봐주면? 오늘 수현이 복싱선수 때려눕혔다던데?”
다른 누군가가 대답하자, 다들 깔깔거렸다. 곧 수현은 그에 대한 질문 공세를 받았고, 정정보도를 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야, 이제 소주병 마스터 김민형은 무조건 황수현 옆이야. 수현아, 연희는 떨어뜨려도 쟨 데리고 다녀라? 쟤 검 뽑아들면 너 뿐이 없다.”
한 명이 킬킬 웃으며 민형을 가리키곤 외쳤다.
“아나, 이제 연장은 안 쓰려고 했는데...진짜...쓰게 만들지?”
민형이 장난스럽게 소주병으로 손을 올리자 말한 상대가 수현을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민형은 연희와 방이현의 사태 이후 ‘욱하긴 해도 의리는 있는 남자’, ‘연장은 들어도 정의는 지키는 남자’ 타이틀을 가져가면서 이미지 개선이 상당히 되었다. 일종의 다크나이트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에, 강종현은 다른 반에서도 안 좋은 짓을 해서 여론이 더 안 좋아졌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강종현이 분명 심각한 개소리를 했을 것이라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술자리는 유쾌했다. 수현과 연희에게 선을 넘을 뻔한 아이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다른 아이들 선에서 병신샷을 먹고 다운되었다.
연희와 수현은 2차까지 아이들과 달리고 3차를 외치는 병훈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와, 의외로 재미있었다.”
연희가 가볍게 팔을 벌리고 점자보도블럭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수현이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팔을 당겼다.
“앗!”
연희가 넘어지듯 수현의 품에 안겼다.
“아...죽었다.”
연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살려줄까?”
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연희가 실눈을 뜨고 물었다.
“이렇게.”
수현이 연희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뭐야, 나 백설공주야?”
연희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연희공주요.”
수현이 두가지 목소리로 말하자, 연희가 부끄러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큰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둘만의 세상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드문드문 지나치는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둘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 이거... 고마워. 고맙단 말은 안 하고 구박만 했네. 하여튼 넌 사람 놀라게 만들어서 고맙단 말도 늦게 하게 만들어...”
연희가 아이폰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난 사실 화내는 것도 좋았는데?”
수현이 연희를 안아주며 말했다.
“치, 그게 뭐야... 큼! 어쨌든! 고마워. 난 선물 뭐 해줘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발렌타인데이처럼 소소하게 주고받는 생각했단 말이야.”
연희가 괜히 더 수현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수현이 통증에 움찔했다. 절로 신음이 흘렀다.
“...아프구나.”
연희가 중얼거렸다.
“티났어?”
수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가자. 약 발라줄게. 아팠겠다.”
연희가 약간 울상을 지으며 수현의 배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김연희 손길에 완전 힐링 되고 있는 것 같아.”
수현이 연희의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말은... 빨리 가자.”
연희가 수현의 손을 끌었다. 수현이 연희의 손을 자신의 코트에 넣으며 발을 나란히 했다. 가로등에 길게 뻗은 둘의 그림자가 완전히 겹쳤다.
*
토요일.
수현과 연희는 근처의 핸드폰 대리점에서 새로 핸드폰을 개통하고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야.”
연희가 수현의 주머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수현을 불렀다.
“응?”
수현이 약간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반지 맞추자.”
연희가 수현의 손에 깍지를 단단히 끼며 말했다.
“반지?”
“응. 반지. 이건 내 선물. 우리 손이 허전한 것 같아.”
연희가 수현의 물음에 얼른 대답했다.
“음, 그건 백일 때 하려고 생각했는데...”
수현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땐 다른 거 하면 되잖아. 누가 너무 인기 많아서 안 되겠어.”
연희가 약간 조르듯이 말했다.
“좀 비쌀 텐데...”
수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나 알바비도 있고. 내 친구 보니까 14k는 30만원 안 되는 것 같던데?”
연희가 냉큼 말하며 그를 끌어당겼다.
“괜찮겠어?”
“응! 여유 있어!”
연희가 당당하게 말했다. 하긴 그녀도 친척들 집을 돌며 꽤나 많이 용돈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보태면 화낼 거지?”
수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응! 가자.”
