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2
수현은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알아냈다. 이미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정말로 있는 경우에는 한 번도 먹힌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능력은 만능으로 누굴 꼬신 다기보다는, 첫인상 보정 효과 정도에, 상대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효과인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를 싫어하게 된 사람은 정말로 미친 듯이 그를 싫어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수현은 그런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시간 보다 40분 이른 시간이었다. 연희는 알바 면접을 보고 온다고 했으므로, 그는 카페에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정리되기 전의 신촌거리를 보니, 무언가 색다른 맛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은근히 지난10년 동안도 바뀐 것이 많았다.
수현은 약간 늦을 것 같다는 미안함이 가득한 문자를 받고는 괜찮다는 답장을 보내고는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 있던 여자 한 명과 눈이 마주치고, 수현은 싱긋 웃다가 스스로 놀라 얼굴을 돌렸다. 이틀 이 짓을 했다고, 버릇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여자들이 그의 뒤를 스쳐지나갔다. 수현이 그녀들이 내려가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금 더 창밖을 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점심을 먹을 것 같으니,굳이 연희가 올라올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다.
수현이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가는 찰나, 그는 위층에서 눈이 마주쳤던 여자와 다시 마주치고는 당황스런 얼굴이 되었다.
“아!”
여자가 마치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카페를 나온 그를 보며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주변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없었다. 수현은 무언가 불안감이 엄습함을 느꼈다.
“...저기요.”
여자가 약간 헛기침을 하고는 수현을 불렀다.
“저...요?”
수현이 대답했다.
“네.”
여자가 살짝 수현의 눈치를 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혹시... 번호 좀 주실 수 있어요?”
그녀는 제법 당당하게 말했다. 약간의 수줍음과 당당함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나름대로의 미모에 자신이 있는 여자가 지을 수 있는 그런 류의 표정인 것 같았다.
“수...현아?”
젠장!
수현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연희와의 첫 데이트(그 나름대로는 그런 의미부여를 했다.)인데, 시작이 좋지 않았다. 여자의 표정도 굳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길을 잘 몰라서.”
수현이 얼른 말을 하고는 뒤를 돌았다. 연희가 약간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왔어? 연희야?”
여자는 빠르게 아, 네...라는 말을 어색하게 남기고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넣고 뒤를 돌아 사라졌다. 수현은 여자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연희의 오해에 대한 불안으로 마구 두근 거렸다.
“길...물어보신 거야?”
연희가 물었다.
“응. 우리도 여기 잘 모르는데...하하.”
수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흐음...난 경영 훈남 1호가 벌써 품절남 되나 했지~.”
연희가 콧소리를 내며 살짝 놀리듯 말했다.
“어? 서...설마. 그리고 무슨 훈남은...”
수현이 말을 절었다.
“가자! 뭐 먹고 싶어? 남자애들은 뭐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서...”
연희가 뭔가 툭 털어내듯 말했다.
“사주는 사람이 좋아하는 거 먹어야지. 나 가리는 음식 없어.”
수현이 냉큼 연희의 옆으로 따라 붙으며 말했다.
“음, 그럼 저녁은 너 좋아하는 거 먹고, 점심은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을 게.”
연희는 간단하게 정리했다. 수현은 저녁도 먹자고?라는 말을 목구멍에서 막았다.
둘이 들어온 곳은 평범한 파스타 집이었다. 크림파스타와 토마토소스파스타를 하나 씩 시킨 그들은 조금씩 덜어서 먹기 시작했다.
“되게 잘 먹네?”
연희는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들도 이런 거 좋아해. 남자끼리 못 와서 그렇지.”
수현은 음식물을 넘기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음, 왜 그러지?”
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좀 남자끼리 오면... 시선도 그렇고, 분위기가 좀 커플 느낌이고 그렇잖아. 남자끼리는 그런 거 소름 돋고 그러니까...”
수현이 간단히 설명했다.
“음, 그렇구나... 하긴 생각해보니까, 내 동생도 가족끼리는 잘 먹었어. 맨날 친구랑 가는 곳이 닭갈비 이런 곳이었지.”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생? 남동생이 있어?”
“응. 이제 중3. 아주 누나를 물로 봐.”
연희는 동생에 대해 씹으면서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사이 사이에 애정이 묻어 있어서 둘 사이가 사실은 꽤나 좋다는 것이 느껴졌다.
“수현이 넌... 약간 느낌이 누나 있을 것 같아. 아님 나이 차이 나는 여동생.”
연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적당히 마치고는 수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땡. 완전 틀렸는데.”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음, 아니야?”
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나 외동이야.”
“아, 진짜? 전혀 외동 같지는 않았는데...”
연희는 진짜로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왜?”
