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Ep11. 사이공 철수 작전 (10)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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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 공사를 헬기에 태워 보낸 실미도 요원들은 대한제국의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텅빈 대사관은 더 이상 태극기도 휘날리지 않았고 귀뚜라미 소리조차 들리질 않으니 남아있는 거라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포성 뿐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이 입는 붉은 군대의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송선에서부터 챙겨왔던 큼지막한 짐가방엔 그들이 쓰는 소련제 기관단총이나 권총, 날붙이 따위도 들어있으니 그것을 모두 챙기고 느긋하게 장비 점검을 했을 때 부중대장이 강 소령에게 말했다.
“6시간 지났습니다. 이쯤되면 미국대사관도 철수를 마쳤겠지요.”
“교민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남은 교민이 없다고 봐야겠죠.”
“그래, 그럼 이것으로 확정짓지.”
실미도 요원들이 여기서 느긋하게 장비 점검이나 하던건 제국익문사가 하달한 작전의 첫번째 목표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더 이상 남은 교민이 없는지 확인을 하라는 것. 만약 여기서 남은 교민이 또 있었다면 실미도 요원들이 책임지고 탈출을 시켰을테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은 교민은 없었고, 책 한권을 챙긴 뒤 다음 목표를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북베트남군 복장이지만 상관없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사이공의 다리가 뚫렸을테니까.
그렇게 4월 30일 새벽 4시가 됐다.
예상대로 사이공에는 큼지막한 총성들이 여기저기 들리기 시작했다. 레민다오 장군이 지키던 사이공의 다리가 뚫린 것이다.
새벽의 어둠이 짙게 깔린 사이공의 길거리에서 실미도 요원들 눈에 들어온 풍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석상 앞에 서있던 장군님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결을했고, 패잔병으로 보이는 이들은 자동차 사이에 숨어 허겁지겁 군복을 벗어던졌다. 개전 초기 벌어진 현상과 같은 이유다. 군인인게 들키면 베트콩들에게 잡혀 죽을까봐. 그래서 민간인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사이공의 주민들은 건물 외벽에 걸린 남베트남 국기를 걷어버렸다. 이 때까지 남아있는 국민들은 처음부터 정부의 편이 아니었다. 부패한 정부에 진절머리가 나서 언제든지 빨리 혁명군이 왔으면 싶은. 그런 마음으로 조국을 등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남베트남 국기를 걷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어지러이 널부러진 노란 국기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심코 밟히는 모습은 이 나라가 결국 이런 최후를 맞았구나 하는 씁쓸한 감정을 일으켰다.
“태극기가 저렇게 될 수도 있었겠지. 우리의 50년대엔.”
강소령의 물음에 부중대장이 답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평양의 시민들은 인공기를 불태웠다고.”
한국전쟁기 아버지 세대들이 겪었던 평양의 풍경이 이랬다. 몰려오는 대한제국군에 평양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북한의 깃발을 한데 모아다 집어던지거나 밟거나 화형식을 했더란다.
누군가는 기회주의적 심정으로 그랬을 것이고, 누군가는 진심으로 싫어서 그랬을 것이지만, 정통성의 차이가 있었다.
<황태자 전하 만세!>
<민족의 영웅이 평양에 오셨다!>
그 시기 이연은 일제로부터 조선을 해방한 독립운동가이고 민족의 영웅이었으니까. 김일성과 비교했을 때 정통성 싸움에서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평양 시민들 조차도 한국전쟁기엔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정통성
한 나라의 정부 혹은 최고 지도자가 구성원들로부터 얼마나 인정 받을 수 있는지를 따지는 척도. 그것이 높으면 힘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알아서 따라주는 존중이란 마법이 생긴다.
고작 솔방울로 수류탄 놀이를 할 뿐인 누군가와 조선총독부에 태극기를 꽂은 영웅의 차이는 불타는 인공기와 평양 시민들이 들고 나온 태극기로 증명됐던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어떨까?
사이공에선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남베트남에 프랑스 식민정부의 부역자들이 기득권으로 자리잡는 동안, 북베트남엔 독립운동가 출신의 민족영웅이 자리잡았다.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지만 부패하지 않았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 사람들은 그 노인을 ‘호 아저씨’라고 불렀다. 정통성 측면에서 김일성과 이연 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남베트남의 국기를 버리고 별이 그려진 깃발을 걸었고,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나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민족의 영웅이 돌아오셨어!>
<사이공이 해방된거야! 만세! 만세!>
사이공 사람들이 실미도 부대를 호치민의 혁명군으로 오인해버렸다. 그 정도로 경계심 없이 그저 만세를 부르고 새로운 나라를 환영하고 있었다.
