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08
수현은 토요일 오전부터 쇼핑을 나갔다. 과외를 위해 괜찮은 옷들을 열심히 돌려 입다보니, 그나마 입을 만한 옷들이 모두 동이 났기 때문이다.
간단한 슬렉스와 무지 맨투맨을 산 그는 모노톤으로 전체를 코디했다. 렌즈도 곽으로 구매해 준비했다. 다행히 도수에 맞는 게 있었다.
산책과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샤워까지 끝낸 수현은 시계를 보며 살짝 혀를 찼다. 생각보다 시간이 일렀다. 운동을 조금 더 해도 되었을 시간이었다. 그는 그냥 조금 더 일찍 가있기로 생각을 고쳐먹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당일에 산 옷과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코트를 입으니 그런대로 깔끔한 태가 났다.
수현은 코를 골며 자고 있는 토토의 코를 괜히 한 번 괴롭혔다. 잠결에 코를 킁킁거리는 모습을 본 수현은 작게 키득거리다가 집을 나섰다. 아직 해가 떠 있어서 그런지, 날이 그리 춥지는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신촌으로 향하자, 무언가 여태까지 느끼지 못한 신입생으로 돌아온 기분이 진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안 맞는 옷을 입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신입생. 이 얼마나 풋풋한 단어인가. 때묻지 않은.
신촌역을 나오는 길도 추억이 흩어져있었다. 그는 일찍 온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밖은 해가 저물어 꽤나 쌀쌀해져 있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수현은 추억을 곱씹는 것을 잠시 멈추고 빠른 걸음으로 현대백화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으...바람...”
수현이 몸을 살짝 떨며 현대백화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그는 머리를 정리하다가 순간 손을 멈추고 한 사람에게 시선을 멈췄다. 김연희였다.
눈이 마주치고 잠시의 갈등이 있었지만, 수현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서로 아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는 괜히 밖을 보는 척하며 시간을 떼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힐끔 다시 본 연희는 여전한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직은 약간의 앳된 티가 있는, 화장이 조금은 어색한, 그런데 그 마저도 풋풋한 아름다움으로 보이게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수현은 괜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신기하고 대단했다. Y대 신입생, 그 중에서도 경영학과라면 열에 일곱 여덟은 첫사랑이 김연희였다. 그리고 그녀의 미모는 10년을 넘어온 사람에게도 또다시 적용될 만한 미모인 것 같았다. 수현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서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도 아니고 이걸 무어라 말해야 할까.
여러 사람이 오고 나가는 동안 둘만큼은 거기 그대로였다. 물론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은 연희였고. 연희는 슬슬 멋쩍은 듯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기어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아직도 한참 남았네....”
연희가 울상을 지으며 입을 삐쭉였다. 그녀는 생각보다도 더 이르게 온 것 같았다. 수현이 슬쩍 뒤를 돌았다.
“저기, 혹시 연대 경영 10학번이세요?”
수현이 약간 긴가민가한 표정을 연기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스로가 가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 맞아요! 혹시 어...김병훈씨?”
연희는 약간 움찔하다가 환해진 얼굴로 손뼉을 작게 치며 반가워했다.
“아뇨. 전 그냥 오는 멤버에요. 황수현이라고해요.”
수현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아! 그렇구나! 근데 어떻게 딱 알아봤어요?”
연희는 드디어 말 상대가 나타나 기쁘다는 듯이 그의 손을 잡고 작게 방방 뛰었다. 그 모습이 딱 20살의 천진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귀여웠다.
“그냥, 우리 둘만 계속 기다리는데...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하길래 찔러봤죠.”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연희가 뭐가 되었든 좋다는 듯이 방실거렸다.
“아,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수현이 물었다.
“아, 맞다! 너무 반가워서 제가...”
연희는 민망하다는 듯이 긴 머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전 김연희라고해요! 반가워요!”
연희가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많이 일찍 오셨나봐요.”
수현이 약간 당황해서 말하자,연희는 방방 뛰던 것을 멈추고 볼을 붉혔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청순함을 더했다.
