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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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의 목요일 일정은 두 모녀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된 것 같았다. 안주인은 자연스럽게 맛있는 음식 냄새를 올려 보냈고, 수현과 소현은 어색한 미소를 서로 주고받았다. 두 모녀의 성품 또한 모나지 않았으므로, 식사시간은 적당히 즐거웠다.
수현은 공손하게 과외비를 받아들고 인사를 했다. 20살짜리가 진수성찬까지 얻어먹으면서, 이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수현은 즐거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하!”
그가 대문에 대가서자, 여자의 기가 차다는 탄식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소현의 언니, 소향이 그를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수현이 딱히 할 말이 없어 인사를 했다.
“안녕 못하겠는데? 야, 너 나보다 우리 집 자주 드나드는 것 같다?”
소향은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뭔가 저번부터 오해 하시는데, 저 과외교사로 온 겁니다.”
수현이 말했다.
“뭐?”
“소현이는 제 여자친구가 아니라, 제 학생이고요.”
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몇 살인데요?”
소향이 애매하게 물었다.
“20살입니다. 올해 신입생이에요.”
수현이 말했다.
“나보다 어린데 선생이라고?”
소향이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제가 수능을 잘 봐서요.”
수현도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지는 않았기에 말이 곱게 나가지는 않았다. 예쁘기야 그가 본 사람 중에 연희 말고는 더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지만, 외모만으로 단점을 가리기에는 연희라는 벽이 컸다.
소향이 약간 띠껍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 우리집... 밥 먹었냐?”
소향이 물었다.
“네. 방금 먹고 나오는 길입니다.”
수현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씨...”
소향이 궁시렁거리며 욕을 중얼거렸다.
“야, 돈 좀 있냐?”
소향이 물었다. 수현이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이건 진짜 양아치가 아닌가?
“왜요?”
“나...밥 좀 사주면 안 되냐?”
소향이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서 밥 달라고 하면 주실 걸요?”
수현이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씨, 며칠 만에 들어와서 밥 달라고하면 쪽팔리잖아. 밥 먹는 동안 여사님 잔소리도 들어야 된단 말이야.”
소향이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남한테 밥 사달라고 하는 것 보다 그게 더 쪽팔린 건가 싶었지만, 수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했다기 보다는 고객네 딸내미와 지나치게 척을 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뭐 드실래요?”
수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설렁탕. 여기 좀만 가면 24시 있어.”
의외로 그녀는 평범한 메뉴를 말했다. 수현은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소향은 따뜻한 국물이 나오자마자 국물부터 마시더니 밥을 말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며칠 굶었어요? 천천히 먹어요.”
수현이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어제 저녁부터 못 먹었어. 아빠가 결국 카드 막았더라고. 시발...오늘 아침에도 호텔 결제 하는데, 사촌 오빠한테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
수현이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이며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소향이 그를 힐끗 보다가 다시 먹는 것에 집중했다. 수현은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확인했다. 아침에 조금 늦어서 문자확인도 여태껏 못했다.
“어?”
의외의 문자가 있어서 수현은 잠시 멈칫했다. 민형에게서 새벽에 온 문자였다.
-야. 나 김민형. 저번에는 미안했다. 다음에 밥 한 번 살게. 그리고 말려줘서 고마웠다.-민형
혹시 자기 번호가 없을까봐 이름을 적어서 보낸 문자였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김민형 인생에서는 상당히 고개를 숙인 문자였다. 친하게 지낸 건 아니었지만, 김민형 입에서 고맙다, 미안하다가 나온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현금으로 해결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현은 어젯밤 연희와 짧게 주고받은 문자도 눈에 띄지 않을만한 충격이 있었다.
“뭐야? 뭘 봤는데 그래?”
소향이 그의 눈치를 보다가 궁금한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에요. 친구가 생전 안 하던 소리를 해서.”
수현이 적당히 말하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유언은 아니지?”
“그랬으면 뛰어 나갔겠죠. 밥이나 마저 드세요.”
수현은 참 미운 말만 골라한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야, 근데 넌 좀 신기하다.”
소향이 어느정도 배가 찼는지 먹으면서 말했다.
“뭐가요?”
“아니... 보통 이런 경우면, 뭘 물어보든 잔소리를 하든... 그러잖아. 근데 그러지않으니까.”
소향이 약간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것도 애정이 있어서 하는 거죠.”
수현이 별 이유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말 되게 싸가지 없게 한다, 너...”
