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Ep12. 배신자의 밤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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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23일.
키신저 국무부장관은 미국 대사관의 회의실에서 CIA 한국지부장을 찾았다. 이름은 대니얼 화이트. 그는 그동안 수집한 첩보를 장관에게 올렸다.
“지난번 덕수궁에서 오간 여야간 밀담이 핵무기에 관한 내용이었답니다. 황제가 주도하고 제국익문사가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게 얼마 전에 독립기관이 된 터라 정권교체가 이루어져도 소용이 없을겁니다.”
"그럼 야당을 밀어줘봐야 아무 소용 없겠구만. 다른 정보는?"
"황제가 대만한테 핵기술을 공유하기로 마음 먹은 거 같습니다."
그러자 키신저 장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녹음 테이프 하나를 건넸다. 5월 23일 오늘 날짜가 써져있는 이 테이프는 CIA가 황제를 도청을 했다는 뜻이었다.
무선으로 원격 도청을 한다는 개념이 아직까지는 무리였던 터라(특히 덕수궁이라면 더더욱) 닉슨이 그랬듯 요원이나 협력자가 손수 도청장치를 설치하여 테이프에 녹음해오는 식이다.
"대만이 핵보유국으로 올라오면 인도와 대한제국, 대만까지 3국이 연합전선을 구축할겁니다. 이렇게 셋이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면 중국이 포위되는 형세가 되겠죠."
키신저 장관은 턱을 괸 채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협박하려드는군···."
“전형적인 미치광이 전략입니다. 비이성적으로 행동해서 겁을 주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건데, 이런식으로 나오면 일본까지 끌어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CIA의 화이트 지부장이 하는 말에 키신저 장관이 어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조선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일본이잖나?”
“하지만 장관님 생각해보십시오. 인도도 모자라 대한제국, 일본, 대만 4개국이 동시다발적으로 핵보유를 하게 되면 우리 능력만으론 핵확산을 막는게 어려워집니다. 황제가 노리는 게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슈나이더 대사가 부정하듯 말했다.
“받을리가 없습니다. 일본이라면 우리 눈치를 보면서 거절할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키신저 장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핵을 공짜로 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핵을 공짜로 준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러고도 남을 미친놈이니까. 핵을 10개 갖고 있다고 치자고. 그걸 모두 가지려 들면 모두 잃어버릴거야. 하지만 그 중 2발을 다른나라에 줘서 한통속으로 만들면 8발을 지킬 수 있지. 그렇게 가정한다면 자넨 어떤 선택을 하겠나?"
“선택하고 자시고 완전히 미친짓이 아닙니까?”
“그래서 미치광이 전략인거야. 진짜로 그런짓을 할까봐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들거든. 불안감은 협상의 좋은 수단이지.”
CIA 한국지부장 화이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가만뒀다간 NPT(핵확산방지조약) 체제 자체가 무너질겁니다.”
“불가능해. 우리가 가만두지 않을거니까.”
미치광이 전략은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을 때 통한다. ‘저 놈이라면 진짜 하고도 남을 놈이야! 어떻게든 막아야해!’ 라는 생각이 들도록 위협을 줄 수 있어야 협상의 판돈이 올라가는 전략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그럴 능력이 없다. 핵공유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미국은 절대 그런 짓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가 드리운 국무부장관의 머리 속엔 미국의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계산되기 시작했고 단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대통령 각하의 의지는 분명하시네. 대한제국은 미국의 영향권에 있어야 해. 녀석들의 경제를 50년대로 돌렸다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황제 새끼가 믿는 구석도 이것일테다. 미국이 자신들을 버릴리 없다는 것. 그래서 배짱있게 나오는 모양인데 멍청하게 이용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죽여야지."
황제를 죽인다. 그리고 우리 말을 잘 들어줄 새로운 리더를 대한제국에 앉힌다. 동북아의 미국 영향력을 유지하면서도 핵무기만 포기하게 하는 가장 깔끔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CIA 한국지부장이 예상한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걸 전혀 예상 못했던 슈나이더 대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친위대와 제국익문사가 만만치 않을겁니다. 그들을 뚫고 황제를 암살할만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화이트 지부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대사님은 새로 오셔서 모르셨겠군요. 황실은 우리 CIA의 영향권입니다.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죠.”
“황제를 암살할 수 있겠나?”
키신저 장관의 물음에 화이트 지부장이 답했다.
“황실에 불만을 품은 내부자가 있습니다. 맡겨만 주시면 확실히 처리해드리죠.”
***
그 시각 은서는 시아버지의 집에 다시 한 번 찾아와 저녁식사를 했다. 마음을 완전히 열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진혁이까지 함께한 가족같은 저녁 밥상엔 떡갈비가 놓여져 있었고 백옥같은 쌀밥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즐기니, 이참에 설거지도 모자라 아버님의 어깨까지 주물러드려 100점 만점에 120점짜리 며느리로 거듭나고 있었다.
"허허 이것 참··· 하하···."
"시원하시죠?"
"하이고 이거 영광입···."
"어허~ 며느리한테 영광이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아버님~"
"하하, 그래···."
그리곤 저녁이 되니 이참에 잠까지 자고 가기로 한 은서는 사실 다른 속셈이 있었다. 어떻게든 진혁이 옛날 사진을 보고싶었던 것. 그래서 진혁이 손을 붙잡고 조르듯 말했다.