“그게... 첫 정모라고 들떠가지고 시간 잘못 보고, 늦은 줄 알고 엄청 뛰어 온 거 있죠? 와봤더니 아무도 없고, 그래서 시계를 다시 봤더니, 헐. 한 시간도 넘게 일찍 온 거예요... 완전 바보 같았죠? 그렇다고 다시 집에 갔다가 올 수도 없고... 전 지방 살다 온 거라 서울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도 아직 잘 모르고...그래서 그냥 백화점이나 좀 구경하다가 재미없어서 그냥 내려와 있었어요!”
연희는 한참을 떠들다가 혼자 헤헤하고 웃어버렸다.
“어쨌든 혼자 20분 더 기다리려니 지루할 뻔 했는데, 완전 반가워요!”
“그래도 백화점인데, 볼 거 많지 않았어요? 여자들은 막 보는 걸로도 스트레스 풀고 그런다던데...”
“아, 너무 비싸서 그냥 나왔어요. 뭔가 점원 언니들도 좀 부담되고... 분위기도 그렇고.”
연희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하긴... 음, 우리 여기 말고 카페 가 있을까요? 여기서 다 모이기도 좀 눈치보이고, 밖은 너무 바람 불어서...”
수현이 연희에게 가볍게 권했다. 그녀는 힐을 신고 있었는데, 딱 봐도 그리 자주 신은 것이 아니었다.
“아, 좋아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첫 서울 나들이라고 너무 긴장 했나봐요.”
연희는 오늘 따라 너무 허당 모습만 보인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수현도 조금 놀라웠다. 연희는 과에서도 꽤나 똑순이로 통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네, 여기 역 앞에 있는 카페로 가요. 다들 1번 출구 말고, 2번 출구로 나오라고 하는 게 낫겠어요.”
“아! 맞다. 기억났어요. 수시보러 왔을 때, 거기서 커피 마셨는데! 이제 기억났어요!”
둘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수현은 주변 남성들의 수많은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당당한 걸음을 옮겼다.
“으앗!”
바람은 비슷했으나, 그 사이 더 추워진 날씨에 둘은 몸을 움츠리며 움직였다. 둘 다 멋을 낸다고 얇게 입다보니, 추위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추위와 바람을 뚫고 카페로 들어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카페는 꽤나 북적거렸지만, 다행히안쪽으로 자리가 몇 자리가 남아 있었다. 둘은 적당히 정문에서 잘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짐을 두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씩을 시키고는 자리에 앉았다.
“추운데, 아이스네요?”
수현이 장난스레 말했다.
“수현씨도 아이스잖아요.”
연희도 장난스레 받았다. 둘은 작게 웃었다.
“그냥, 커피는 잠깨려고 먹다보니까, 따듯한 걸 먹으면 나른해지잖아요. 전 그래서 커피하면 아이스만 먹게 되더라고요.”
수현이 오랜 수험생활의 버릇을 말했다.
“와, 완전 똑같다! 저도 딱 그런데! 맛보단 카페인!”
둘은 그렇게 공통점에서 서로에게 친밀감을 더 느꼈다.
“아, 맞다. 선발대 여기 있다고 문자 좀 해둘게요.”
수현이 그녀와의 대화에 기분이 좋아서 깜빡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네. 깜빡했네요.”
연희가 얼른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병훈에게 밖이 춥기도 하고, 백화점 안은 조금 민폐인 것 같아서 먼저 온 인원끼리 2번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투썸에 와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넵! 저도 거의 다 도착했는데... 오분 정도 늦을 것 같아여. 다른 분들한테 문자 돌려놓을게요!
병훈에게서는 금방 답장이 도착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예 오시는 분들한테 제 번호도 알려주세요. 도착하면 저한테 연락 해달라고 해주세요!
오분이라고 했으니 최소 십분은 늦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현이 문자를 마치자, 약간 심심한 얼굴로 그를 보던 연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이것도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요.”
