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117화 (117/131)

〈 117화 〉 Ep12. 배신자의 밤 (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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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1940년생, 조선 나이로 36세인 그녀는 은서를 어린 시절부터 모시던 덕수궁의 제2부속비서관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거 같았다. 검은 정장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냉혈한 눈빛의 요원은 그동안 옆에서 보았던 '진희 언니'와는 너무도 다른 낯선 모습. 이 여인이 '그 놈'들을 고용한 배후자라는 것도 안 믿기고 배신자가 됐다는 것도 안믿겨서 김진혁 중령은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고 말았다.

"상황 파악이 안되시나봐요?"

진희가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이해하실 필요 없어요. 머리를 비우고 조용히 시키는 대로 듣고 말하며 행동하시면 되니까요."

"절 납치하시려는겁니까?"

아까 전의 양아치들이라면 주먹으로 제압했겠지만 이 여자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황태녀 전하의 비서관이란 것도 권총이란 것도 여자라는 성별조차 둘째의 문제다. 그녀 뒤에 버티고 서있는 그림자 속의 사내들이 진짜 문제였다. 큼지막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 딱 봐도 훈련된 특수부대였으니까. 이건 아무리 계산해봐도 승산이 없었다.

"대체 왜? 누굴 위해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시는겁니까?"

그러자 진희는 권총을 품에 넣어두고 뒷짐을 지었다. 여유로운 미소 속에 감춰진 배신의 냄새가 거북하게 느껴진다.

"간첩이라고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아니면 스파이라고 해드릴까요? 둘 다 같은 말이지만 스파이라는 쪽이 좋겠네요."

"대체 누구의···."

"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 스파이라구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핵무기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겨주세요. 그럼 뒤끝없이 깔끔하게 끝내드릴게요."

"핵무기에 대한 정보를 넘겨달라니 대체···."

"우린 대한제국 황제를 처단하고 핵무기의 확산을 저지할겁니다."

"비서관님!"

진희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는 선을 넘었어요. 핵무기를 만든 것도 모자라 다른 나라까지 끌어들이고 있죠. 대만을 핵보유국으로 만들겠다구요? 그랬다간 바로 다음 날 중국의 선전포고가 날아올거에요."

"그건···."

"전 스파이지만 동맹국 사람이에요. 미합중국 중앙정보국 CIA 요원으로서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거죠. 김진혁 중령. 당신은 황제의 수족으로서 핵무기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거에요."

"뭘 원하시는겁니까?"

"핵무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세요. 그리고 저와 같이 독재자를 처단하시죠. 당신은 누구의 의심도 없이 황제 앞으로 권총을 들고 갈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니까."

"거절합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어 김진혁 중령은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희는 더더욱 확신어린 태도로 분노하듯 말했다.

"핵무기는 위험한 병기에요. 대량살상무기라구요. 그런걸 독재자가 쥐게 두실건가요?"

"그분은 독재자가 아니라 영웅이십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람이죠. 김진혁 중령. 다시 강조하지만 미국은 동맹이에요. 우린 핵무기와 독재자만 처리하면 그 어떤것도 건들지 않을거에요."

"당신이 이러고 있는거. 황태녀 전하도 아십니까?"

그러자 진희가 주춤하며 말했다.

"이것도 전하를 위한 선택이었어요···."

그러자 김진혁 중령은 하찮은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독재자는 황태녀 전하의 아버지이십니다. 근데 전하를 위해서라구요?"

"제가 왜 CIA에 들어갔는지 아시나요?"

진희가 황실에 반감을 품게 된 건 1965년의 일이었다. 황태녀 전하의 공주시절. 군대가기 싫다며 단식투쟁을 하던 그 때 믿을 수 없는 사건을 목도했다.

<친위대장!!!>

친위대장인 김종규가 공주님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던 그 순간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힘없이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을 터트리는 은서는 이제 20살이 된 어린 공주님이었다.

"공산당을 때려잡는 철의 여인이 되어라. 반공소녀 이은서가 되어라. 그딴 갖잖은 이유 가지고 우리 공주님을 군대로 던져버린거에요. 그게 지금 국방부장관을 하고 있는 김종규 의원이죠. 당시엔 대한제국의 친위대장이었구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을 만지작 거리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그 때 사관학교에 있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가긴 했지만."

"......"

"조교들이 몰려와 공주님을 몽둥이로 두들겨팼대요. 군기 잡겠다는 이유로 고귀하신 공주님을 그렇게 대한거에요. 왜? 전쟁터에 보내려고. 군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데 군인이 되길 거부하고 있으니까 폭력으로 강요를 한거라구요."

그것이 다 황제의 명령이랬다. 하나밖에 없는 공주님이 군대에 끌려가 혹독한 훈련을 받는 사이 진희를 포함한 제2부속비서실의 직원들은 전원 정리해고를 당했다. 재취업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정든 직장을 떠나야 했던 비서들의 마음엔 무거운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그 때 심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공주님을 버리고 가는 기분이었지. 당신은 모를거야. 김진혁 중령···."

"비서관님···."

