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4
*
연희는 친구 지원과 통화를 하며 한참 옷을 맞춰보고 있었다.
-야, 나는 연희 네가 남친을 이렇게 빨리 사귈 줄은 솔직히 몰랐다.-
지원은 탄식하듯이 말했다.
“아, 아직 아니거든...”
연희가 부끄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애직 애니궈든~-
지원이 연희의 말을 따라하며 놀렸다.
“야!”
연희가 부끄러움에 소리질렀다. 상대편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알았어. 이년아. 눈이 하늘에 있는 애가 상경한지 일주일 만에 연애 상담하겠다고 전화했는데, 좀 놀리면 안 되냐?-
지원이 여전히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아직? 아~직~? 아직이면 곧 된다는 소리잖아?-
블라우스를 대보던 연희가 우뚝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보세요?-
“...야, 끊, 끊어.”
-알았어! 알았어! 아, 진짜! 안 할게! 진짜! 맹세!-
지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연희가 부끄러움에 약간 씩씩거렸다.
-근데, 솔직히 네가 뭐...연애 상담이 필요하냐? 물어보는 것도 죄다 별 의미 없는 것들이구만. 야, 넌... 남자한테 기어! 하면 부산에서부터 기어서 올 남자가 천만쯤 돼.-
지원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치, 말을 해도... 근데, 나도 좀 놀랐어. 처음 봤을 때도 좀 눈길이 가긴 했거든?”
연희가 볼을 붉히며 말했다.
-드디어, 연애사 시작을 말하는구만! 빨리 풀어봐. 지친 언니의 귀에생기를 주렴.-
“아...아직...아니, 남친 아니라니까...”
-아, 그래서! 처음 봤을 때는 그랬는데?-
지원이 스킵버튼을 누르듯 말했다.
“근데, 이야기 하다보니까 좀 잘 맞는 것도 있고, 향기가 되게 좋은 거야...”
-크~. 향기 무시 못 하지. 우리 연희가 향기에 약했네.-
지원이 추임새를 넣었다.
“너, 너도 그래?”
연희가 물었다.
-야, 암만 잘생겼어도 암내나면 환상 와장창이야. 암내나는 원빈, 암내나는 강동원 상상 가냐?-
지원이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말했다.
“그치? 여튼 그 향이 되게 좋으니까...약간 더 보게 되더라고.”
-그러다가 그때 그 일이 있었고?-
지원이 말했다. 그 일이 있고, 제일 먼저 전화를 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응.”
-뭐, 완전 운명적 만남 그런 거네...-
지원이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런가?”
연희가 순간 얼마 전에 본 영화가 떠올라 되물었다.
-그 정도면 운명적 만남 아니냐? 어? 뭐야? 아, 오빠! 야! 저 미친새끼! 연희야! 좀따! 엌! 이 개새!-
지원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연년생 오빠와의 2차전이 시작된 것 같았다. 연희는 작게 웃으며 꺼진 핸드폰을 봤다.
연희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운명적 만남.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았다. 그와 엮였던 일들은 대부분 일반적이지 않은상황이었다. 연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혹시 ‘썸머’이고 자신은 ‘톰’이 아닐까? 그녀는 톰이 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이 보고 싶은 상대의 면만을 보고 사랑한 사랑. 운명적 사랑에 취한 자신을 사랑한사랑. 그녀는 잠시 뒤척였다.
*
수현은 받은 용돈으로 최대한 생활하며 나머지 돈들은 최대한 기아차 주식을 매입하는데 힘썼다. 현대차나 현대모비스보다 더 저렴했기에 주식을 다량으로 매입할 수 있다는 것이 일단은 제일 큰 이유였다. 그 변동 폭이 더 클 가능성도 높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천천히 코인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현재는 시작하는 단계라서 시장도 형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채굴에 대해서 고민했다.
주식 시장은 큰 강줄기 혹은 바다와 같았다. 수현이 거기에 조금 발을 담근다고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나비효과라는 것도 있지만, 항상성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코인은 달랐다. 코인은 현재 너무 작은 시장이라, 아주 작은 충격에도 미래가 변할 수 있었다. 수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채굴 생각은 접었다.