연희가 핸드폰을 내려놓는 수현에게 얼른 물었다. 수현은 알고 있던 사실이라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이 종종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난 이미 알아서 생각없이 넘어가는데, 다른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 수현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 20살이요. 현역이에요. 연희씨는요?”
“저도요! 20살 현역! 아, 동갑에 동긴데 계속 누구씨 이러는거 되게 어색하네요! 우리 말 놔요! 아니, 말 놓자!”
연희가 어색함에 닭살 돋는다는 듯이 몸을 살짝 꼬며 말했다. 수현이 피식 웃었다. 몇 살만 더 먹어도 오히려 당연해지는 것들이 어색한 나이.
“그래요. 아니지, 그래!”
수현이 말했다. 둘은 어색하게 마주 보며 웃었다.
“근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않아?”
수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수현이 말을 버벅거리자 연희가 맑게 웃었다.
“아직 어색해. 어색해! 근데, 뭐가?”
연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렇잖아. 교복 입었을 때는 막 다른 학교 같은 학년이라고 하면 초면이라도 반말을 했지 존댓말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막 20살 딱 되자마자 부터는 동갑이더라도 초면이면 일단 존댓말부터 하다가 서로 놓자고 하잖아.”
수현이 가볍게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음...그런가?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들은 잠시 그렇게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 저기 혹시 황수현씨 핸드폰인가요?
조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맞아요. 오늘 정모오시는 분이세요?”
수현이 대답하자, 연희가 살짝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저 지금 2번 출구로 나가는 중인데, 어떻게 가야할지 잘 몰라...아, 진짜 바로 앞이네요.
여자는 조금 민망함과 당황함을 담아 말했다. 수현이 크게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 같았다. 목소리가 조금 익숙했는데 누구였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
“네. 바로 들어오시면 돼요. 저희 약간 안쪽이긴 한데...어! 지금 들어오신 분이죠? 여기요!”
수현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성이 잘 볼 수 있도록 손을 들고 흔들었다. 연희도 얼른 따라 흔들었다.
-어..아! 봤어요! 그쪽으로 갈게요!
여자는 두리번거리다가 그와 연희를 발견하고는 밝은 얼굴이 되어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새로 들어온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수현은 그녀의 이름이 기억났다. 이소영. 미녀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제법 귀여운 얼굴에 애교도 적당히 있는 편이라 인기가 꽤 많던 아이였다. 의외로 술도 잘 마시고 분위기도 잘 타는 편이라, 김병훈의 여자판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아이. 로스쿨 갈 정도로 학업도 충실했던 아이였다.
“와, 저 깜짝 놀란 거 알아요? 난 선남선녀커플인 줄 알았는데! 진짜 우리 동기 맞아요?”
소영은 약간은 짓궂게, 하지만 과하지 않게 놀리듯 말했다. 수현과 연희는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보면 얘는 신입생 때부터 이런 능글맞은 소리를 잘도 해댔다. 실제로 커플을 만들어 내기도 했었고. 정확히는 커플 될 만한 애들을 밀어준 것이었지만.
“어, 혹시 진짜 사귀는 사이는 아니죠?”
소영이는 밝게 웃으며 연희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 아니, 아니에요! 저희 오늘 처음 봤는데!”
연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맞아요. 저희도 오늘 처음 봤어요. 와, 연희야... 그래도 너무 심하게 부정하는 거 아니냐. 조금 상처 된다...”
수현이 장난스레 받아 넘겼다. 연희가 살짝 당황했고, 소영이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둘이 말 놓기로 했어요? 그럼, 나도! 나도. 아, 그 전에, 둘다 몇 살이에요?”
“저희 둘다 20살이에요. 아, 이름이랑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수현이 물었다.
“아! 난 이소영! 나도 20살이야! 그럼 우리 다들 말 편하게 하자!”
그들은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늘어나기 시작했다. 앉을 자리가 없다보니, 그들은 잠시 밖에서 기다리다가술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늦는 사람들에게는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가르쳐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