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122화 (122/131)

〈 122화 〉 Ep12. 배신자의 밤 (1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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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햇볕이 잘 드는 살랑이는 바람 아래 진혁이가 눈을 뜬 곳은 서울에 위치한 한 병원이었다. VIP들이 이용할만한 1인용 병실은 침대조차 남다른 푹신함이 있었고 따뜻한 숨결과 함께 여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여자?'

정신을 차리고보니 분명 여자의 품속이다. 따스한 36.5도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지니 여자라 함은 대한제국의 황태녀 이은서. 여인의 품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 그는 '남다른 푹신함'이 가슴임을 깨달아 허둥지둥 일어나버렸다.

"저, 저··· 전하?!"

“으음··· 우리 서방 잘 잤어?”

졸린 눈을 비비는 은서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황태녀의 군인 제복은 어디에 걸쳐놨는지 블라우스뿐인 차림으로 가슴이 봉긋 솟아올라 보는 남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제가 왜 전하 품속에서···.”

“그야··· 잠을 못 잤다고 하길래 안아주고 있었지. 표정 보니 잘 잤나봐? 다행이야.”

그러더니 대뜸 다가와 진혁이를 끌어안았다. 토닥 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이 옥처럼 맑은 격려의 목소리와 어울려 마음을 사로잡았다.

"많이 힘들었지?"

"전하···."

"누구도 말해주지 않더라. 네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지, 의식은 왜 돌아오지 않는건지··· 잠은 왜 못자고 있던건지도···."

"그건···."

아마도 비밀이었나보다. 핵개발에 관한 정보부터 그걸 놓고 벌어진 한미간의 치열한 첩보전까지. 그 과정에 미끼로 쓰여 수면고문에 자백제까지 시달리고만 고생까지도 30세의 황태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다 괜찮아진거지?"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걱정하는 표정아래 깜빡이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피곤해보였다. 밤을 지새운 거 같았다.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렀을까? 잠결에 매일같이 전쟁에 대한 악몽을 꾸고 그러면서도 남 걱정을 해야 했을 그녀에게 진혁이는 죄책감을 느껴버렸다.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전하···."

"말을 놓을거면 놓지 왜 다시 존대를 하고 그래? 부부될 사이끼리."

"그게··· 아무래도 황태녀 전하시니까···."

"그러는 놈이 앨범 사진도 못 보게 하고 도망을 치냐? 나쁜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면목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만 진혁이를 보며 은서가 말했다.

"미안해. 앨범 함부로 훔쳐봐서."

"......"

"용서해··· 줄거지?"

진혁이는 대답 대신 은서의 손을 잡았다. 황태녀 전하가 아니다. 내 여자다. 나의 친구 나의 연인 나의 신부가 될 여인에게 말하는 남자의 첫마디는 사과로 시작했다.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하다니··· 뭐가?"

"내가 어디서 뭘 했는지, 왜 이런 몰골로 돌아온건지, 이 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무엇을 위해 그걸 했는지조차 말해줄 수가 없어. 그건··· 너한텐 아직 이르거든."

"아···."

"하지만 약속할게. 비밀은 여기까지야. 이 외엔 어떤 것도 숨기지 않을거야. 때가 되면 모든 걸 말해줄게. 모두가 너를 위해서 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거니까."

은서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이 진혁이 마음 속엔 아프게 다가왔다. 자백제에 취해버려 모든것을 불어버릴 때도 눈앞에 은서가 있었다.

<진혁아~♥>

비록 약물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지만, 거짓된 환상에 심리적 저항이 무너져버릴 만큼 간절했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거짓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핵무기다. 수십만 명을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는 폭탄으로 나라를 지키려한다는 걸 고백할 자신이 없었다. 그걸 고백한들 이해해줄리 없으니까. 그녀의 여린 심성이라면 분명 반대할테니까.

'네가 물려받을 나라를 위해서야. 강력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진혁이에게 은서가 말했다.

"알려주면 안돼?"

"지금은 일러. 이걸 알게되면 나처럼 크게 다칠지도 몰라. 모든 것이 끝나고 상황이 정리되면 그 때 꼭 알려줄게. 그 때까지 날 믿고 기다려주지 않을래?"

은서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실망이 담긴 표정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본인도 이해한 모양이다. 머리 속에 무슨 추측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내심 눈치를 채진 않았을까? 머리가 좋은 은서라면 진실에 어느정도 근접한 추측을 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는건 '추측'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핵무기란 존재가 너무도 초월적이니까.

