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07
그 날의 식사는 소향으로 인해 썩 좋게 끝나지는 않았다. 본인 없이 동생 남친이랑 파티라도 한 것 같다며 빈정대던 그녀는, 역시 자신은 가족으로 껴주기 힘든 사람이라며 대답은 듣지도 않고 휙 나가버렸다.
부부는 그래도 수현에게 최선을 다하기는 했다.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월요일부터 오전부터 과외를 시작하기로 하고, 날짜까지 잡은 것이다. 부부의 침착함이 대단하긴 했지만, 그래서 한 편으론 확실히 무슨 사연인지 더 궁금하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긴 했지만.
수현은 아침을 대충 먹고, 적당히 단정한 옷을 입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겨울 아침의 찬바람이 그를 훅 덮쳤다. 잠이 확 깨는 것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수현은 버스를 타고 소현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후...”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안고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마당을 곧장 지나가니, 안에서 가볍게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쌤, 안녕하세요!”
“안녕. 춥다. 들어가자.”
수현은 가볍게 웃어주며 들어갔다. 둘은 식탁으로 안내를 받았다. 아무래도 방에 딸과 둘만 두기에는 그래도 불안함이 있나보다 싶었다. 아니면, 한 번 과외 방식을 보고 싶을 수도 있었다.
“오늘은 기본기 테스트를 할 거야. 점수는 저번에 말하긴 했어도, 네 습관같은 것 때문에 제 실력이 안 나오기도 하거든. 마킹하고 찍기까지 하는 걸로 테스트 할 거야. 찍기도 실력이다. 알지?”
수현이 앉아서 짧게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가지고는 문제를 꺼내며 말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표정이 밝던 소현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너무 인상 쓰진 말구. 일부러 어제 말 안 해줬어. 완전 기본 실력 보고 싶어서.”
수현이 너무 부담 갖지 말라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시간은...5분 뒤에 시작할까?”
“네...”
소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점수는 어머님한테도 말 안 할게. 정말. 약속.”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소현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현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님, 진짜 말씀 안 드릴 거예요. 이건 저희 첫 약속이라... 부탁드립니다.”
소현의 어머니는 근처에 있다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모의고사 점수는 알고 있는데, 뭐 얼마나 다를까 싶어서 이기도 했고,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펴지는 딸이 웃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걸로 혼낸 적도 없는데. 그녀는 가벼운 다과를 준비해주고는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준비 됐지? 시작!”
수현이 시계를 보며 말했고, 소현이 재빠르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수현은 일부러 조금 멀리 떨어져서 그녀가 하는 것을 확인했다. 세세한 풀이법이야 답을 맞추고, 가르치면서 확인하고 고쳐가면 되지만, 전반적인 풀이 습관은 이렇게 봐두면서 확인해야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과외의 장점은 이런 부분까지 교정하는 것이었다.
“10분 남았습니다. 마킹 안 하신 분들은 마킹부터 하세요.”
수현이 시험장처럼 말했다. 소현이 심하게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필요하게 답안지와 문제지를 확인했다.
“5분 남았습니다.”
수현이 5분 카운트를 하자, 소현은 거의 문제를 풀지 못했다.
“끝! 지금부터 마킹하시는 경우 부정행위로 간주 될 수 있습니다.”
수현이 말을 하며, 소현의 답안지를 가져갔다. 물론 소현은 이미 답안지를 완성해두었다.
“흠...”
수현이 가볍게 콧소리를 내며 체크한 것들을 확인하고, 채점을 시작했다.
“소현아, 표정 풀어.”
수현이 채점을 마치고 바라본 소현의 얼굴을 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음, 생각보다 희망적이라 난 좋은데?”
수현이 답안지를 보며 말했다. 소현이 조금 기대에 찬 얼굴이 되었다.
“내 말은, 점수 말고, 네 문제 풀이 습관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야.”
수현이 다시 실망하려는 소현에게 그녀가 일자로 찍은 마지막 2개 지문 중 하나를 그녀에게 주었다.
“이거 다시 한 번 풀어 봐. 시간 제한 없이.”
수현이 가볍게 말하며 주자, 소현은 약간 미심쩍어하면서도 펜을 들고 풀기 시작했다. 수현은 몰래 시간을 확인했다.
“풀었어요.”
“볼까? 음, 다 맞았어. 그리고... 사실은 시간도 확인했는데, 충분히 제 시간 안이야.”
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리 확인해보자. 네가 여기랑, 여기서 어려운 문제로 엄청 고민하면서 시간을 끌었어. 기억나니? 그리고... 여기 한 지문은 다 틀렸어. 의기소침 하지 말구. 자, 반대로 생각해보자. 네가 여기서 이걸 그냥 한줄로 찍고, 뒤에 이 문제를 맞췄으면, 3등급권이야. 턱걸이긴 해도. 그렇다구.”
수현이 약간 톤을 높여 가며 리듬있게 말했다.
