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Ep12. 배신자의 밤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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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이연은 덕수궁에 여야대표를 불렀다.
여당 대표로는 현직 총리를 겸하고 있는 이범석 총리가 경호원들과 함께 입궐했고, 야당 대표로는 신민당 총재 김영현이 부총재 김대정과 함께 입궐하여 황실과 입법부간의 영수회담이 이루어진다.
이번 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참가자들 모두 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해 제국익문사에 제출했는데, 뭐 때문에 회담을 했고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하나도 알려주질 않으니, 덕수궁의 입구인 대한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궁을 나오던 김영현 총재에게 물었다.
<어떤 얘기들이 오간겁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자 김영현 총재가 딱 한마디를 올렸다.
<가는 길은 달라도 우린 모두 조국의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시기 한국독립당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제주도에 있었던 대국민담화는 선거에 불리했으면 불리했지 유리한 내용이 하나 없어 8월 총선을 앞둔 간부들을 불안하게 한 것이다.
<제주 사건을 잘 수습하셨으면 그대로 묻어버려도 됐을텐데, 왜 하필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고백하셨단 말인가? 민심이 요동치기라도 하면 어쩌실려고?>
<전제군주제 개헌도 안하겠다 하시니 더 답답할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을 일거에 날려버릴 이범석 총리의 선언이 이어지니 장소는 한국독립당 당사의 대회의실. 노인이 된 영웅 이범석은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꼿꼿이 일어나 모든 간부들에게 자신의 각오를 내비쳤다.
"전제군주제든 입헌군주제든 선거에서 이기면 그만이야. 뭘 그리 걱정하나? 내가 총리야! 내가 버티고 있는 이상 우리가 패배할 일은 없어!"
그러자 옆에 서있던 부총재 겸 국방부장관 김종규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면, 연임을 결심해주시는 겁니까?"
"내가 총리직만 15년을 한 사람이야. 이까짓 선거 질거라 보나?"
"필승입니다!"
1900년생. 올해로 76세인 이범석 총리는 산삼이라도 삶아먹었는지 권력에 대한 야망이 청춘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내각제다. 내각의 수장인 총리는 연임의 제한이 존재하지 않아 선거에서 이기면 임기도 연장되는 구조다. 하지만 임기중이라도 지지율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내려와야 할 부담이 있었는데 그의 15년 집권기는 철옹성 같은 면이 있었다. 무서운건 오로지 세월뿐.
"조국의 독립과 통일의 과업을 달성했지만 민족의 운명은 여전히 백척간두일세. 동지들이여, 날 믿고 다시 한번 싸워주겠나?"
영웅의 선언에 모든 간부가 눈을 불태우며 결의를 담아 외쳤다.
<예! 각하!>
민족의 영원한 독립을 보장할 그것을 위하여.
***
그 시각 친위대 수도방위사령부의 한 사격 훈련장에선 여인들의 사격대회가 열렸다. 조선부인회에서 주최한 이번 행사는 친위대와 협력하여 진행한 것인데 사실상 이연이 명령한 행사다. 서북방위사령관의 전투복을 차려입은 은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으에에··· 결혼준비하기도 바쁜데 왜 사격을 하란거야···."
진희 언니가 말했다.
"얼마 전에 타임지에 나오셨잖아요?"
"뭐 그랬지··· 올해가 여성의 해였다고 했던가?"
어깨가 축 늘어진 은서에게 부속비서관 박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는 지금 모든 인류 여성들의 희망이라구요! 전하께서 전면에 나서면 나서실수록 여성들의 권익도 증진될건데 이럴 때 충분히 활약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뭘로? 총으로? 사격대회로 여성의 권익을 증진시킨다고?"
"여자도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그렇게 외치는 진희언니를 보며 은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담아 중얼거렸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언니··· 내 이미지를 철의여인으로 굳혀서 후계자 입지를 강화하려는 거잖아···."
그리곤 사격장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친위대까지 각지에서 복무중인 여군들이 한가득이었다.
"딱 봐도 하사나 중사, 소위, 중위 정도밖에 안되는 애들 같은데 걔네들 사이에서 장군님인 내가 사격대회를 뛰라고? 심지어 황태녀인데? 이야··· 이건 너무 노골적이다. 아주 그냥 일부러 다 빗겨쏘겠구만."
하지만 뒤이어 은서를 찾아온 참가자들을 봤을 때 은서는 생각을 바꿔야 했다.
"오랫만에 몸 좀 풀어봐야겠군요."
"상원의장님??"
상원의장 안수진이 사격장에 찾아왔다. 그녀의 나이 조선 기준 61세.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여성은 선글라스를 반짝이며 자신감을 담아 말했다.