적어도 5월까지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5월에는 비트코인의 실물거래가 있는 ‘피자데이’가 있는 날이었다.코인을 믿는 사람들은 그 것을 비트코인이 ‘거래적 가치’가 있는 화폐가 된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계속 이어져 비트코인이 하나에 수천만 원까지 거래가 되도록 했다.
또한 2010년은 중공업 쪽이 요동친 시기였는데, 5월 쯤이 중공업이 밑바닥이었다. 이건 당시 2학기 동아리 홍보 때, 투자동아리의 어떤 형이 자랑처럼 늘어놓았던 STX 2배 신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던 운이었다. 수현은 5월에 크게 별을 그려두었다. 수현은 중공업 쪽은 지금 부터 ELW(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옵션의 일종)도 주기적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stx의 경우에는 초반에 오르다가떨어지고 다시 크게 오르는 그래프였다. 그 형은 자신이 연초에 들어갔으면 4월쯤 떨어질 때 뺐을 것이라며 그것 만큼은 운이 좋았다고 웃었다.
그는 플래너를 덮었다. 전에 공책에 써둔 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작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는 일일 변동은 알 수 없었으므로, 하루하루의 계획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1월11일의 풋옵션사태 같은 일, 11년도 3월 중순의 도쿄 지진 같은 것을 체크해두고 그 주변의 다른 계획들(예를 들어 엠티같이 바로 대처할 수 없는 상태.)와 겹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불편한 게 역시많았다. 그는 관련 사업들에도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플래너를 열었다. 맨 뒷장에 간단하게 플랫폼 관련 사업이라고 써두었다. 배달앱, 소개팅앱 등이 바로 떠올랐다. 카톡은... 벌써 나왔나 그럴 것이다. 늦었다.
수현은 진짜로 플래너를 덮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침대에 눕자 이번에는 다음날 만날 연희가 떠올랐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귀자고 하면 역시 빠르게 느낄까부터 시작해서, 너무 ‘첫사랑’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톰’은 ‘썸머’에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때론 자신이 원치 않는 부분의 그녀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썸머’를 사랑했다기 보단, 자신이 생각하는 ‘썸머’를 사랑했다. 그녀는 ‘첫사랑’일까, ‘연희’일까.
*
수현은 전날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신촌역 안을 서성였다. 어제의 나름 심오했던 고민들은 그저 쓸데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그저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만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어? 수현아!”
연희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개찰구를 나왔다. 수현은 하마터면 그녀를 안아버릴 뻔한 손을 주머니에 더 꽉 찔러 넣고 있느라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많이 기다렸어?”
수현의 동작에 추위로 그런 줄 알았는지 연희가 물었다.
“지하철 갈아타는 게 좀 빨랐더니 의외로 일찍 와 버렸어.”
수현은 거짓말을 했다.
“춥겠다. 학교는 다음에 돌아볼까? 오늘 날 좀추운 것 같긴 해.”
연희가 약간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냐. 오전 중에 풀린데. 점심 먹고 좀 있다가 느긋하게 돌아보자.”
수현이 일단 밖으로 가자는 제스쳐를 취하며 말했다.
“아, 그래? 다행이다. 그럼 밥부터 먹자.”
둘은 근처의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저녁은홍대에서 유명한 치킨과 맥주를 먹기로 했으니, 점심은 밥을 먹기로 한 것이다.
“음, 난 이상하게 한 끼는 그래도 밥을 먹어야 되더라.”
연희가 밥을 꼭꼭 씹어 넘기고는 말했다.
“한국인이다 이건가?”
수현이말했다.
“넌 안 그래? 내 친구 중에는 밀가루만 먹어도 된다는 애들 있는데, 신기하더라.”
연희가 진심으로 그렇다는 듯이 말했다. 수현이 피식 웃었다. 그의 지난 식단을 보면 그녀는 놀랐을 수도 있었다. 밀도 쌀도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음, 난 고기류가 꼭 있어야 되는 것 같아.”
