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Ep12. 배신자의 밤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은서의 흑장미 배달은 5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대원의 유가족이 하필이면 강원도 산골짜기에 살았던 탓에 진혁이가 몰아주는 포니 자동차를 타고 울퉁불퉁 비포장도로까지 다녀야 했다.
이유인 즉 실미도 요원들 중 부중대장님이 한국전쟁기 부모님을 잃어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친아들처럼 키워주셨던 원장님께 보답을 하고 싶다는 게 지원 사유였단다. 그래서 제국익문사가 매 달마다 쌀 한트럭씩 익명으로 기부해왔는데 오늘은 흑장미를 한 송이 추가하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 쌀. 꽃만 배달하고 가려던 은서는 혼자서 낑낑대는 배달 기사님이 눈에 아른거려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 시대의 쌀은 짚으로 짠 가마니로 80kg.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 몸무게의 2배에 달하는 그것을 지게에 메고 일일이 트럭에서 옮겨야했다. 땀을 뻘뻘 흘리는 황태녀 전하를 바라보며 진혁이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테니 그냥 쉬시죠. 그냥 하기도 힘드실텐데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끼시고 어떻게···."
"내가 이래봬도 특전사 출신이거든? 안되면 되게 하라!"
그 여자 이은서. 대한제국의 특전사 출신은 여전히 힘이 장사라 (아무리 봐도 거짓말인) 자기 몸무게의 2배짜리도 용맹하게 실어날랐다. 감기 걸린 것도 아닌데 마스크를 끼고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는 수상쩍은 여자가 보기와는 다르게 힘이 장사 같으니 보고 있던 원장님도 감탄어린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구슬땀을 흘리운 하루 일정이 끝났을 땐 달밤이 반짝이는 시골길. 죽어가는 표정으로 벤치에 누워있는 은서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줘···."
진혁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제가 하겠다니까 굳이···."
"서방 혼자 그 많은걸 다 들게 하라고? 에이 그건 안되지···."
그렇게 말하며 베시시 웃어버리고 마는 황태녀였다. 행복하게 웃던 아이들의 미소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거기에 좋은 소식 하나.
"다들 무사히 돌아오셨다니 다행이야. 이제는 부대 이름이 유령이라고 했던가? 정말 멋진 이름이잖아?"
"평양은 언제 돌아가실겁니까?"
"슬슬 돌아가야겠지? 근데 나도 잘 모르겠네. 결혼을 언제 할지 모르니까."
"전 장군님께 너무 오래 군권을 맡긴 기분입니다. 이거 이러다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런지···."
"음··· 그건 별로 걱정 안해도 될걸?"
이 시기 은서는 휴가를 쓰고 있었다. 황태녀의 결혼 준비로 인한 공적인 휴가. 하지만 사이공 철수 작전을 포함하면 두어달 가까이 자리를 비운 셈이라 부관인 진혁이 입장에선 슬슬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은서의 여유엔 이유가 있었다. 사령부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었다.
"내가 서북방위사령관으로 있는건 교육 목적이라서 말야. 나만 없었어도 전장군님이 사령관이 됐을걸?"
"그렇게··· 봐야 할까요?"
"그렇잖아?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인데 벌써 5성장군이라고.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지. 그럼에도 사령부가 제대로 돌아가는 건 다 그분 덕이니까."
그렇게 말하던 은서는 타임지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떠올린다. 맘만 먹으면 2차 한국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비유되어 있지만, 은서는 1%의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르신 인재분들이셔. 부사령관님도 참모장님도 사령부의 모든 참모들과 예하 군단장, 사단장님들까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이지. 나는 그분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하는 게 전부니까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는 없을거야."
"그런 점에서 보면 더 대단하죠."
"뭐가?"
은서의 물음에 진혁이가 웃으며 답했다.
"사이공은 서북방위사령부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돌아가는 정황에 따라 판단하고 지휘를 하시면서 임무를 완수하셨으니, 어떻게 보면 능력을 입증하신 셈이죠."
"에이~ 그것도 부하들이 유능한 덕 아니었겠어?"
"부하들이 유능해도 지휘관이 무능했으면 필패였을겁니다."
"그 말인 즉. 내가 적어도 무능아는 아니다 이거지?"
"예, 밥값하는 사령관님."