"그 놈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세상 어디에도 그런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아."

그녀는 절박한 심정을 담아 다시금 총을 들었다. 남자에게 겨눠진 권총에는 진심이 들어 있었다. 그 비서 박진희의 진심.

"미국에게 약속받았어요. 독재자를 처단하면 황태녀 전하가 제위에 오르실거에요. 그렇게 되면 소망하시던 민주주의 대한제국도 마음껏 만드실 수 있겠죠."

"하지만 아버지입니다. 못난 아버지라도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죠. 가족을 잃으면 상심이 크실겁니다."

"제가 노력할거에요. 비서관이자 언니이고 친구로서 평생을 모시며 진짜 가족이 되어드릴 거라구요."

"이런걸 당신 혼자 판단하면 안됩니다. 비서관님. 총 내려놓으시고 다시 생각해보시죠. 이건 너무 극단적인···."

"워싱턴이 결심을 내렸어요.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황제를 죽이겠죠.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결과라도 좋게 바꿔야 하잖아요. 황실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는 꼴을 보고싶으신가요? 황태녀 전하가 평민으로 격하당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걸 원하시냐구요."

"저는···."

"싫잖아요! 당신은 이은서의 남편될 사람이에요. 그분을 사랑하신다면··· 황제를 버려야해요. 김진혁 중령."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는 순간 거부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빠진다. 신과도 같은 황제 폐하를 배신하느냐?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을 배신하느냐?

"믿지 않겠어. 당신이 하는 모든 말···."

"은서는 지금도 전쟁의 상처로 아파하고 있어요. 기쁜척, 행복한척, 다 나은척 연기하고 있지만 매일 밤만 되면 악몽을 꾸잖아요. 누가 그 상처를 줬냐구요. 20세 소녀를 강제로 군대 보낸 사람! 전쟁터로 보낸 사람! 편지 한통 안 준 사람! 누구냐구요!"

“그야···.”

"그 빌어쳐먹을 독재자에요. 그 자식이 공주님을 전쟁터에 보냈기 때문이죠. 군인이 될 생각도, 총을 들 마음도, 누군가를 죽일 의도도 없었던 어린 소녀를 후계자로 만들겠다고 지옥으로 몰아넣은 매정한 아버지잖아요."

“비서관님···.”

"우리 제2부속실 직원들은 공주님이 월남전에 계시는 내내 뿔뿔이 흩어져 있었어요. 호텔주방장부터 박물관 큐레이터, 회사원, 경비실, 심지어 옷가게 직원까지! 각자 하는 일은 달라도 모두가 공주님을 걱정하며 살았죠. 몸 건강히 돌아오셔야 할텐데. 어디 다친데는 없으실까? 매일 같이 기도하는 그 심정을 알기나 해요?"

앙심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속에 담겨있는 검은 악몽들이 끝도 없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왔다.

"전쟁터에 돌아온걸로 끝이 아니었잖아요. 황제의 숙청을 위해서 미끼로 보내졌어요. 반역자들이 득시글거리는 평양으로 가셔선 포로신세까지 됐는데··· 내가 거기서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기억하시겠죠?"

그녀는 구남철 중장에게 사로잡혀 포로신세가 되었다. 어둠 속 평양의 사령부에서 안대가 씌워지고 재갈이 물리며 트럭속에 무릎 꿇려졌던 공포의 경험들이 머리속에 생생했다. 그 남자 구남철이 했던 모욕까지도.

<너희들이 잘못한 게 뭔 줄 아나? 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어. 소고기 좀 사주고 사격시범 보여준다고 끝날 거라 생각하다니. 멍청해도 유분수지.>

진희에게 손찌검을 했던 구남철 중장은 이렇게 말했었다.

<다음엔 더 분발하도록. 김진희 비서관.>

무능아로 찍혀버린 자신. 하지만 더 모욕적이었던 건 이런 행동조차 모두 사전에 계획된 연극이었다는 것이다. 대숙청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앞두고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진행했던 연극. 거기에 놀아난 자신.

"말해보세요. 김진혁 중령. 제가 황제에게 충성해야 할 이유가 뭐죠?"

"......"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충성해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서 진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익문사가 날고 기어봐야 우릴 이길 순 없어요. 포기하세요 김진혁 중령.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뀌는 꼴 보기 싫으면 순순히 협조하는 게 좋을거에요."

"당신이 하는 말 못 믿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배신자."

"그럼 우리의 대화가 길어질 뿐이죠."

***

5월 30일.

김진혁의 무단결근이 일주일 째 계속되고 있었다. 황제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일급기밀취급인가자가 실종상태에 놓여있으니 이젠 황태녀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친위대 수도방위사령부 주도로 헌병대가 서울 시내를 이잡듯 뒤지고 다니기 시작하니, 그가 다녔던 학교를 중심으로 수색작전이 펼쳐졌다.

하지만 차지연은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마지막으로 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등학교를 찾아가봤지만 1층부터 옥상까지 모두 뒤져봐도 나오는 게 하나 없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설마 우릴 배신한건가?"

