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24 (24/94)



〈 24화 〉24

*



“아, 집 가는 게 아쉬울 줄은 몰랐는데...”

연희가 수현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목요일은 금방 찾아왔다. 두 연인은 사귄 이후로 처음 길게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 말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차 놓쳤다고 확 내일 내려갈까?”

연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아버지 차 끌고 데리러 오실라.”

수현이 크게 웃고는 그녀를 말렸다.

“진짜 그럴 거야... 울 아빠 지금부터 터미널에 나와 있을지도 몰라.”

연희가 말했다.


“그럼 좋지. 우리 연희 보디가드들이  지역마다 잘 배치 되어있네.”


수현이 흡족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보디가드... 나중엔 자기가 마주해야 돼.”


연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보자.”

수현이 힘이 약간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가 수현의 품에서 큭큭거렸다.

“아, 그냥 오늘 두 보디가드들 만날래?”


연희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유도 메달리스트라고 하시지 않았어?”

수현이 물었다.


“응. 자기도 힘 쎄잖아.”

연희가 토닥이며 말했다.

“연희야. 나 죽어.”


수현이 담담하게 사실을 말했다. 둘은 작게 킥킥거렸다.

“조심히 가고. 도착하면 연락해. 알았지?”


수현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응... 넌 여자 조심하고. 웬만하면 집안에만 있어.”

연희가 말했다. 수현도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어디 나가지 말고. 아버님이랑 다녀. 알았지?”


수현의 말에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 진짜 버스 놓치겠다.”


수현이 버스가 준비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응. 그럼 화요일에 봐!”

연희가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수현이 그 앙큼함에 웃어버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품이 허전했다. 연희는 창가에 앉아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고, 수현도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


어머니는 오전부터 부산을 떨었다. 수현은 코트에 무채색 톤으로 깔끔하게 차려 입고 그의 어머니 앞에 섰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부터 집안의 간판으로 나서야 했기에 외관상의 결점도 없는 편이 좋았다.


“아이고, 우리 수현이 아주 텔런트 같다.”

수현의 외할머니가 그를 보며 흐뭇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어머님. 우리 수현이는 빠지는  없네요. 안경 벗으니 훨씬 인물이 사네.”


숙모 한 분이 말했다.

“그럼 작은집으로 가자.”


외할머니의 말씀에 모두가 우르르 집에서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여기가 ‘큰집’이지만,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둘째 할아버지께서 쭉 제사를 맡아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차에 그와 외할머니가 탔다. 제일 먼저 내릴 때, 외할머니는 그와 내릴 것이다. 외할머니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차는 서초구로 향했다. 한강이 시원해보였다.

“엄마, 수현이랑 먼저 내려요.”

방배동의 빌라촌에 도달한 수현의 어머니가 마중 나온 작은  식구를 눈치 채고 말했다.

“그래.  주차하고 와라.”

둘은 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형님!”

작은 집 식구들은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이구, 우리 수현이! 잘 왔다!”


작은 외할아버지가 그에게 다가와 반갑게 말하셨다.

“안녕하세요.”

수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좋으신 분이다.


그렇게 망하고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애 좋은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서울로 함께 상경했던 둘째 외할아버지는 대기업에 입사하여 고속 승진을 하시며 종종 외가를 도와주셨다고 했다. 결국 사장단으로 계시다가 은퇴를 하신 나름의 인생역전을 만드신 분이었다. 막내 외할아버지 또한 은행에 들어가 일하면서 종종 도와주셨다고 했다. 지금은 지점장으로 계시는데, 은퇴를 앞두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수현은 돌아다니는 내내 얼굴 마담으로 사람들 앞에서 외할머니의 훈장이 되었다.

“그래, 수현이가 연대면, 우리 집안에서는 드디어 나 다음으로 연대생이 나온 거구만!”

거실에 마주 앉은 둘째 외할아버지가 그를 향해 뿌듯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네요. 서울대, 고대에, 저기 물 건너서 옥스퍼드도 나왔는데, 이상하게 연대가 없었어, 여태껏. 형님, 오늘 기분 좋으시겠어!”

막내 외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자, 이건 이 할애비가 할애비로서, 또 동문으로서 주는 거고, 이건 우리 형님 대신 해서 주는 거다. 받아라.”


둘째 외할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봉투를 건네셨다.


“감사합니다.”


수현이 공손하게 받았다.


“아, 형님, 또 그렇게 멋진 걸 해버리시네. 자,  무드는 없어서 그냥 하나만 준비했다. 받아라.”

막내 외할아버지는 주책이시라는 표정으로 형을 보고는 밝게 웃으며 봉투를 건네셨다. 수현이 감사인사를 하며 공손히 받아들었다.

남다른 두께감이 느껴졌다. 깜빡했는데, 이 돈들이 상당히 큰돈이었다. 두분은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약주가 얼큰하게 들어가기 시작하자, 두 분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수현은 밖으로 나와 가볍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피곤하지?”

실제 촌수는 5촌이지만, 삼촌이라고 부르는 둘째 외할아버지댁의 늦둥이이신 분이 나와 말을 걸었다.

“네? 아뇨. 그냥 안에 있기 뻘줌해서...”

수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추석되면 덜할 거다. 걱정 마. 삼촌 회사 신촌 근처에 있는 거 알지? 연락해. 밥 사줄게. 여자친구 있으면 데려오고. 여자친구는 아직인가?”


삼촌은 고대 행정학과를 나왔지만, 광고업계 쪽의 사업을 하셨다. 나름 꽤 탄탄한 중소기업이라고 했다.