진혁이의 아부에 은서가 베시시 웃어버렸다. 그런데 그 때 벤치 밑에 굴러다니던 신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5월 1일자 독립신문의 첫페이지 하단엔에 기묘한 광고가 들어있었다.
"1면의 광고가 영어로 되어있네?"
베트남 지도를 배경으로 국기를 여러개 깔아놓은 광고였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미국 대사관에서 실은 광고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We Go Together!
함께 갑시다!
미국측에서 베트남전쟁을 함께해 준 동맹국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광고였는데, 태극기가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대만,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스페인이 들어가 있었다. 그걸 한참이나 읽어보던 은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광고를 걸었다고?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동맹국 중에선 대한제국이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으니까요."
"그래도 남의 나라 신문에 광고까지 걸 정도는 아니잖아? 그리고 이거 봐봐. 우리나라 국기만 사이즈가 유독 크다?"
"음··· 그건···."
여기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리 없어 두 사람은 덕수궁으로 돌아갔다.
5월 21일 아침이었다. 자다 일어난 은서는 배시시한 머리에 파자마 차림으로 외국 신문들을 읽고 있었다. 같은 날 미국의 뉴욕타임즈에도 광고가 올라가 있었는데 태극기가 다른 나라보다 30% 큰 사이즈로 배치되어 있었다. 독립신문과 동일한 대우였다.
'감사를 표할 순 있어. 근데 미국이잖아. 우리 신문도 모자라 자기들 신문까지 이런 대우를 해준다고?'
그 때 한 여자가 은서의 귀에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수라드세요~>
귀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의 주인공은 은서의 비서관인 진희 언니였다.
"잠깐만~! 이거만 보고 먹을게."
"뭘 그렇게 보시는데요?"
"이거 봐봐. 분명 미국 신문이거든? 근데 태극기가 걸려있다? 사이즈도 엄청 크고 광고를 발주한 것도 미국 정부야. 이거 뭔가 좀 과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
"아 그거요?"
"아는 것 좀 있어?"
"미국이 외교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대요."
"왜?"
"미국이 월남이랑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었잖아요? 근데 이번에 그걸 안지켰거든요. 동맹국이 배신을 당해 공산화까지 당했으니 어땠겠어요? 이범석 총리님도 유감을 표명하셨고 대만에서도 불안감이 이만저만 아니고. 그래서 보시면 태극기랑 대만 국기가 1,2등으로 들어가 있는거에요."
은서는 그제서야 이 광고의 숨은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아~ 이게 그러니까 동맹국 달래볼려고 올린 광고구나? 근데 우리나라 국기만 사이즈가 큰 이유는 뭐야?"
"우리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으니까요. 영국도 프랑스도 거절한 전쟁인데 제일로 열심히 도와준 나라니 엄청 고마웠겠죠?"
"음··· 그렇겠네···."
하지만 미국의 이상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시간 미국의 국무부장관 헨리 키신저가 기습적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평양의 주한미군기지를 거쳐서 밀입국한 그는 극비리에 덕수궁을 찾았는데, 이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의 모든 외교를 총괄하는 거물급 인사였다. 그런 그가 성큼성큼 석조전까지 들어와 접견실에서 이연을 찾으니 둘간에 이루어지는 밀담이 은서 입장에서 수상해보였다.
"나··· 이제 아침먹었어··· 옷은 커녕 씻지도 못했는데 미국의 국무부장관이 와있잖아? 뭐 이래?"
놀란건 진희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왠지··· 몰래 온 느낌이죠? 기자들도 없는거 보면."
"그러게. 우리도 왠지 못본 척 해줘야 할 기분인데?"
마침 복도에서 비서실장님이 지나가길래 은서는 슬그머니 팔을 잡고 물어봤다.
"실장님, 저도 들어가야해요?"
그러자 이화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모르는 척 해주시구요. 오늘 장관님이 오신건 비밀이에요. 그러니 어디가서 절대 발설하시면 안돼요. 아셨죠?"
"그래도, 차기 황제가 될 황태녀인데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뭔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급하게 온거죠?"
"별 일 아니에요. 한미동맹은 굳건하다. 상호방위조약을 준수할테니 안심해라. 이런거밖에 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돼요."
그러더니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늘 진혁군의 부모님을 뵈러 가시죠? 예쁘게 잘 차려입고 멋지게 인사드리시구요. 화이팅!"
그러더니 접견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모습조차도 은서의 눈엔 이상해보였다.