“좀 더 써보면, 이 맨 뒤 지문도 아주 어렵진 않아, 네가 이 지문에서도 시간을 오래 안 끌었으면, 제대로 3등급권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
조금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 소현은 긴가민가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게... 실력인가요? 문제 풀이 스킬 같은데...”
“아니지. 네가 풀 수 있는 문제를 푼 건데, 왜 그게 실력이 아니야? 못 푸는 걸 찍어서 맞추는 게 실력이 아니면 아니지.”
수현이 희망을 팍팍 넣어주었다. 소현이 같이 소심함이 있는 아이들은 응원이 훨씬 답이 되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마음이 조금 편해질수록 오히려 성적이 좋아지는 아이들. 소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둘은 마주 웃었다.
“자, 좀 더 희망을 갖자. 네가 시간 관리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만약에 실력까지 올려서, 이 둘 중 하나를 확실히 실력으로 풀 수 있었다고 쳐보자. 그럼, 이 뒷 문제들도 맞고, 이 둘 중 하나라도 맞으면? 소현아, 2등급도 턱걸이 가능할 수 있어.”
수현의 약 파는 듯한 말에 소현은 확실히 무언가 희망을 얻은 것 같았다. 띄워주기식이긴 했지만, 원래 물건 하나를 팔아도 손님이랑 잘 어울린다고 하는 법이다. 여기선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고.
“물론 쉽진 않지만, 생각만큼 어렵지도않다는 걸 알아두라는 의미야. 알겠지?”
“네...”
수현의 말에 소현은 말끝을 흐렸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그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뒤에 오답들에 대한 풀이시간을 가지고 일어났다.
“쌤, 안녕히 가세요.”
“안녕. 내일은 사문이지? 한 번도 안했다고 했으니까, 그건 시험 안 볼 거야. 2달 안에 마스터 시켜 줄 테니까, 그때 시험보자.”
둘은 현관에서 인사를 했다. 시험을 안 본다고 좋아했다가 다시 시험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안 좋아지는 딸을 보며 그녀의 어머니가 작게 웃었다.
“어머님, 그럼 가보겠습니다.”
수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점심 같이 드셔도 좋을 텐데요.”
소현의 어머니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요즘, 다이어트 식단 중이라...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금 보기 좋은데요... 그럼 끝나고는 같이 종종 점심식사 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수현이 문을 나섰다. 너무 초반부터 넙죽 점심까지 얻어먹으면 좀 이미지가 안 좋을 수도 있고, 실제로 다이어트 중이기도 해서 과외가 조금 늦게 끝났음에도 식사를 거절했다. 아예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 끝났으면 모르되, 시간이 애매해서 부담 되는 것도 있었고.
수현은 집들을 둘러보며 길을 걸었다. 지금이야 목표가 더 원대해지긴 했지만, 이런 2층집을 어딘가의 별장으로 지어서 지낸다면 굉장히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란 참 즐거운 것이었다.
*
목요일이 되고, 일주일의 과외가 끝이 났다. 수현과 소현은 동시에 기지개를 크게 켰다.
“선생님, 오늘은 식사 하고 가세요. 그래도 한 주 끝인데 기념으로.”
둘의 공부가 끝나고 2층에서 내려오자, 소현의 어머니가 말했다. 사실, 월요일부터수요일까지는 식탁에서 하다가, 2층 거실에서 과외를 하는 게 조금 이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비싼 과외비에 약간 양심이 찔린 수현이 목요일은 언어부터 사회문화까지 전체를 한 번 짚어주고 가기로 했기 때문에 12시가 되어서 과외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11시 반 정도부터 1층에서 무언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었다.
“사실 저도 삼십분 전부터 맛있는 냄새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수현이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넉살을 피웠다. 두 모녀가 살풋 웃는 얼굴이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은근히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소현의 언니가 궁금했다. 집에 없는지 그 이후로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식사에도 당연히 모녀와 그 셋뿐이었다. 물론 소현의 언니가 있었다면, 그를 초대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나저나, 선생님은 무슨 향수 쓰세요?”
한창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가 끝나갈 때쯤, 소현의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맞아요. 쌤, 향수 뭐 쓰세요?”
소현도 꽤나 궁금했는지, 손뼉을 살짝 치며 물었다. 수현은 약간 당황했다.
“어... 아무것도 안 쓰는데요...?”
두 모녀의 상당히 궁금하다는 눈빛에 그는 약간 고개를 뒤로 물리며 말했다.
“어? 정말요?”
“그럴 리가...”
두 모녀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저한테 무슨 냄새가 나나요? 심한가?”
당황한 수현이 음식을 먹다 말고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맡아보았다.
“아뇨! 되게 좋은 향인데, 엄마랑 저랑 완전히 다르게 느꼈거든요! 그래서 약간 내기? 했는데... 아예 안 뿌리신다니까...”
