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33 (33/94)



〈 33화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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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의 프로그램 또한 적당히 형식만 맞춰 돌아갔다. 애초에 집행임원 측이 대부분 밤샘을  상황이었다. 젊음으로 버티는 그들이지만, 그렇다고 프로그램이 알차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찍 죽은 애들은 일찍 죽은 애들대로, 살아남은 애들은 그 나름대로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으, 힘들긴 하다... 오늘 밤에도 많이 먹겠지?”

연희가 수저를 내리며 말했다. 더 먹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렇겠지? 오히려 더 먹을 수도 있지. 어제는 오늘을 위해 체력을 남겨 둬야하지만...오늘은 아니잖아?”

수현이 사실을 말했다. 연희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억지로 막 먹이진 않을 테니까, 오늘은 힘들면 일찍 자.”


수현이 연희를 토닥이며 말했다.

“음, 그래도 나름 재미도 있고, 자기랑 같이 또 먹고 싶은데... 일단, 버텨 볼게.”

연희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수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참지는 말고.”

수현이 말하며 식판을 들었다. 둘은 가볍게 산책을 마치고 건물로 들어갔다.

다행히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맞긴 한 듯이 신입생들은 실시간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수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짬으로 버티는 것과는 다른 하드웨어 타입들이 이래서 무섭다.


오후의 일정이 적당하게 지나가고, 저녁시간이 끝난  강당에 모인 모두의 코에 맛있는 기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치킨인가?”

“족발도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모두의 눈이 기대로 바뀌었다.

“자, 자. 잠시만 집중해주세요. 오늘은 졸업하신 선배님들께서 비싼 안주와, 그리고 우리의 내일을 위해 무려 양주를! 준비해주셨습니다.  반 별로 나눠드릴 테니, 인원들은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즐겁게 말했다. 강당이 함성으로 가득찼다.

“와! 양주다!”

09학번 중에 양주 맛을 몇 번 봤는지 유독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민형, 김병훈 나가자.”


수현이 제일 친분이 있는 둘에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민형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병훈은 눈치를 채고 얼른 일어났다.

“그럼 김민형이 너 말고 또 있냐?”

수현이 말했다.


“나도 가.”

강민도 동참했다. 그러자 민형이 밍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이야, 우리 반 신입생들은 이렇게 빠릿빠릿해... 말하기도 전에 척척... 이번 10은 진짜 최고다...인정.”


09 여자 선배  명이 그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올렸다.


네 명은 제일 먼저 앞으로 나가 치킨과 족발등 안주거리와, 양주를 받아 들어왔다. 조장들이 뒤따라와서 그들을 도왔다.


“와... 저녁 먹지 말걸 그랬다...”

연희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별로 먹지도 않고는... 올라가서 많이 먹어.”


수현이 연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씨...신성한 음식 앞에서... 토 나오게 할래?”

민형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기로 가든가?”

수현이 비웃듯 말했다.

주변 몇 명이 그들을 보며 킬킬댔다.

“말을 말자...”

민형이 한숨을 쉬었다. 다들 맛난 음식 앞에서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자, 조별로 음식은 다 나눴어. 넉넉하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많이들 먹고, 양주는 반 다 모였을 때까지 킵이야! 양주 먹고 싶으면 꼭 다들 살아남아! 알았지?”


반 회장이 반 아이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환호가 이어졌다.


“그럼, 이따가 다들 만나자! 해산!”


부회장이 말하자, 각 조원들은 자신들의 몫을 들고 나르기 시작했다.  건물에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넉넉한 안주와 내일의 걱정이 없는 술자리는 전  보다 더 속도감이 있었다. 다들 텐션이 높았고, 그에 반해 어제의 충격이 간에 아직 남았으므로, 의외로 빠르게 사람들은 쓰러져갔다.

“아,  박자 쉬고, 아, 두 박자 쉬고, 아,  박자 마저...”


술게임에서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절어버린 한껏 취한 아이가 에프엠을 시작했을 때였다. 수현의 생각에 이 아이, 혹은  다음 정도가  끼리 모이는 시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술이 돌았을 시점이기도 했다.

“수현아! 잠깐 와봐!”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아이가 조금 급하게 수현을 불렀다. 정모 때 봤던 얼굴의 2조 아이였다.

“무슨 일 있어?”


수현이 인상을 쓰며 벌떡 일어났다.


“일단 빨리 와봐.”

여자애는 설명하기 보다는 그게 급하다는 듯 말했고, 수현은 두 번 묻지 않고 따라나갔다. 조장이 사람들을 진정시켜 놓고, 그를 따라나왔다.

“저기...”