실망해버린 그녀를 위해 진혁이는 다른 말을 건넸다. 진작 했어야 했지만 이른 타이밍에 휘말려버린 첩보전으로 놓쳐버린 고백. 김진혁은 소년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 부끄러운듯 털어놓았다.

"앨범사진 말이야. 사실 부끄러웠어."

"왜?"

"그걸 펼쳐보면 네가 실망할 거 같아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미워할까봐."

"내가 너를  왜 미워해···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데···."

"나한텐 학창시절 전체가 악몽이야. 친구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모두를 적으로 두고 살았지. 괴롭힘 당하고, 구타를 당하고, 외면을 받아온 시간들을 누군가 알아준다는 게 두려웠어."

"왜?"

"수치스럽고 부끄러우니까. 내가··· 너무 작아보이니까."

은서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앨범에 유서 한장이 껴있었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쓴거지? 내 앞에서 투신자살했을때."

"응··· 그 때 작성한거야."

"앨범은 3학년 때 받았을텐데··· 아버지께 도움을 받고도 계속 보관한거야?"

그 유서란 '모두를 죽이고 싶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며 자책해버리고, 실패한 인생으로 단정지어 자살을 결심했다는 섬뜩하면서 서글픈 편지. 그게 30세가 된 지금까지도 남아 역린처럼 박혀있는 것이 이해되질 않았다. 그걸 아는지 진혁이가 말했다.

"분풀이 한거야."

"분풀이?"

진혁이의 회상에 따르면 이랬다.

일단 앨범에 대해서. 그게 그 모양 그 꼴이 된 건 고등학교 졸업식 직후의 일이었다. 황제 폐하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졸업한 소년은 해방감에 들떠 집에 들어왔다. 손에는 졸업식 날 받은 앨범이 들려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즉시 문을 걸어잠그고 바닥에 던져버렸단다.

그곳이 강남아파트. 화해한 부모님과 새 삶을 찾은 자신의 행복한 보금자리. 그 속에 감추어진 자기만의 아지트. 국민학교 앨범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앨범까지 바닥에 모아다 열심히 분풀이를 시작했다. 찍찍 낙서를 하고 콕콕 구멍을 뚫어가며 미운 놈들의 면상을 사정없이 괴롭히곤 앨범의 모든 페이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소년은 웃고 있었다.

<해방이다!!!>

찢어진 페이지가 손에 들려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꽃가루처럼 휘날리는 학창시절의 기억들이 함박눈처럼 내렸다. 바닥에 수북히 쌓인 잔해 속에 홀로 앉은 소년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행복한데 서럽다.

국민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전체가 학교폭력으로 망가져있던 소년은 추억할만한 사건이나 친구가 아예 없던 것이다. 모두가 나를 괴롭혔던 악마들이었고, 방관자들이었으니까.

이건 구원을 받은 2학년 이후에도 동일했는데, 괴롭힘만 없어졌다 뿐이지 서먹서먹한 교우관계에 대해선 마땅한 해결법이 없었던 탓이다. 학교의 '짱'들을 모조리 감옥에 보내버린 소년의 뒷배를 보며 모두는 두려운듯 거리를 두고말아 여전히 혼자였다.

그런 암흑의 시간을 지나 원한이 담긴 종이들이 수북한 방바닥에서 이제는 남자가 된 진혁이는 눈물을 멈추고 생각했다.

<추억하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겠지, 돌아보지 않으면 망설이지도 않을거야. 앞만 보고 가겠어. 다시 주어진 인생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거니까.>

밑바닥을 딛고 일어선 소년이 향한 곳은 육군사관학교였다. 은서와 같은 시기에 임관했는데, 폐하의 지원아래 미국으로 유학을 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생활을 했다.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는 서방국가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기관. 동맹국 자격으로 '위탁교육'이라는 제도를 활용해 들어간 진혁이는 그곳에서 백인 생도들과 함께 생도 생활을 보냈다.

조선땅에 돌아올 땐 친위대로 임관. 대한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직속의 친위부대. 특임대로 배치되어 장교 생활을 시작했고, 베트남에 파견되어 공주를 구해내는 공을 세운다.

이제는 황제의 사위까지 올라간 그의 20대는 말 그대로 엘리트의 삶. 하지만 탄탄대로였을 청춘에도 고난은 있었다.