“작전 시작하겠습니다.”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실미도의 요원들은 기름통을 들고나왔다.
철수 작전이 너무 완벽하게 끝난 나머지 미국대사관이 텅 비어있었다. 성조기도 잘 가져간 거 같고 미국 해병대원들도 모두 철수. 안심한 요원들은 대사관 여기저기서 흩날리는 서류들을 한데 모아 기름을 부었다.
“이정도 되는 기밀서류를 불태우지도 않고 이리 버려두다니··· 미국이 이렇게 엉성했단 말야?”
요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미국 대사관의 문서들은 손으로 짜맞춰도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엉성히 파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종이 한장을 맞춰보니 미군을 위해 협력했던 현지인들의 월급 명세서가 나왔다.
“이게 북베트남 애들 손에 들어가면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날겁니다.”
“그래, 얼른 파기해주자고.”
실미도 요원들이 제국익문사로부터 전달받은 두번째 작전 목표는 기밀문서의 파기였다. 사이공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대한제국 혹은 미국의 대사관에 파기되다만 서류가 있는지 확인해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을 붙였다.
대사관을 환하게 밝힐 정도의 뜨거운 불길 속에 북베트남이 숙청했어야할 모든 반동분자의 명부가 잿가루로 사라져버렸다.
제국익문사의 노력으로 미국의 철수작전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완전무결한 성공으로 기록될 것이다. 누구도 버려지지 않았고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북베트남은 누가 부역자이고 누가 무고자인지 분간하지 못해 숙청을 하지 못할 것이다.
현지 경찰이나 군부에 남은 서류들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것까지 처리해주기엔 실미도 요원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무척 아쉽지만 적어도 대한제국과 미국을 위해 일한 동맹은 무사할 것이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사이공에서 도망을 택했지만.
그러는 동안 강 소령은 불꽃을 스탠드 조명 삼아 미국 대사관 잔디밭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강 소령님! 또 무협지를 읽으십니까? 하여튼 전쟁터에서 책읽는 버릇은···."
부중대장의 물음에 강 소령이 답했다.
"한참 재밌는 부분이었단 말이야. 내가 이거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얼마나 가려웠는지. 속이 다 시원하구만."
"그래서. 읽고 계시는 게 뭡니까?"
"비룡(飛龍). 와룡생 선생이 쓰신 불후의 명작이지. 영웅들의 다툼 속에 피어나는 양몽환과 심하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란~"
"하여튼 못말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실미도라는 이름 버리고 새 이름을 써볼까?"
"실미도란 이름 어차피 가칭이잖아요. 정식 명칭은 683일건데요."
"멋이 없잖냐?"
"그래서 뭡니까? 어디 들어나 봅시다."
"천룡방(天龍幇)!"
그러자 부중대장이 일고의 고민도 없이 단호히 답했다.
"기각!"
"어째서!"
“사파잖아요 그거. 왜 이름을 지어도 하필···.”
“너도 읽었구나?”
“......!”
부중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정정하여 말했다.
“아무튼 무협지에서 부대이름을 따오다니 인정 못합니다 그거!”
"이거이거 중대장이 바꾸겠다는데. 건방지게···."
"차라리 그냥 유령이라 하시죠.”
그러자 번뜩 떠오른 생각에 강 소령이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그래! 바로 그 이름이야! 은밀하고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우리들의 이름! 그만한게 또 없겠구만!"
“어쨌든 기밀문서 파기는 끝났습니다. 다음 작전으로 진행하시죠.”
“그래.”
사이공에 총성이 멎었다. 더 이상 교전이 일어나지 않는걸 보니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한 모양이다.
달빛이 아른거리는 새벽아래 소련제 탱크를 탄 베트콩 군인들이 사이공으로 밀려왔다. 게릴라였던 그들이 이젠 탱크도 타고있다. 그것으로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의 정문을 돌파하여 조국통일의 완성을 선언했다.
<혁명군이 승리했다!>
<베트남 만세!>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이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했다. 목청 높여 만세를 부르는 붉은 군대는 더 이상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그 사이로 제국익문사의 유령들이 천천히 걸어갔다. 똑같은 복장, 똑같은 무기, 그리고 비슷해보이는 외모덕에 누구도 강 소령이 대한제국 군인인걸 알지 못했다. 오히려 북베트남에서 온 동맹군으로 오인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31명의 유령들은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북파공작원의 능력은 중국땅에서도 통했고 베트남에서도 통했다. 김일성을 암살한 그들은 이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작전에 들어간다.