여자애는 2조 방의 문을 열며 민형을 가리켰다. 병훈이 그를 말리고 있었지만, 자꾸 병을 잡으려는 손이 있었다.

“김민형!”


수현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들어갔다. 수현은 얼른 병훈을 도와 민형의 뒤를 잡았다.

“그만해. 손... 너 저거 잡지 마.”


수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민형이 숨을 몇 번 고르더니 약간 안정된 숨을 찾았다. 수현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상대는 놀란 얼굴로 창가에 붙어있었다.

“너... 너 이 새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창가에 붙어 있던 사람은 민형이 진정한 것을 알고는 목소리를 크게 내며 말했다.

“네가 뭔데?”


민형이 다시 흥분 한 듯이 씩씩 거렸다. 수현이 다시 힘을 줬다.


“김민형. 참아.”

“아니,  새끼가 네 여친 한테 계속 찝쩍댔다니까? 미친놈이 나이 처먹고!”

민형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현이 잠시 멈칫했다.


“뭐야, 네가 얘 남친이었어?”

남자가 약간 불안한 그러나 조금 여유는 생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공격성이 없어보이는 수현을 보고는 조금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너 뭐냐니까 새끼야!”

민형이 소리쳤다.

“우정 보기 좋네... 나? 우리 아버지가 한매투자증권 회장. 형이 부장. 느낌 오냐?”

남자가 조금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런 회사도 있냐?”


민형이 비웃듯이 말했다. 남자의 얼굴이 진하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남자가 발끈하자 2조 조장이 그를 말렸다. 뭔가 민형이 여유를 찾은 것 같자 수현이 그를 놓았다. 그러자 남자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애초에 싸울 마음이 없던 것이다.

“너, 너 이새끼... 조심해라. 다음에 보면 그냥 안 지나칠 줄 알아.”


남자는 작게 침을 삼키더니 민형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수현도 쏘아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미친 새끼... 쫄아서는...”


민형이 중얼거렸다.

“...잘 참았어. 그리고... 고맙다.”

수현이 작게 말했다.

수현은 주변의 상태를 보고는 연희와 민형을 챙겨 나왔다. 2조 조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병훈이 따라 나왔다.


연희는 담담했다. 수현에게 안기기 전 까지는.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민형과 병훈이 멈칫하며 돌아섰다.


“얘들아, 고마워.”

연희가 속삭이듯 말했다.

“뭘... 그 새끼...같은 놈들은... 아니다. 그... 좀 있다가 들어와. 우린 따로 있을게.”

민형은 이런저런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뗐다가 말았다. 그는 결국 병훈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나중에 얘기하자. 오늘은 고마웠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민형과 병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수현은 한동안 연희를 토닥였다.


“조금씩 손을 올리는 거야... 처음에는 애매해서 그냥 피했는데, 나중에는 좀 노골적이라... 내가 계속 뿌리쳤거든... 근데도 그래서... 민형이가 도와줬어...”

연희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인지 대충 알았다. 분위기 상 단호하게 하자니, 아닌  같은 그 애매한 손길... 자신도 미래에 여자에게 당해본 기억이 있었다. 남자라서  내치기 힘들었던 그때  애매하게 나쁜 기분은. 의외로 기억에 오래 남았다. 돌아오고도 생각날 만큼.

“민형이가 이번엔 고맙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희를 좀 더 감싸 안았다.


“응...”

연희가 작게 말하며 수현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었다. 수현은 그저 토닥이며 위로해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원하게 한 대 치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한 것이 화가 나기도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수현이 조금 더 단단하게 연희를 끌어안았다.

*


민형은 병훈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멀리 벤틀리 한 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민형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좀 살긴 하나보네.”

민형의 말투는 별 것 아니라는 말투였다.

“야,  심하게 잘 사나본데? 거기다 회장이라며.”

병훈이 좀 걱정스럽게 말했다.


“회장은 무슨. 지가 명함에 박으면 그만인 거...”


민형은 코웃음치고는 옆의 벤치에 앉았다.


“야,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민형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저런 놈들은 사실 자존감이 하나도 없어. 오죽하면 아빠를 팔아먹겠냐? 아까  풀어주니까 봐, 달려들지도 못 하잖아. 별 볼일 없는 새끼들이야...”


민형은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래왔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너 괜찮은 거 맞지?”

병훈이 다시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걱정마라. 쟤보다 더 골치 아픈 애 머리도 깨봤다.”


민형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왜 수현이 놈만 있으면 스스로가 침착해지는지... 분명 자신의 취한 상태는 그리 간단히 진정되는 수준이 아니었는데... 민형은 머리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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