"순탄치만은 않았어. 미국 유학시절엔 인종차별로 힘든 생활을 했고, 특임대의 훈련은 늘 고달팠지.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공수 강하를 해야하는데 낙하산 하나 메고 뛰어내리는 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그래서? 유서를 아직까지 갖고 있던건···."

"자극이 있어야겠다 싶었어. 포기하고 싶을 때면 찢어진 앨범과 유서를 꺼내보며 각오를 다진거지.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라고."

"지금은 어때?"

"배수진이랄까? 보기만 해도 채찍질을 당하는 듯한 기분. 절대 그 시절로 돌아가선 안된다는 절박함. 한심하지? 이런 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진혁이에게 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멋지게 컸는걸? 학창시절의 소년이 지금의 너를 본다면 희망과 용기를 가졌을거야. 나한테도 이런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구나 하면서 열심히 살겠지."

"그런가?"

"넌 과거가 꿈꾸는 멋진 이상향이니까."

은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유일한 친구, 유일한 사랑, 유일한 결혼이 될 남자의 신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자! 내가 선물 하나 해줄게!"

"선물?"

"추억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거잖아?"

이렇게 말한 은서는 진혁이를 학교로 데려갔다.

그러기에 앞서 덕수궁에 들려 옛 교복을 찾아입으니 10대시절 자신이 입었던 검은색 옛날 교복. 가슴 부분이 답답한 감이 있지만 여고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진혁이는 교복을 버렸다고 했다. 하기사 앨범사진도 분풀이로 찢어버린 소년인데 교복인들 멀쩡히 남겨뒀을리 없다. 결국 새로 하나 맞춰입게 해서 10대 시절의 소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게 영 싫었는지 교복점에서 옷을 맞춰입는 내내 불평을 쏟아냈다.

"선물을 주신다더니 교복은 왜 맞춰주시는겁니까? 이 꼴도 보기 싫은 옷을···."

"조금만 참아봐~ 내가 진짜 좋은 선물을 줄테니까. 나만 믿어! 알았지?"

그렇게 10대 시절로 돌아와버린 두 사람은 노을이 져있는 고등학교에 이르러 진혁이의 1학년 때 교실을 찾았다. 그 남자의 악몽같았던 공간.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곳에서 은서는 진혁이를 자리에 앉혀놓았다.

"자, 수업시간이야. 집중!"

"다 큰 30대 남녀가 여기 앉아서 무슨 수업을··· 게다가 여긴 남학교입니다."

"어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아무리 봐도 여고생이신데요?"

"아무튼 조용!"

쪼르르르 달려가는 은서의 발걸음이 칠판으로 향했다. 분필을 들고 열심히 끄적이는 이은서의 담당과목은 영어. 행복한 미소로 열심히 선생님 연기를 하니 어쩐지 진지하게 맞춰주지 않으면 안될 거 같아 학생 시늉을 하고 말았다.

"자, 김진혁 학생? 이번에는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겠어요. 칠판에 적어주는 문장을 보고 적절한 해석을 말해보세요."

"네 선생님···."

은서는 노란 분필을 들었다. 머리를 멋지게 넘겨주고 칠판에 써내려가는 화려한 글귀가 진혁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I hope everything will go well.

(모든 것이 잘 되길 바래.)

I'm so proud of you.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You are very special to me.

(넌 나한테 특별한 존재야.)

I'll stand by you always

(항상 네 곁에 있을게.)

I'm on your side!

(난 네 편이야!)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출제를 마친 은서가 고개를 돌려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설레임 가득한 그녀의 응원 편지가 소년으로 돌아온 진혁이에게 웃음꽃을 선물했다.

뒤이어 다른 선물이 나온다. 은서가 몰래 숨겨온 서랍속의 앨범 3권이 건네졌다. 멋진 양장본의 앨범은 사진을 꽂을 수 있는 페이지가 무수히 많았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이제부터 채워야지."

"이제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인 우리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인생을 살며 추억을 만드는거야. 그걸 사진으로 남겨 한 페이지씩 채우다보면 세권이 가득 차겠지. 내게도 행복한 추억이 있었구나 하면서 감상에 젖는거. 그게 내가 해주는 선물이야."

"함께···."

"너무 늦었고 이제와서 해봐야 소용 없겠지만.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으로 말해줄게."

은서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졸업 축하해!"

그 날이 1975년 6월 10일이었다. 소년의 행복한 졸업식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졸업앨범이 들려있었다.

Ep1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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