"또 뭔가를 숨기고 있어···."
***
접견실의 밀담은 키신저 국무부장관의 항의로 시작됐다.
"당장 핵무기를 포기하십시오!"
핏대를 세워가며 얼굴을 붉히는 중년의 백인 남성. 워싱턴 정가를 주름잡는 미국의 실력자. 헨리 키신저조차 당황하게 만든 그것은 대한제국의 핵무기 문제. '연구'단계가 아니라 '양산' 단계였다는 건 그 조차 몰랐던 경악스러운 진실이었다.
"진정하게 장관."
"이건 명백한 배신입니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겁니다."
이연은 늘 그렇듯 접견실에 찾아와 누군가 자신을 협박할 때면 커피를 마셨다. 협박당하며 마시는 커피가 이상하게 향기로웠다.
"가만두지 않을거면 당장 경제제재라도 하지 왜 여길 왔나?"
"그건···."
"핵무기는 빼앗고 싶은데 쌓아둔 영향력은 아깝고. 그래서 협박이라도 해보겠다 이거겠지."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저희에게 먼저 말해주신거. 그거 만큼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죠. 저희가 인사드릴 때 포기하시는게 좋을겁니다. 못본척 해드릴테니 당장···."
하지만 이연은 순순히 내줄 생각이 없었다.
"완제품이야. 당장이라도 터트릴 수 있는 멀쩡한 핵폭탄이지. 이걸 만드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댓가라도 주면서 포기하라고 하는 게 맞지 않겠나? 기브 앤 테이크여야지."
"핵무기는 거래의 수단이 아닙미다 폐하!"
"내 국민 내 나라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만든거야. 거기에 친일파들한테 몰수한 재산까지 들어갔지. 그들 자금이 다 어디에서 나온거겠나? 식민지시절 우리 국민들 착취한거야. 피와 땀 눈물이 섞인 한 많은 폭탄이라고 이거."
"그렇게 모았다 쳐도 부족할건데요? 핵개발은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초대형 사업이니까요."
"그래서 내가 인도와 공동개발을 한 게 아니겠나? 핵개발을 포기하는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데 장관. 자네들은 되고 우리만 안된다는거. 적반하장이야."
그리곤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경고하듯 말했다.
"내 핵을 가져가고 싶으면 정당한 댓가를 내놔. 그게 아니면 핵보유를 허락하던가. 왜? 돈이 없나?"
"......"
"하긴 돈이 없겠지. 돈이 없어서 월남이 망하는 것도 못 막았거든. 군대 보내기 싫었으면 돈이라도 주면 됐을 것을 그 조차 안해서 공산화 되도록 방치한거야."
"저희가 그들에게 돈을 줘야할 의무는 없습니다. 폐하."
"하지만 탱크며 총이며 비행기는 잔뜩 퍼줬지. 그런데 정작 유지비만 안줬어. 총은 주는데 총알을 안 준거라고.”
그리곤 커피를 내려놓은채 키신저 장관을 응시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보게. 작년 11월 우리가 정상회담을 했을 때 약속받은 경제지원. 그것도 실은 립서비스가 아닌가?"
"......"
"너희들은 돈이 없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걸 주기 위해 의회를 설득할 능력이 없지. 왜? 포드 대통령은 권한대행이거든. 닉슨 대통령이 하야를 해버려서 임시로 그 자리를 대신한 거니까. 그런 작자가 거액의 돈을 달라 그러고 있으니 의원들이 듣겠냐고."
"대통령 각하께선···."
"정통성이란 거야. 나처럼 핏줄이 좋은 것도 아니고,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국가에서 선거로 뽑힌 것도 아니니까 신기루 같은 권력이지. 자네도 지금 어렵잖아? 중국과 화해해서 소련과 이간질을 시키려 했는데 그것도 실패하고, 베트남 전쟁까지 말아먹은 상황에 무슨 돈? 택도 없을거야."
그렇게 말하던 이연이 소근거리듯 키신저 장관에게 제안을 걸었다.
"이럴 땐 말이야. 국익대로 하자고.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말이야."
"우리의 국익은 대한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겁니다. 폐하."
"발상을 전환해봐. 대한제국의 핵무기 보유가 미국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그게 왜 저희들의 국익에 부합합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요."