연희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는 그를 더 강하게 끌어 당겼다. 수현은 결국 그녀의 이끌림에 따라 끌려갔다. 그도 좋았다. 사실, 연희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백일로 미뤄둔 것이었다. 도무지 남자들이 내버려둘 미모가 아니라, 반지라도 끼워두고 싶은 마음은 자신이 더 컸다. 뭐, 너무 예쁘면 대쉬도 어렵다곤 하지만... 저번 같은 일도 있고.
“근데,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알고 가는 거야?”
수현이 상당히 빠르게 걷는 연희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종로!”
연희가 의외로 정답을 말했다.
“그건 또 언제 찾아봤어?”
수현이 약간 놀라 물었다.
“...그건 비밀.”
연희가 잠깐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나도 말해줄게.”
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연희가 개찰구에 들어가 뒤를 돌아보았다.
“난 연희 너랑 사귀고 나서부터 찾아봤어. 예뻐서 반지라도 끼워두고 싶더라.”
수현이 개찰구로 들어가 연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반은 거짓말이었다. 전생의 여자친구랑 갔던 곳이 종로였다. 이미 알고 있는 곳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반지라도 끼워두고 싶은 것은 그때부터가 맞았지만.
“...나, 난 과외 얘기 듣고 나서...”
연희가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수현이 피식 웃으며 연희를 감쌌다.
“이니셜을 밖에 새겨버리자.”
수현이 말했다.
“밖에?”
연희가 되물었다.
“응. 우린 둘다 손 예쁜 편이니까, 심플한 링에 밖에는 네 이름, 내 이름 가운데 하트. 약간 흘림체로 눕혀 쓰는 글자면 디자인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은데.”
수현이 생각해둔 걸 말했다.
“음... 하트엔 큐빅으로 할까?”
연희가 말했다.
“단가 좀 올라갈 텐데...”
“음, 그럼 봐서.”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은 종로의 귀금속 가게를 돌며 몇 군데 시세를 알아보았다. 가격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아서, 수현과 연희는 제일 그들의 의견을 잘 귀담아 들어준 가게에서 14k로 2돈짜리 커플링에 큐빅을 박아 30만원에 결제를 했다.
“음, 뭔가 색다른 기분이다!”
연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약간 더 커플 된 기분이 있지?”
수현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응! 딱 그 느낌이야! 자기도 그래?”
연희가 정확히 짚었다는 듯이 말했다.
“응. 나도 그래. 반지 하나 맞췄는데, 좀 신기하다.”
수현이 연희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음,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게 더 좋다!”
연희가 고양이처럼 몸을 부벼왔다.
“찾는 건 아예 다다음주 금요일에 같이 오자.”
수현이 넉넉하게 시간을 잡았다.
“응! 그러자.”
연희는 뭐든 좋다는 듯이 말했다.
“어?”
연희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응? 왜?”
수현이 연희의 시선이 멈춘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연희가 고궁의 담벼락을 보며 물었다.
“여기가...종묘일 걸?”
수현이 말했다.
“여기가 종묘구나!”
연희의 표정이 환해졌다.
“응. 궁 좋아하는구나?”
수현이 새로운 걸 알아냈다는 듯이 물었다.
“응. 예쁜 건물이랑 옷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 중에도 우리나라 궁이랑 한복 완전 좋아해.”
연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들렀다가 갈까?”
수현이 물었다.
“시간이 될까?”
연희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음... 모르겠네. 넉넉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수현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음, 그러면 다음에 오자. 아예 좀 따뜻할 때 우리 궁 투어 한 번 하자!”
연희가 깔끔하게 단념하며 말했다.
“응. 좋다. 나 궁은 잘 모르는데, 연희쌤이 설명해주시겠죠?”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음, 학생이 예습을 하는 게 좋긴 한데, 수현 학생은 제가 편애하니까 특별히 봐줄게요. 모른 채로 와요.”
연희가 냉큼 받으며 도도한 선생님 역할을 했다. 둘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서 좀 놀다 갈까? 근처에 인사동이랑 명동 있으니까.”
수현이 물었다.
“어! 그럼 인사동부터 가자!”
연희가 냉큼 자신의 관심사에 가까운 곳을 짚었다. 수현이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연희를 이끌었다. 연희의 발걸음이 통통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