"제가 왕년에 사격실력으로 이름을 좀 날렸거든요."
"어디서요?!"
"미국 살 적에 해군 장교로 복무했었죠. 제 실력을 보시면 아주 깜짝 놀라실겁니다."
"어··· 그러네?"
"전하라고 해서 안 봐드릴겁니다. 단단히 각오하세요."
중위 나부랭이들은 황태녀 전하 눈치를 보며 50%의 사격실력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상원의장. 정치적 입지 하면 최고를 달리는 여인이 은서 앞에서 버티고 서있었다.
거기에 또 다른 여인이 사격장에 찾아왔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덕수궁의 비선실세. 중정 요원 출신의 이화였다.
"바쁘신거 아니었어요?!"
"휴가라서요."
"휴가인데 사격은 왜 하러나오신거에요?!"
"취미가 사격이라."
거짓말이다. 덕수궁에 미국의 국무부장관이 왔다간 판에 안 바쁠리가.
"거짓말! 키신···."
"어허. 그건 비밀!"
"넵···."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50년대 옛날 전투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나타나니 왕년에 한국전쟁을 뛰었던 여군들이셨고, 그보다 더 올라가면 한복 차림의 할머니들이 나타나시니 독립운동가 분들이었다. 그야말로 총을 쏴본 모든 여성들이 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날 위해서 상원의장님부터 독립운동가분들까지 모셔왔다고? 설마 모두다 날 위한 들러리들이야? 후계자 작업이라도 이건 너무하잖아?'
그렇게 1사로부터 10사로까지 방탄모를 갖춰입고 흑색 리볼버 권총을 파지한 여인들이 신호에 맞춰 사격을 시작했다. 은서에겐 귀마개가 지급됐고 부사수로 진혁이가 섰다. 혹시 모를 트라우마 때문에 이루어진 배려였다.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근데 큰 기대는 하지마. 적당히 쏘고 빗맞출거거든."
"빗맞추신다구요?"
하지만 그 생각도 고쳐야 했다. 3사로에서 사격을 하는 상원의장님의 패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까짓 사격쯤은!”
상원의장의 호기로운 한손 사격이 표적지의 정중앙을 완벽하게 꿰뚫는 신의 솜씨로 입증되니 은서 바로 옆 2사로에서도 사격이 시작됐다. 요원시절에 이름을 날린 이화의 얼굴에 살기가 담겼다.
'뭐야 다들 장난아니잖아?! 이러다 지겠어!'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계자 작업과 관련 없는 진정한 승부. 땀흘리며 승부욕을 불태우는 이은서가 진혁이에게 말했다.
"진혁아, 내 어깨에 손 좀 얹어줄래?"
"어깨요?"
"내가 지금 몹시 흥분했거든."
진혁이의 손길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두근거리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사격하기 딱 좋은 고른 숨소리의 패턴이 돌아왔다.
"1사로 사격 개시!"
은서의 여섯발들이 리볼버 권총이 불을 뿜었다. 영점이 잘 잡힌 총은 은서가 겨누는 곳을 노려 정확하게 총알을 쏘아내니 25m 거리의 표적지 정중앙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자신감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거침없이 총을 쏘았다. 그렇게 마지막 여섯발의 총알을 쏘아냈을 때 그것 조차도 가운데를 뚫어 만점이 나왔다.
"좋았어! 내가 1등이다!"
가··· 아니었다. 옆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2사로의 여인이 있었다. 이화.
"실장님···?"
"꽤 하시네요. 저만큼은 아니지만."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자세 속에 깔끔하게 뚫린 표적지는 은서와 똑같은 만점. 중앙정보부 1차장 출신의 사격실력이 두려울 정도였다.
'정말 진심이었어? 한 발도 안 봐준다고?'
만점자들을 위한 다음 코스가 준비되어있었다. 좀 더 멀어진 거리의 사격장은 더 이상 권총으로 승부보지 않았다. m16 소총이 지급된 250m 거리 2라운드는 이제 진정한 사수들의 진검승부가 된다. 이 정도 거리면 사람 형태의 표적은 보이지만 거기 걸려있는 표적지는 육안으로 거의 안보인다.
"미친··· 여기서도 표적지를 걸어놓고 점수를 잰다고?"
이화가 말했다.
"19번도로 전투의 영웅이시면 이 정도는 가벼우실텐데요?"
"그야 그 땐 스코프가 있었으니까."
"해보세요. 제가 진심으로 상대해드리죠."