"우린 안정적인 나라야. 쿠데타도 없고 부패하지도 않았지. 망하거나 배신할 걱정이 없는 굳건한 친미국가가 더욱 강해져서 미국과 함께할텐데. 이거야 말로 국익이 아닌가?"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키신저 장관의 어깨를 토닥이며 소근거렸다.
<주한미군을 철수시켜도 돼. 더 이상 남의 나라 좋자고 미국인들을 고생시킬 필요 없어. 그 대신 핵보유국이 된 우리를 이용해서 중국과 소련을 견제해봐. 손 안대고 코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이게 바로 미국의 국익인 거라고.>
그렇게 수면 아래서의 협상이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진 않았다. 장관이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집무실에서 담배를 찾고 있는 황제에게 김진혁 중령이 찾아왔다.
"은서는? 결혼 준비는 어때?"
"오늘 점심쯤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고."
"저··· 폐하."
김진혁은 자신의 장인어른이 될 황제에게 조심스레 청을 올렸다.
"협상 말입니다. 이제 슬슬 황태녀 전하도 참여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은서가? 키신저 장관이랑? 그게 가능하리라 보나?"
"어려운 만큼 경험이 되겠죠. 폐하께서 협상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큰 경험이 되실겁니다."
"은서가 그렇게 말하던가?"
"냄새를 맡으셨습니다. 뉴욕타임즈에 올라간 광고를 보시곤 미국과 대한제국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정도까지 도달하셨죠. 키신저 장관이 왔다간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녀 전하십니다. 핵개발에 대해서도 어느정돈 알고 계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하지만 그 말에 이연이 부정적으로 잡아떼듯 말했다.
"아직은 안돼."
"숨기고 있다 생각하실겁니다. 전하께서 제일 속상해하시는 상황일텐데요."
"알아.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협상이 잘 안되셨습니까?"
이연이 재떨이에 담배를 지지며 말했다.
"미국이 원하는 국익이란 말이야.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떡주무르듯 하는 걸 말하는거야.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동생 같은 나라."
"허면···."
"주한미군도 배치해주고 핵우산도 약속해주고. 그러면서 '내가 지켜줄게!' 이렇게 말하며 형노릇을 해줘야 동생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거란 말이야."
"하지만 핵이 있으면···."
"형은 필요없어. 나도 다 컸다고! 이렇게 대드는 동생이 되지.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상황. 그게 바로 지금이거든."
"그럼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핵무기를 용인받으려면 발상을 전환시켜야 해. 형과 아우가 아니라 동등한 친구로 인정받아야 하지."
"......"
"하지만 생각해봐. 동생이 형과 맞먹으려 들잖아. 어느 형이 이런걸 가만두겠나? 서열관계를 확실히 정리하려 들겠지. 국제사회에서 이런 상황은 목숨을 걸어야 해."
하지만 이연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아버지의 짐작이었다.
"은서라면 반대했을거야. 핵무기는 근본적으로 대량살상무기거든. 수백 수천만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대한 폭탄으로 대한의 독립을 지킨다는 걸 녀석에게 납득시켜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겠나?"
사위 입장에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바로 옆에서 오랫동안 은서를 지켜본 진혁이기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충격이 크시겠군요 확실히···."
"녀석은 아직 해야할 일이 많아. 핵무기 같은 건 나중에 알려줘도 돼. 그러니까··· 사위가 될 너한테 장인로서 부탁 하나만 하지."
"뭐든 분부해주십시오. 폐하."
"내 딸은 황제가 될 몸이야. 하지만 권력엔 기생충이 붙기 마련이거든. 한 몫 챙겨보려는 놈들이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먹고 숙주를 괴사시킬 수도 있어."
이연은 김진혁 중령의 눈을 노려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그들로부터 내 딸을 지켜주게. 녀석이 올곧게 성장해서 명군이 되려면 자네가 많이 노력해야 할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폐하."
기생충은 숙주와 가까이 붙어야 침투할 수 있다. 권력이라는 영양가를 지닌 이은서라는 숙주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권력자의 배우자가 되니까.
그래서 어쩌면 폐하가 말씀하신 기생충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폐하의 시선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자네가 많이 도와줘야 할거야>
실은 그 말이 '아무것도 할 생각 하지 마라'는 우회적인 경고가 아니었을까? 진혁이는 그렇게 생각해 식은땀을 흘려버렸다.
1975년 5월 21일. 오늘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