레민다오 장군이 살아있었다.
그는 사이공의 다리에서 마지막 결사대를 지휘하다 포로로 붙잡혔다. 애국자의 비극적인 최후 앞엔 남베트남의 합동참모의장 응우옌흐우한 준장이 있었다.
"합참의장! 니가 배신자였다니!!!"
북베트남 군인들과 나란히 서있는 합참의장은 사실 간첩이다. 남베트남은 이미 군부 최고위 직책까지 간첩이 들어찼을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
“배신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간첩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능해서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니죠. 상관이라는 새끼들이 모두 도망을 쳐버리니 떠넘기듯 받았을뿐. 제가 이 자리에 있는건 이런겁니다.”
그는 속삭이듯 레민다오 장군에게 말했다.
<우릴 탓할게 아니라 네놈들이 무능했던 걸 탓해야지. 간첩이 합참의장 자리를 꿰찰 때까지 걸러내지 못한 네 놈들의 무능 말이야.>
“크흑···.”
<시간을 줄테니 잘 생각해봐. 네가 패배한 이유. 간첩 때문일까? 부패한 정부 때문일까?>
레민다오 장군은 바닥에 주저앉아 주먹을 내리치며 절망했다.
“이 나라는 대체 얼마나!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단 말인가? 한 나라의 최고 지휘관조차 간첩이라니! 내가! 내가 이런 나라에 충성했단 말인가!”
합참의장이 된 간첩은 자세를 고쳐잡아 정중히 말했다.
“수용소로 보내.”
“예!”
그 남자의 예상대로라면 레민다오 장군은 처형되거나 공산당의 이념에 맞는 재교육을 받게 될터였다.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괴씸죄가 있어 10년 이상은 각오해야할 긴 복역기간일테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합참의장이 된 간첩 옆에 있던 북베트남 군인도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익문사의 흑색요원이다. 남베트남에 암약하는 간첩들에게 지령을 하달하는 군인으로 잠입해 모든 정보를 곁눈질하듯 훔쳐내고 있었다. 제국익문사가 작성해 올린 보고서도 이 남자의 작품이었고 이젠 위장 신분을 버리고 탈출할 계획이다.
그렇게 레민다오 장군을 차에 태워 포로 이송으로 위장해서 사이공을 탈출. 2시간 가량 질주해 메콩강 상류에 도착했다. 그곳엔 31명의 실미도 요원들이 낚시배 1대를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아하게 여긴 레민다오 장군이 물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건가?"
그러자 제국익문사 요원이 베트남어로 답했다.
"당신을 대한제국에 데려갈 겁니다."
"날? 대한제국에? 북베트남 군인들이 왜? 무슨 수로?"
“전 북베트남에 파견됐던 간첩입니다. 애국자들을 위해 준비된 영웅들의 나라가 있으니 그곳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난 패배한 장군일세. 영웅도 아니고 더 이상 살 자격도 없어. 나를 죽여주게. 더 이상 살 가치가···."
"당신의 활약덕에 우리 국민들이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쑤안록부터 사이공의 다리까지. 적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우리 국민까지 포로가 됐겠죠.”
"그건 나만의 활약이 아닐세."
"대표자가 될 자격은 충분하십니다."
"나는 너무 많은 전우를 잃었어···."
잃어버린 부하들을 떠올리며 무릎꿇은 장군은 흐느끼듯 울었다. 망해버린 나라, 죽어버린 전우, 잃어버린 고향. 모든것을 잃어버린 비참한 군인의 서글픈 울음소리였다.
“우리 국민들과 함께 탈출하는 베트남 난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합니다. 장군님.”
그러자 레민다오 장군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국민들이 있다고?"
"대한제국에 남베트남의 망명정부를 세울겁니다. 그곳에서 못 다 이룬 애국과 민주주의를 해보십시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강소령이 손을 내밀며 미소지어 말했다.
"대한제국은 동맹을 버리지 않으니까요."
따뜻한 전우의 손길에 레민다오 장군이 손을 잡았다. 31명의 유령과 1명의 흑색요원. 그리고 최후의 애국자는 낚시배를 타고 어둠 속 메콩강 너머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제국익문사의 작전번호 8451번은 성공적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