그렇게 최후의 승부가 시작됐다. 여전히 많은 경쟁자가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이화로부터 부추김을 받는 이은서의 눈동자에 불꽃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총알의 궤도에도 영향이 가기 시작한다. 10점 만점의 10점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 시대 최고의 명품소총 m16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유효사거리 550m, 5.56mm 탄환을 쓰는 강렬한 힘이 불꽃이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됐어! 할 수 있겠어!'
옆사로에선 이화가 노련한 솜씨로 사격을 하고 있었다 쏘면 쏠 때마다 맞추는 솜씨가 그녀의 요원 시절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질 수 없지!'
그녀가 요원이었다면 은서는 참전용사였다. 전쟁터까지 다녀온 실전의 감각은 훈련장에서도 유효하다. 바람의 감각을 느끼며 저격수의 심정으로 쏘는 총알이 역시나 쏘면 쏘는대로 중앙을 꿰뚫었다. 하지만 이변이 발생했다. 총에 탄이 걸려 기능 고장을 일으켰다.
"젠장! 하필 이 때!"
"도와드릴까요?"
"아니, 내가 할게!"
진혁이의 도움도 마다하는 은서는 전장 한가운데 놓인 군인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전쟁터에서도 간혹 이렇게 총기 고장이 일어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속에서도 상황을 수습해 전투 능력을 회복하는 것도 군인의 능력이다. 운도 능력이요 불운을 극복하는 것 또한 능력이다. 불행하다고 해서 봐주는 적군은 없으니까.
무릎꿇어 탄창을 분리하고 노리쇠를 후퇴시켜 걸린 총알을 빼내는동안 모든 사로의 사수들이 사격을 마쳤다. 남은건 오로지 자신뿐. 모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급한 마음이 들었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전하, 천천히···."
‘모두가 날 기다리고 있어. 어서 빨리 쏘지 않으면···!’
진혁이의 목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은서는 마지막 총알을 쏘았다. 그것으로 모든 사격대회가 끝났다.
"실수해버렸어···."
표적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선을 걸어가는 동안 은서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총알은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고. 참담한 심정에 목이매었다. 9발까지 완벽하게 나가던 총알이 마지막에 걸려선 집중력을 잃어버렸다. 급하게 쏜 총알은 아마도 비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표적지를 확인하던 이화가 능청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실수를 해버렸네? 아까워라~"
“만점이신가봐요? 축하드려요 실장님.”
고개숙인 은서의 비참한 칭찬에 이화가 답했다.
“축하는 제가 드려야겠는걸요?”
“예?”
"만점이시잖아요?"
은서는 그제야 자신의 표적지를 확인했다. 모든 총알이 표적의 정중앙을 뚫어내니 구멍이 10개였다.
“이럴리가···.”
"축하드려요. 명사수님."
실장님의 표적지는 총알 구멍이 9개였다. 그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 방아쇠를 당긴 순간 실수했음을 분명히 느꼈는데. 나는 10점이고 실장님이 9점이라니. 그래서 물었다.
"혹시 제 표적지에 총을 쏘셨나요?"
"그럴리가요? 전 전하보다 먼저 사격을 끝냈어요. 그런 제가 전하의 실수를 미리 예측해서 한 점을 드렸다구요? 에이 설마~"
“그렇긴 한데···.”
“기분탓이겠죠.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이화는 미소지으며 사격장을 떠났다. 할말을 잃어버린 은서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격대회의 1등은 은서가 차지했고 대회의 주인공이 되어 트로피와 함께 기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역시 사격 솜씨가 남다르십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이번 대회의 승자는 참가자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1등을 가리는 것보다 대회의 의미를 되새기는게 중요하겠죠. 모쪼록 이런 좋은 대회가 앞으로 계속됐으면 하는 바램이며 상금은 모두 기부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회의 주인공이 되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게된 황태녀의 뒤에서 묵묵히 경호를 서던 진혁이가 이화에게 말했다.
“마지막 열 번째 총알, 황태녀 전하의 표적지에 쏘셨더군요.”
그러자 이화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랬던가요?”
“부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봤으니까요. 전하께서 총기고장을 해결하시는 동안 마지막 총알을 전하의 표적지로 쏘셨죠. 실수할 걸 미리 예상하셨던 겁니다.”
“역시 진혁군 눈은 못 속이겠네요.”
“위험했습니다. 전하의 총알이 고스란히 박혔다면 표적지의 구멍이 11개가 되니까요.”
“상관없을거에요. 제가 실수로 잘못 쐈다 하면 그만이니까. 바람까지 불었죠. 전하는 여전히 10발을 맞춘 명사수인거고, 전 아깝게 한 발을 놓친 2등인거에요.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죠.”
“왜 그렇게까지 하신겁니까?”
“주군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신하의 도리니까요.”
그것이 이화가 오늘 대회에 나온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