“음... 뭔가 외동은 좀 자기중심적일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형제가 없으니까... 그런 느낌인데, 넌 뭔가 막 분위기 정리하거나, 배려하거나 그런 것도 잘 하니까... 누나나 어린 여동생 있을 것 같았어.”
연희가 약간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긴, 생각해보니까, 내 동생은 누나가 있는데도 그 모양이네.”
연희가 뒷말을 덧붙였다. 수현이 그녀의 말에 웃었다. 둘은 가벼운 대화를 하며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저녁은 내가 살게.”
수현이 건물을 나서며 말했다.
“음, 좋아. 대신 중간에 할 건 내가 낼 게! 오늘은 내가 고마워서 불러냈으니까!”
연희가 간단하게 정리했다. 수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알바 면접은 잘 했어?”
수현이 길을 걸으며 물었다. 어떻게 보면 괜한 질문이기도 했다. 어떤 사장이 이정도 알바를 안 쓰겠다고 할까? 그냥 세워만 둬도 매출 상승에 도움이 될 미모인데.
“응. 한 군데는 가보니까 말이 달라서... 안 하기로 했고. 영화관은 다음 주부터 하기로 했어! 아, 우리 영화 볼래? 영화 좋아해?”
연희가 재잘거리며 말했다.
“영화 좋지. 요즘 뭐 하지? 어디 영화관 알바야? 신촌? 아니면 자취방 쪽?”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촌! 아트레오라고 여기서 가까워! 거기 가서 볼까?”
연희가 잘 됐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오전엔 말단 면접 보러 갔다가 이젠 왕 같은 고객으로 가네?”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연희가 킬킬 웃었다.
둘은 영화관에 들러 [500일의 썸머]를 예매하고 근처의 카페에 앉았다. 둘은 학교에 대한 이야기로 잠시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채플에 대한 이야기, 시간표에 대한 이야기, 엠티에 대한 이야기.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
기대에 찬 새내기의 눈은 설렘으로 차있었고, 수현은 때때로 냉혹한 현실을 알려주어 설렘을 깨뜨리고 싶은 짓궂음과 싸워야했다. 그는 종종 지나치다 싶은 환상에만 적당히 각색한 자신의 의견과 현실적 이야기를 주워들은 척하며 조금씩 풀어냈다.
“음, 시간 다 됐다. 우리 다음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고 다른 것도 먹어보자.”
연희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일어날 준비를 하며 말했다.
“음, 대부분 달지 않나?”
수현이 트레이를 들고 일어나며 물었다.
“음, 그렇긴 하겠지? 왜? 단 거 싫어해?”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굳이 찾아 먹진 않는 정도? 근데 쌉쌀해서 그런지 초콜릿 종류는 좋더라구. 그래서 시험장용으로는 항상 초콜릿.”
수현이 컵정리를 하며 말했다.
“아하!”
“가자.”
수현이 별 생각 없이 손을 슬쩍 내밀다가 주머니에 어색하게 손을 넣었다. 둘은 방금의 상황을 모른 척하며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둘 모두 점심을 배불리 먹어서 음료만 들고 입장했다.
영화의 내용은 남자 주인공 톰이 운명의 여인이라고 믿는 썸머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톰은 그녀를 운명으로 여기고 사랑했지만, 썸머는 그에게 구속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둘의 서로에 대한 다른 생각과, 관계에 대한 다른 정의는... 결국 관계의 끝을 가져온다. 둘은 나중에 다시 재회 하지만, 썸머는 다른 운명의 남자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리고 톰은 어텀이라는 운명을 스스로 만들며 끝난다.
“음, 생각보다 주제가꽤 의미있네.”
연희는 단순히 러브코미디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내용과 연출이 재미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네. 근데, 내가 남자라 남자 주인공에 이입 되어서 그런가 좀 기분이 깔끔하진 않네.”
수현이 솔직하게 말하자, 연희가 크게 웃었다.
“약간 질질 끄는 어장느낌인가?”
연희가 물었다.
“음... 좀? 물론 남자애도 좀 이기적이고 그런 부분이 있긴 한데...”
수현이 끄덕이며 말했다.
“키스는 아니었다?”
연희가 말을 이어받았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외국은 다른지 몰라도... 남녀가 키스하면 그건 완전 사귀는 거 아닌가?”
연희가 약간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수현이 말했다. 둘은 작게 웃었다.
“시간이 좀 애매한데, 배 안 고프면 우리 학교 잠깐 돌아보자.”
연희가 그에게 제안했다.
“발 괜찮겠어?”
수현이 그녀의 구두를 보며 말했다. 저번의 하이힐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편한 것 같아보이진 않았다.
“응? 아, 괜찮아. 오늘 많이 걷지도 않았고. 내가 너무 학교에 대한 환상이 큰 가?”
연희가 살짝 민망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솔직히?”