소현이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맞아요. 저는 약간 상쾌하고 시원한 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소현이는 되게 부드럽고 달달한 향이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비슷하면 모르겠는데, 워낙 다르니까... 근데 전혀 안 뿌리신 다는 건 정말 신기하네요.”
두 모녀의 반응에 수현은 다행인 듯 싶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향에 당황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한테는 안 나는데... 그래도 나쁜 향은 아니라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우리 남편도 썼으면 싶었는데, 아쉽네요.”
향기 이야기는 가사도우미께서 완성 된 쿠키를 가지고 오면서 끝이 났다. 오븐에서 갓 완성 된 쿠키는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을 맞춰서 후식으로 먹기 좋게 나왔다. 수현은 그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치팅 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금요일 , 수현은 친구네 어머니의 초콜릿 공장에서 일일 알바를 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수현이, 초콜릿 밭에 있었더니 어째 땀내보다 쌉쌀한 향이 진동을 한다. 발렌타인데이까지 매주 금요일에는 나오는 거지?”
수현이 허리를 두드리며 기지개를 켜자 친구 어머님이 말했다.
“넵. 당연하죠.”
수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화이트 데이까지 나와주면 좋을텐데, 우리 명문대생을 그렇게 써먹을 순 없으니...”
아주머니가 씩 웃더니 일당봉투를 내밀었다.
“오늘은 아줌마가 너 기특해서 그냥 오만원 더 넣었어. 잘 못 넣은 거 아니고, 담부터 그만큼 더 넣을 거 아니니까 오해 하지 말고. 알았지?”
아주머니가 수현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헐! 안 그러셔도 되는데!”
수현이 놀라자, 아주머니는 됐다는 듯이 그를 내보냈다. 수현은 떠밀리듯 나와 길을 걸었다. 어제부터 과외비와 알바비가 들어오자 괜히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지친 몸이었지만, 기분만은 좋아서, 토토와의 산책도 기분 좋게 끝낼 수 있었다.
조금 이르게 샤워까지 마친 수현은 오랜만에 신입생 카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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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Y대학 경영학과에 입학 하신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들 1월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심심들 하지 않으신가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현재 수시합격자부터 정시 1차 합격까지 발표가 된 상황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정모를 해도 어느 정도 인원이 모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볍게 미리 친구들을 사귀어보는 시간을 가질 분들은 첨부한 날짜 중에 가능한 날에 투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중복투표도 당연히 가능하고요!
최대한 많은 인원이 모이는 쪽으로 진행하려고 하니까 많이 참여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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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 한동안 신입생 카페에 들어가지 않은 사이, 새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급정모였는지 며칠 전에 올라온 공지였다. 학생회나 과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은 아닌 듯해 보였고, 심심한 신입생 한 명이 올린 것으로 보였다. 투표는 이미 끝나있었고 정모날짜는 이번주 토요일 7시였다.
“내일이잖아?”
수현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도 이 정모를 나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 첫만남이라 생각하고 나갔는데, 대영외고 출신 남자애들 친구 무리가 참여하면서 조금 분위기가 달라졌었다. 그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다른 애들은 조금 소외감을 느꼈던 정모였다.
대신, 이때 연대 경영 여신이라 불리는 김연희를 처음 봤던 추억도 있는 정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위기를 주도했던 남자애들도 연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른 애들을 그렇게 배척하고 깎아 내렸던 것 같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연희도 괜히 그 아이들과 같이 엮여 소문이 좋지 않게 돌았었다.
수현은 스크롤을 내려 댓글을 확인했다. 기억에 의하면, 뒤늦게 참여했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병훈: 혹시 투표 못하신 분들 중에 오실 분들은 저한테 이름 적어서 연락주세요! 010-0000-0000-
“아...역시 김병훈.”
수현은 피식 웃으며 익숙했던 이름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통칭 10술고래.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분위기 타는 것도 좋아하고, 놀기도 좋아하는, 말 그대로 술에 최적화 된 녀석이었다. 당연히 분위기 메이커로 선배 후배 동기 할 것 없이 사랑 받은 아이였다. 직장도 주류기업으로 갔다고 들었으니 술고래라는 닉네임 값은 제대로 한 녀석이었다.
“얘 마저도 그 날은 못 살렸던건가...”
하긴, 병훈도 이때는 술자리 레벨이 그렇게 높을 때는 아니었을 것이다. 수현은 10년 내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제가 공지를 못 봤었는데, 혹시 내일 갈 수 있을까요? 황수현입니다!-
수현은 문자를 보내고 하품을 길게 했다.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피로가 몰려왔다.
-당연하죠! 내일 7시까지 현대백화점 정문 앞으로 오시면 돼요! 신촌역 1번 출구로 나오셔서 오면 됩니다!-
병훈은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지, 금방 문자를 보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거기서 뵐게요!-
-넵! ㅎㅎ-
문자를 끝내고 수현은 침대에 길게 누웠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잠이 금방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