수현이 그냥 웃어보였다.


“이야, 요즘 애들은 진짜 빠르긴 하다. 그럼 같이 와. 어른들한테는 말 안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럼 좀만 있다가 들어와라.”

삼촌은 피곤한 아이 더 건들지는 않고 나중에 묻겠다는 듯이 말하고는 웃으며 들어갔다. 수현은 머리만 긁적였다. 부러웠다. 여유롭게 자랐기에, 자연스럽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모습이.

수현은 작게 입김을 내뿜고는 등을 돌려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외할머니가 그를 불렀다.

*

수현은 설 하루를 열심히 인사를 하고 난 후에 집에 돌아왔다. 자고 가라는 말은, 월요일에 과외 알바가 있다는 말로 간단히 해결이 되었다. 과외만큼 좋은 핑계가 없었다. 어른들은 대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수현은 차트를 보며 작게 감탄하고 있었다. 수현이 ELW를 매수한 바로 다음날 최저점을 찍더니,  다음날부터 오르기 시작한 STX주가는 계속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운이 좋았고 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수현의 관심은 얼마나 오를지에 꽂혔다.


은근한 답답함에 수현은 토토에게 다가가 목줄을 흔들어보였다. 토토는 하품을 하며 나왔다. 잘 나가던 시간은 아니라 어리둥절하지만, 일단 좋다는 듯 꼬리가 흔들렸다.

둘은 가벼운 산책을 하며 밤길을 걸었다. 정자 근처에 앉자 토토가 근처 냄새를 맡았다. 수현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의외로 신호는 오래 가지 않았다. 마치 상대도 기다린 것처럼.


-응! 자기야!-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든 답답함이 전부 날아가는 듯했다.

“뭐야. 되게 빨리 받는  보니까, 기다렸구나?”

수현이 반쯤 놀리 듯 물었다.

-응. 내가 할까, 기다릴까 고민 중이었어.-

연희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왜 고민을 해?”

수현이 그녀의 인정에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냥, 음, 고민이라기보다는... 혼자만의 내기 같은 거? 저기 도착 할 때까지 전화 안 오면 내가 걸어야지. 하고 걸었지.-

연희가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오면 천천히 걷고?”

수현이 말했다.

-응! 그런 거. 자기도 해본 적 있어?-

엄마가 언제 오는가로 해본 적이 있었다.


“응. 어릴 적에만.”

수현이 ‘어릴’에 힘을 줘서 말했다.

-치, 좀 유치하면 안 되나?-

“유치해서 좋다구.”

수현은 진심으로 말했다.

-나 좋아?-

연흭 장난스럽게 물었다.

“응. 너무 좋아.”


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연희의 숨이 턱 막힌 것이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수현은 소리 없이 웃었다. 본인은 담백하게 고맙다, 미안하다, 좋아한다고 잘만 말하면서, 본인이 받으면 부끄러워하는 건 왜일까.

“너무 좋다고.  말이 없어.”

수현이 다시 말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기 있어?...-


연희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물어본 사람이 누군데?”

수현이 달을 보며 말했다. 달이 아니라 붉게 달아오른 연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치... 뭐하고 있어? 밖이야?-


연희가 말을 돌렸다.

“응. 토토 산책 중. 너도 밖인 것 같은데?”


수현이 대답하고는 건너편의 약한 바람소리를 듣고 물었다.


-응. 외가 뒷산. 가족끼리 나왔는데, 나만 좀 뒤쳐졌지.-


연희가 대답해왔다.


“위험하게... 빨리 따라가.”

수현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 더 뒤에서 여친이랑 통화 중인 동생 있거든.-

연희가 말했다.

“요즘 애들 빠르네.”

수현이 몇 시간 전에 들은 소리를 했다.

-그치? 중딩이 무슨 연애야?-

연희가 냉큼 그의 말을 받았다.

“동생도 운동한다고 했지?”

수현이 물었다.

-응. 쟤도 유도. 등치는 벌써 너만 해.-

연희가 툴툴대며 말했다. 수현은 무언가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약간 고달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을 해야 했구나.”

수현이 사실대로 말했다. 연희가 깔깔대며 웃었다. 둘은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달린 것은 그보다는 연희가 더 했다. 그녀는 친가에 이어 오늘 오후에 외가에 와서도 한 번 더 시달렸다고 했다. 수현은 무릎에 토토를 올리고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도 용돈은 많이 벌었어!-

연희가 기분 좋게 말했다.


“나도. 그건 좋더라. 우리 뭐 맛있는 거 먹자.”


수현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호텔로 가야하나?-


연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오해해.”

수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연희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오해하라고 말한 건데?-

연희가 앙큼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수현이 허를 찔려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와, 김연희. 안 보인다고... 올라오면 죽었어.”

수현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연희가 깔깔거렸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태도였다. 그들은 간단한 말장난으로도 몇 차례를 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 자기야, 친척들 내려온다.  가봐야겠다.-

연희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 조심히 내려가고. 동생은 아직도 안 올라왔어?”


수현이 말했다.

-나처럼 어디서 전화 받고 잇겠지 뭐. 걜 누가 건드려.  가볼게. 잘자구! 내꿈 꾸고!-

연희가 빠르게 말했다.

“응. 조심히 가고. 내려가면 문자해. 잘 자.”


-응! 쪽!-

연희가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를 냈다. 수현이 그대로 따라했다. 둘은 작게 웃고 통화를 종료했다. 수현은 잠이 들어버린 토토를 조심히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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