소향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냥... 깊은 사이 아닌데,뭐라 말하는 게 웃기잖아요. 내가 모르는 부분도 많고, 해결해 줄 수도 없고. 솔직히 그럴 이유도 없고. 괜히 뭐라 말하는 것도 상처일 수 있고. 그냥 이 정도만 하고 싶은거죠. 서로...”
수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고객 가족과 싸워서 뭘하나. 게다가 돈까지 쓴 마당에. 그럼 적자였다.
소향은 작게 콧소리를 내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완전히 바닥을 긁는 걸 보니, 확실히 내내 굶기는 한 것 같았다.
“아, 잘 먹었다. 어쨌든...고맙다.”
소향이 식당문을 나서며 말했다.
“네. 그럼 이제 집 들어가세요.”
수현이 말했다.
“뭐라 말 안 한다며?”
소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아, 맞다. 야, 너 무슨 향수 쓰냐?”
소향이 물었다. 수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이래서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한 것이었는데...
“향수 안 쓰는데... 많이들 물어보더라구요. 누나는 무슨 향처럼 느껴져요?”
“뭐? 그래? 음...첨에는 되게 꼬릿하고 이상한 냄새였거든? 근데 지금보니까 베이스가 화이트머스크향 계열 향수 같았어. 여튼 꽤 좋아.”
소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거...다행이네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수현은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몇몇 여자들이 말했던 것들이었다. 우디, 머스크, 시트러스... 지금도 잘 모르지만, 일단은 대충 호감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고객과의 친밀도가 높으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수현은 걸음을 옮기며 민형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예전의 민형을 떠올려보면 그가 저번의 일로 사과를 할 만한 위인일까 싶었다. 그를 말린 사람들은 꽤 있었고, 심지어 그에게 당한 사람도 있었지만, 한 번도 사과를 듣거나 감사를 들은 사람이 있다는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흠...”
수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소화도 시킬 겸 집까지 걸어가며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당일엔 어땠지? 미친 듯이 싸우던 애들을 말리고... 분명 엄청 흥분 상태인 민형을 진정시켰다. 분명 이때만 해도 그는 그다지 취해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약이라도 한 듯 그는 퍼져 버렸었다. 물론 갑자기 취기가 올라올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좀 과해보였다.
“흠, 너무 최근 향에 집중해서 이쪽으로만 생각하는 건가...”
수현이 혹시 자신이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여, 여보세요.-
민형은 한참만에 어색하게 전화를 받았다.
“응, 민형아. 문자를 좀 늦게 봤다. 미안.”
-어, 어? 아... 뭐... 굳이 전화할 필욘 없었는데...-
민형은 어색하게 말했다.
“너무 신경쓰지마. 아무도 안 다쳤잖아. 싸울 수도 있지. 남자끼리. 안 그러냐? 걔랑은 어때?”
수현은 일부러 민형을 조금 맞춰주었다.
-뭐, 시발놈이... 적반하장으로 계속 굴길래... 아직 좀...-
민형은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 걘 괜찮냐? 그...연희-
민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응... 좀 놀라긴 했는데, 잘 진정해서 집 갔어. 담에 꼭 사과해라.”
수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 씨발...-
민형이 주눅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그나저나 그날 괜찮았어? 난 너 갑자기 축 늘어져서 좀 놀랐는데.”
수현은 연희 생각에 울컥하는 것을 참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 아... 그니까... 나도 좀 신기한 게... 내가 솔직히 한 번 꼭지 돌면, 뭐 하나 제대로 부숴야 되는데... 그 날, 네가 막 잡고 진정시키니까 갑자기 중간부터 막 기분이 가라앉고 몸도 풀리는 느낌이 있는 거야... 그 뒤로는 나도 모르게 잠든 것 같아.-
민형은 자신도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약이라도 맞았냐?”
수현이 일부러 킬킬거리며 말했다.
-아, 맞아...진짜 무슨 되게 진정되는 냄새 같은 게 나기도 한 것 같아...-
민형이 수긍하며 말했다. 수현은 속으로 아싸를 외쳤다.
“어쨌든 잘 정리되긴 했어도, 나중에 연희한테 사과는 해.”
수현이 다시 당부했다.
-그래...-
민형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쉬어라. 너무 맘에 담지는 말고.”
수현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 고맙다.-
전화를 끊은 수현은 향기의 효과가 그저 감정 컨트롤만이 아니라 신경적 작용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감정도 어차피 호르몬과 신경의 조화 아닌가... 그는 이 능력이 생각보다 대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