수현이 장난스레 말했다. 연희가 괜히 그의 팔을 툭쳤다.
“아야!”
“아픈 척은... 힘도 좋으면서. 우리 동네 근처로 가끔 엠티 오는 언니 오빠들 마주치면 막 신기하고 그렇더라구. 그래서 막 환상이 생긴 것 같아. 과잠도 괜히 뭔가 멋져 보이고.”
연희가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
“뭐, 나도 그렇긴 했어. 난 고3때 학원 가는데, 쓰레빠에 고대 과잠 입고 편의점 들어가는 거야... 엄청 부럽더라. 편의점 들어가는 건데 부러워 보이더라구.”
수현의 말에 연희가 웃었다.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아? 굳이 과잠 안 입어도 될 텐데, 입은 거 보면 보여주려고 그런 것 같단 말야...그 시간에, 굳이 학원가에...”
수현이 의심간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학교 합격한 부분에 그 분의 기여도가 조금은 있지 않을까?”
연희가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럴지도...”
둘은 그렇게 실 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둘은 학교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 했다. 유난히 바람이 심해서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은 머리가 많이 날린 채로 정문을 빠져나왔다. 둘은 서로의 머리를 보며 킬킬거렸다.
“바람이랑 싸우느라 그런지 배고프다. 뭐 먹지?”
수현이 신호등을 기다리며 말했다.
“음, 너 먹고 싶은 거 먹자고 했잖아.”
연희가 가볍게 말했다.
“음, 이자까야 같은 곳 가서 반주에 저녁 먹을까? 따뜻한 탕 먹고 싶다.”
수현이 잠깐 생각하다가 국물에 가벼운 반주 생각이 나서 말했다.
“응! 좋다! 나도 바람 좀 맞으니까 국물 먹고 싶다.”
연희가 동의하고, 신호등이 바뀌자 그들은 재빨리 길을 건너 이자카야를 찾기 시작했다. 수현은 기억을 더듬어 가끔 가던 이자카야를 기억해냈다. 그게 1학년 때도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맛은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었다.
“어? 금방 찾았네?”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마트폰이 없는 게 꽤나 불편했지만, 대신 수현에겐 경험이 있었다.
“아까 지나오면서 봤거든.”
수현이 말했다.
“기억력도 좋으시고?”
연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둘은 코트를 여미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가격이 좀 있네...”
연희가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 나 내일 과외비 들어오는 날이야.”
수현이 걱정말라는 듯이 말했다.
“헐, 너 과외도 해?”
연희가 부러움 반, 놀라움 반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응. 친구가 연결해줘서...”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희가 작게 탄성을 냈다.
수현은 모듬꼬치와 탕세트를 시키고 생맥주 두잔을 시켰다.
“사케 사주고싶은데, 내일 오전 과외라 취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미안.”
수현이 메뉴판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냐. 당연히 그래야지. 그나저나 진짜 부럽다...”
연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너도 영화관 알바 꼭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면, 과외 한 번 구해보는 게 어때?”
수현이 말했다.
“...나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난 최저 맞춰 온 거라... 서울에서는 과외 못 할 것 같더라구. 영어가 1등급이긴 한데, 잘 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수현은 내심 놀랐다. 학점은 꽤 좋았던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영화관 알바도 해보고 싶었어. 나 영화 좋아하거든.”
연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영화관 알바하면 무료 관람하고 그럴 수 있나?”
“글세, 가능하지 않을까? 막 친해지면 그냥 들여보내줄 것 같은데?”
연희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건 범죄 아닙니까?”
둘은 다시 분위기를 살려 웃었다. 음식은 적당히 맛있었고, 술은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하도록 해주었다.
“그럼, 잘 가.”
수현이 신촌역 앞에서 연희를 배웅하며 말했다. 말끝에 아쉬움이 살며시 묻어있었다.
“응. 너도 조심히 가.”
연희도 무언가 뻣뻣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산뜻하지 않았다.
수현도 돌아섰다.
“아, 연희야.”
수현이 다시 돌아서며 연희를 불렀다.
“으, 응?”
내려가던 연희의 몸이 빠르게 돌았다.
“토요일에... 뭐해?”
수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
“토요일 시간 있어?”
수현이 다시 또렷하게 물었다.
“어, 응.”
연희가 말했다.
“그럼 토요일에 볼래? 일찍 학교도 돌아보고, 카페에서 단 것도 먹어보고.”
수현이 볼을 살짝 긁적이며 말했다.
“응! 그러자!”
연희가 꽃이 피듯 웃으며 말했다.
“응...그럼. 토요일에 봐. 조심히 가.”
수현이 드디어 아쉬움 없이 인사를 했다.
“응! 너도 조심히 가! 안녕!”
연희의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수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한 시간에 한 대 뿐인 경의선을 타기 위해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