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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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초콜릿 공장의 일을 마치고 연희가 생각나 초콜릿 몇 종류 얻어왔다. 여자친구 주고 싶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공짜로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셨다. 남자가 받는 날이라고는 하지만, 뭐 그게 문제가 되겠나.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다음 주에 주면 좋겠지만, 목요일 알바가 끝나고 곧바로 집으로 내려가는 연희였다. 그녀도 부모님의 자랑이니까. 명절의 주인공이 되러 가야했다.
수현은 가는 길에 예쁜 유리병 몇 개를 사서 간단히 포장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름대로 그럴싸한 느낌이 들었다.
수현이 카페로 들어서자 연희는 무언가를 수첩에 적고 있었다. 내용이 궁금하여 몰래 보고 싶기도 했지만, 수현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어? 왔어?”
연희가 고개를 들고는 볼펜을 내려두고 환하게 웃으며 수현을 반겼다. 조명이 하나 더 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어?”
수현이 궁금증을 아주 참지는 못하고 물었다.
“응, 그냥 일하다가 있던 일. 오늘 좀 실수 했던 거, 특별했던 거, 그런 거? 일기 비슷하게?”
연희가 말했다.
“꼼꼼하네...”
수현은 감탄하며 자리에 앉았다.
“응? 안 나갈 거야?”
연희가 왜 앉냐는 듯이 물었다.
“아, 너 다 안 쓴 줄 알고.”
수현이 말했다.
“음, 그럼 마무리만 할게.”
연희는 얼른 다시 볼펜을 들었다. 수현이 조금 남은 연희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연희는 정말 금세 글을 마쳤다. 그녀는 약간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다 했다! 이제 일어나자. 어? 이건 뭐야?”
연희는 수현이 올려놓은 쇼핑백을 이제야 발견했는지 물었다.
“음, 선물이라고 하긴 뭐하고, 그냥 간식거리?”
수현이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말했다. 연희가 궁금한 얼굴로 쇼핑백 안을 살펴보았다.
“어? 초콜릿이야?”
연희가 병을 꺼내보며 물었다.
“응. 내가 일한 곳이 초콜릿 공장이잖아. 얼마 후면 발렌타인데이기도 하고, 그 때는 설이라 못주니까... 생각난 김에 좀 가져왔어. 내 손길이 좀 들어갔으니 나름 수제다?”
수현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헐, 나 아직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연희가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1주일도 전인데 뭐. 나도 그냥 초콜릿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가져온 거야. 부담 갖지마.”
수현이 걱정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치... 사실 나도 주말에 준비해서 주려고 다 사다 놨는데... 이건 네가 좀 빨랐어!”
연희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을 흘기며 말했다.
“뭐 누가 좀 빠르면 어때. 안 그래?”
수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연희는 그렇긴 하지만...이라고 중얼거리며 병들을 전부 하나 하나 꺼내보았다.
“근데, 원래 발렌타인데이는 여자가 주는 거 아니던가?”
연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뭐, 그럼 화이트데이 때도 서로 소소하게 주면 되지.”
수현이 간단하게 말했다.
“아, 맞다! 이 말을 안 했네. 고마워! 잘 먹을게.”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른 말했다. 저런 점이 좋았다. 감사나 미안함을 표하는데 주저가 없다.
“빨간 리본 쪽이 다크고, 노란 리본이 밀크, 하얀 리본 두 개가 화이트랑 나머지들이야.”
수현이 병들을 설명했다.
“응! 잘 놔두고 하루에 하나씩 먹을게! 병도 예쁘다!”
연희가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럼, 저녁 먹으러 갈까?”
수현이 말했다.
“아, 맞다. 너 배고프겠다. 빨리 가자.”
연희가 얼른 말하며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수현이 그녀를 도왔다.
금요일의 지하철은 붐볐다.
연희는 수현의 품에 반쯤 안겨있었다. 수현은 팔로 봉을 잡은 채로 연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소주 마시자. 소주!”
연희가 소주를 넘기는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수현이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막창이 아니라 소주가 고팠구나?”
수현이 살짝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게.”
의외로 연희는 순순히 인정했다.
“술 좋아?”
수현이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연희가 술자리를 즐겨 참석했던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너랑 같이 제대로? 먹어보고 싶었어.”
연희가 조금 애매하다는 듯이 말했다.
“음, 하긴,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같이 취할 때까지 제대로 마셔 본 적이 없긴 하네.”
수현이 끄덕이며 말했다. 처음은 누구와 누구가 싸워서 그랬고, 그 이후로도 반주 정도였지, 제대로 취할 정도는 한 번도 없었다.
“오늘... 조심해.”
연희가 경고 어린 목소리로 그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수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요게 누가 취하든 누가 위험한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이분...일산 술고래를 몰라보시네.”
수현이 말했다. 연희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 무시하신 건가요?”
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설마요.”
그들은 왕십리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내릴 준비를 했다.
“흠, 도전을 받아들이겠어!”
수현이 말하면서 열린 문으로 나갔다.