"서방~ 우리 같이자자~"
"예? 그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뭐 어때~ 결혼할건데~"
"그래도 남자랑 여자가 같은 방에서 잔다니···."
"너 응큼한 생각 하는구나? 말동무나 해달라고 이 바부야!"
그렇게 빈방으로 끌어들여 잠을 재워놓고 새벽 2시까지 기다린다. 그 다음 몰래 일어나 화장실 가는 척 진혁이 방으로 빠져나오니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특전사 출신은 잠입에도 귀재거든~'
우리우리 서방님 방은 어떤 곳일까?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탐험가 이은서의 손길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게 남자 방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고 기대했던 냄새조차 나지 않으니 먼지만 조심스레 날리고 있었다. 방 한켠엔 1인용 침대가 있는데 진혁이가 누웠던 곳이라 생각하니 응큼한 기분이 들어버렸다.
'헴헴. 가만있자. 우리 서방 옛날 앨범 사진이 어디에 있나~?'
책꽂이에 없었다. 책상밑 어딘가에 있을까 살펴도 보고 침대 밑에 있을까? 아니면 서랍 속에 있을까? 조심조심 열어보곤 실망하길 수 차례. 책상 뒷켠 먼지 쌓인 벽 구석에 숨겨진 앨범 3권이 비닐봉지와 함께 눈에 들어왔다.
'앨범사진을 왜 이런 먼지나는 곳에 숨겼대? 나한테 보여주는게 그렇게 싫었나? 부부끼리 뭐 이런걸 다 숨기고 그래~'
문까지 닫아놓고 구석에 쭈그려 앉은 은서는 손전등을 들고 천천히 앨범 사진을 펴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진혁이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서방님인걸~ 콩깍지 낀 신부 눈엔 다 이뻐보인답니다~’
은서는 노련한 손놀림으로 앨범을 뒤져본다. 하지만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1반. 급훈은 ‘하면 된다.’ 45번 학생 김진혁을 찾았을 때 은서의 눈에 들어온 건 시꺼먼 저주의 흔적이었다.
"이··· 이거 왜이래?"
볼펜으로 낙서되어 있는 3학년 1반의 사진은 선생님부터 학생까지 눈깔에 구멍이 뚫려있었고, 여기저기 난잡할 정도로 찍찍 그어진 낙서들이 뒤덮혀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힘을 주었으면 볼펜자국에 의해 종이가 뚫렸을 정도라 원한과 저주가 오한이 들 정도로 공포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은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앨범도 펼쳐보았다. 그것들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갈갈이 찢겨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니 아마도 고등학교 앨범. 잔해물들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비닐봉지 안에 수북히 담겨 있었다. 그것들 역시 볼펜자국이 즐비하게 칠해져 있고 사람 눈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머리통 전체가 구멍났을 정도라 원한에 비례한 것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초중고 앨범이 다 이 모양이야···."
두려운 마음에 손을 부들부들 떠는 은서의 뒤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제 방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은 앨범의 주인인 진혁이였다. 어둠속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모습이 두려워져 은서는 주춤대고 말았다.
"진혁아···."
"도둑년처럼 숨어들어와선 책꽃이부터 서랍까지 마음대로 뒤져서 기여코 찾아내셨군요. 남의 안좋은 추억을 훔쳐 보니 소감이 어떻던가요?"
"아니야 이건···."
"가소롭나요? 부끄럽나요? 병신같다 느끼셨겠죠. 찌질이 새끼가 소심하게 앨범사진에 화풀이를 해놨다고. 그런 생각이라도 하셨습니까?"
그러자 은서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진혁아, 그런 생각 한번도 안했어. 진짜야!"
"정말 너무하십니다."
"난 궁금했어, 정말 그것 뿐이야! 우리 신랑 옛날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을까? 단지 그런 생각을 했을뿐인데···."
"아무리 부부될 사이라지만 숨기고 싶은 개인사라는 게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학창시절에 친구 한 명 없었다고. 학교폭력으로 자살까지 하려 했던거 뻔히 아시는 분이 남의 앨범을 훔쳐보셨습니까?"
"미안해, 다신 안그럴게···."
"날 밝는대로 돌아가주십시오. 경호실에서 직원을 불러올테니까 혼자가시구요."
"돌아가라니? 너는?"
"전하께 실망했습니다."
알고 있지만 아는 것보다도 더 민감한 진혁이의 역린이 있었다. 강남의 아파트에 살고, 유학까지 다녀왔던 친위대 엘리트는 학창시절의 모든 기억이 건드려선 안될 역린이었다. 모든걸 알게 됐다 착각한 신부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지.
학창시절 이래로 단 한번도 친구가 없었다는 고백이 단지 '순화된 표현'이었다는 것을. 이 남자의 학창시절에 대한 진실이 이랬던 것이다.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던 그 날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소년의 유언.
<모두를 죽이고 싶었다. 잠을 자는 날이면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한다. 팔다리를 자르고 토막을 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괴물이 되었음을 알았다. 내 인생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건 자살이었다. 살아남아 황제를 만나고 구원을 받은 소년은 30살이 된 현재도 그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역린이 되었다. 이제는 황태녀와 결혼을 논할 정도로 사회 최고의 엘리트 층이 된 그는 살기어린 표정으로 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서워···.'
겁에 질린 은서는 두려움에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