바람부는 5월의 옥상에서 차지연이 내린 결론은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CIA에선 미국 대사관을 발판삼아 황제의 참수작전과 핵시설 파악 작전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으니, 한국지부장 대니얼 화이트는 상석에 앉아있는 키신저 장관에게 보고를 올렸다.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입을 안 연다더니?"

"일주일 정도 잠을 안재우면서 자백제를 쓰니 입을 술술 열더군요. 황제의 수족 답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인가?"

"개마고원."

"고원?"

"슈나이더 대사님이 그러셨지요? 5월 초였는데 겨울 처럼 추웠다구요. 개마고원은 5월에도 화씨 32도(섭씨 0도)까지 떨어지는 지역이라 단언컨대 조선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일겁니다."

"춥다는 것 만으론 납득이 안되는데. 왜 하필 개마고원일까?"

"이북지역은 금이나 구리, 마그네사이트를 비롯한 지하자원이 즐비하게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개마고원에 광산이 많이 있는데 그 중 한곳을 개조해서 쓴다면 위장하기에 좋았을겁니다. 여기 해당 지역을 찍은 우리 정찰기의 사진 자료가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화이트 지부장은 키신저 장관에게 사진 세장을 보여주었다. 광산 속으로 수상쩍은 덤프트럭들이 7대가 넘게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트럭 안에 핵관련 자재들이 있을거다 이 말이군?"

"상공부쪽 자료들을 입수해서 비교해본 결과 해당 광산은 이미 70년 초에 폐광된 곳이랍니다. 이곳에 특수부대를 파견해서 증거를 확보하면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을겁니다."

"황제는?"

"저희측 요원이 입수한 정보대로라면 6월 6일 메모리얼데이(현충일)가 적기로 보입니다. 이북지역 방문 일정이 잡혀있는데 분명 핵시설도 방문할테니까요."

"한꺼번에 일망타진을 하겠다?"

"예, 장관님."

"어쩐지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리는 거 같지 않나?"

"CIA는 세계 최강입니다. Imperial Press(제국익문사) 따위 여론 조작이나 하던 하찮은 기관일 뿐이죠."

"자만하지 말게. 지부장. 놈들은 이미 우릴 한번 속였던 전력이 있어."

"대한제국의 핵개발은 50년대부터 이루어졌죠. 그 시절 정보력과 지금의 정보력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걱정안하셔도 될겁니다."

미국의 첩보위성이 조선땅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화이트 지부장은 CIA가 대한제국의 핵개발을 놓친 이유를 그렇게 돌렸다. 우주상에서 24시간 지상을 감시하며 실시간으로 사진을 보내주는 그런 편리한 시스템이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런게 있을리가.

달나라에도 사람을 보냈던 세계 최고의 우주 강국이지만, 그런 미국조차도 첩보위성은 아직까지도 완전함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60년 KH-1 정찰위성이 최초로 우주를 날았지만 필름 카메라를 쓰는 이 위성은 사진을 찍으면 필름통에 옮겨담아 낙하산째로 지상에 던져버린다. 그럼 그것을 공군수송기가 낚아채서 본부로 가져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을 갖고 있던 것이다.

우주에 떠있는 위성이 찍은 사진을 전파를 통해 무선으로 전송받아 분석한다는 건 외계인이라도 고문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 하지만 1년 뒤 1976년에 첫 실전배치를 할 예정이다. 미국의 과학기술은 세계 제일이니까.

하지만 제 아무리 대한제국이 핵개발을 한다봐야 이런 귀중한 기술은 소련을 감시하는데 우선적으로 써야 할 것이고, 그 대신 미국은 U-2 정찰기를 조선반도 보냈다. 별명은 드레곤레이디. 최대 27,430m까지 올라가 비행할 수 있으며 시속 821km까지 날 수 있는 단발엔진의 고고도 정찰기가 대한제국의 핵시설을 찾기 위해 개마고원을 이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1933년 일제 시절 측정된 기록에 의하면 영하 43도까지 내려가는 지옥의 얼음성은 산들의 바다. 한국전쟁기 대한제국 국군과 미군을 고생시킨 장진호 전투가 있던 곳으로 5월인 지금도 긴팔을 입어야 할만큼 춥다. 하지만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조선인들의 60년대 경제를 책임진 1차산업의 핵심지역이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이 채굴 장비를 들쳐매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곳이며, 철광석부터 시작해서 금광석까지 산더미처럼 실어다 트럭으로 나르는 모습들이 가감없이 정찰기에 담겨갔다. 희토류도 캐고 있다더니 산이 계단식으로 깎여져나간 곳이 무수히 보였고, CIA의 정보분석관들이 사진을 분석해보니 우라늄 광산도 보였다.

<이 새끼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원자로를 건설할만한 자연적인 입지를 찾아 대한제국의 핵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으니, 조선반도에서 암약하는 CIA 요원들이 개마고원을 여행하는 산악인들로 위장해 인근 지역들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악인들의 손에 들린 방사선 측정기에서 티디디딕 거리는 잡음이 미묘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CIA가 핵시설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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