수현이 말했다. 연희가 생각해보니 그 것도 중요하다는 듯이 끄덕였다. 수현이 퍽 진지하게 끄덕이는 그 모습에 웃어버렸다.
둘은 밖으로 나와 조금 고민을 했다. 바로 카페에 가자니 배가 불렀고, 학교로 가자니 아직 추위가 조금 덜 풀렸었다.
“음, 추운데 카페부터 들렀다가 갈까?”
수현이 물었다.
“음, 소화 좀 시키고 싶은데,많이 추워?”
연희가말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몸매 관리 비법은 꾸준한 움직임 같았다.
“아니. 너 추울까봐. 나도 소화 좀 시키는 게 더 좋아. 단 거 먹을 거잖아.”
수현이 말하자, 연희가 피식 웃었다.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어.”
“도전해보는 거지. 가자. 학교. 한 바퀴 돌면 얼마나 걸릴지 궁금하네.”
수현이 학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간단하게만 보자. 경영관까지 쭉 그냥 걷고 와보자. 중앙도서관 잠깐 들르고.”
연희가 말했다.
“그래. 중간에 총장관에서 사진 하나 씩만 찍고.”
수현이 필수코스를 말했다.
“아! 맞다. 거기도.”
연희가 냉큼 받았다. 둘은 얼른 신호등을 건너 정문을 통과했다. 학교는 시원하게 뻥 뚫려있었다.
“난 우리 학교 이게 좋더라. 시원하게 쭉뚫려 있는 맛.”
수현이말했다.
“음, 맞아. 다른 학교들은 다 산에 막 굽이 굽이 있더라구.”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둘은 중도에서 서로 한 장씩, 총장관에서 서로 한장씩을 찍어주었다.
“둘이 같이 찍어줄까요?”
그들을 보던 한 부부가 말했다. 어린 아이와 놀러 온 것 같았다.
“네? 아...”
둘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커플 아닌가?”
남편 쪽의 질문에 둘은 서로의 붉어진 얼굴만 힐끔 바라 보았다.
“같이 서 봐요. 찍어줄 테니.”
알만하다는 듯이 웃은 아내 쪽이 말했다. 둘은 어색하게 붙었다. 부부는 둘을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딱 우리 cc때 보는 것 같네.”
남편 쪽이 말했다. 수현과 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은 풋풋하지 않았죠. 예비군 아저씨가 신입생 꼬셨으니...”
아내 쪽이 남편을 툭 치며 말하고는 웃으며 그들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두분 cc셨어요?”
연희가 신기하다는 듯이물었다.
“네. 그래서 둘 보고 옛날 생각나서 말 걸어본 거예요. 아줌마, 아저씨 주책이려니 해줘요.”
아내 쪽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남편 쪽으로 달려와 매달렸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수현이 핸드폰을 돌려 받으며 말했다. 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말이 없었다.
“신기하다...cc로 만나서 결혼까지 하시고... 거기다 아내 분은 신입생이셨다니까 첫사랑이신 거잖아.”
연희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러네. cc에 첫사랑.”
수현이 중얼거렸다.
경영관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점점 강해져서, 둘은 차분하고 부끄러운 발걸음이 아닌 전투적인 발걸음으로 바꿔야 했다. 둘은 그래도 온 것, 찍고는 가야겠다고 합의를 봤다.
“머리 봐. 또 이렇게 됐네.”
수현이 자기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둘은 아래로 내려와 걸음을 옮기며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그러게. 그래도 나름 좋은 경험이잖아. 학교 올때는 머리 신경을 굳이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망가질 가능성이 높다.”
연희가 말했다.
“음, 그럴지도. 그리고, 따듯한 거 먹고 싶어졌어. 카페 가서 달달한 거 먹어보자. 지금이면 웬만큼 달아서는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수현이 살며시 연희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연희는 잠시 움찔했지만,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둘은 그렇게 조금 더 가까워진 상태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