“야아~, 미안해~!”
연희가 얼른 웃으며 따라 나왔다.
둘은 미리 인터넷에서 봐둔 집으로 향했다. 딱히 인터넷 맛집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희는 대창 상태가 좋아보인다고 했다.
“오, 그래도 사람도 많은데?”
연희가 자리에 앉으며 기대 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네. 맛집 맞나보다.”
수현이 겉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둘은 재빨리 주문을 마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온 사방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갑자기 너무 배고파졌어.”
연희가 약한 엄살을 부리며 말했다.
“나도 지금 배가 진동을 한다. 들려?”
수현이 말했다. 진심이었다.
둘은 나온 밑반찬으로 간단한 허기를 달랬다. 곧이어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둘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그들을 보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아주머니는 서비스라며 콜라 한 병을 주고 가셨다.
얼마 후, 소와 돼지의 내장이 지글거리며 익어가자 수현이 소주를 돌려 땄다.
연희가 잔을 내밀자, 술을 채워준 그는 병을 연희에게 건네주었다. 연희도 수현의 잔을 채워주었다. 둘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가벼운 대화거리들과 오늘 있었던 일들이 오고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특히 연희의 영화관 손님 이야기는 다양해서 재미가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취해갔고, 서로에게 먹여주고 웃었다.
“음, 걔도 힘들었겠다.”
연희는 얼마 전의 과외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해법이 괜찮았는지를 물어보는 수현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그 아이 마음이 좀 풀어졌으니까 괜찮은 답 아니었을까? 사실 네가 뭘 더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난 그냥 그 아이 마음이 풀어질 정도였으면 충분했다고 생각해.”
연희가 조금 더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그런가...”
“응. 난 그렇다고 생각해.”
연희가 다시 잔을 들며 말했다. 수현은 연희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잔을 부딪쳤다.
“너무 취할 것 같으면 먹지마.”
수현이 말했다.
“음, 이것까진 괜찮은 것 같아.”
연희가 말하고는 소주를 냉큼 넘겼다. 수현은 남은 볶음밥을 잘 긁어서 연희의 몫을 덜어주고 자신의 몫도 덜었다.
“이 것만 먹고 나가자.”
수현이 말하자, 연희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그녀가 제대로 취기가 올랐음을 눈치챘다.
“음, 잘 먹었다아.”
연희는 찬바람을 맞으며 팔을 벌리고 말했다.
“춥다. 이리와.”
수현이 연희를 불렀다. 연희가 쪼르르 그의 옆으로 붙어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나 취했나 봐.”
연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수현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좀만 천천히 가자.”
연희가 애교있게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의 속도를 더 늦췄다. 그도 천천히 걷는 게 더 좋았다.
“음, 나 아까 사실 약간 불안했다?”
연희가 조금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응? 뭐가?”
수현이 물었다.
“과외 여자애. 음, 이해는 다 되는데, 너한테 반할까봐? 안 그래도 잘생긴 과외 오빠면 로망인데.”
연희가 술기운을 빌려 말한다는 듯 조금 투덜대듯 말했다.
“응... 조심할게.”
수현은 이해가 갔다. 저번에 연희의 알바 남자동기를 봤을 때, 그도 은근한 경계심이 들었다.
“아니, 그냥... 그렇다구. 술기운이라고 괜히 투정 한 번 해본 거야.”
연희는 수현의 팔에 작게 머리를 부비며 말했다. 둘은 가볍게 몸을 기대고 지하철을 탔다. 술기운에 작게 꽁냥대는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질투를 일으켰고, 누군가에겐 추억을 불러왔다.
역에서 내려 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뒤늦게 역을 빠져나가는 인원이 되었다.
바짝 붙은 둘은 상기 된 얼굴로 서로에게 기댄 채 인적 드문 거리를 걸어갔다. 어둠은 묘하게 감상적이었고, 달빛은 묘하게 외로워보였다.
그들의 걸음걸음 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그들은 점점 말수가 줄어 오르막길을 반쯤 걸어 올라갔을 때는 발걸음 소리만이 주변에 울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거기엔 감추다 감출 수 없게 된, 날 것 그대로 드러난 욕망이 있었다.
수현이 주변을 재빠르게 살폈다. 치안이 안 좋아보이는 골목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그는 두 건물의 외벽 사이로 연희를 끌어들였다. 둘은 몸을 끌어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전과는 다른 절제 없는 입맞춤이었다. 조용한 길에 작고 물기 어린 소리가 퍼져 사라졌다.
연희는 거의 매달리듯 갈구했고, 수현은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하아-. 하아-.”
잠시 떨어진 틈에서 연희의 격한 숨소리가 울렸다. 마치 달리기라도 한 듯이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둘의 눈에서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수현이 연희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연희가 그의 숨결에 몸을 작게 떨었다.
“연희야. 지금부터 잘 선택해.”
수현이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중하게...선택해. 혼자 집까지 갈래? 나랑 같이 갈래?”
수현이 침을 삼키고 말했다. 연희가 그 의미의 속뜻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