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Ep11. 사이공 철수 작전 (6)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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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이 되자 대사관 직원들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다 때려 부셔!"
뒷마당에 무전기를 한데 모으고 오함마로 때려부수어 못쓰게 만드는 직원들의 얼굴에 땀방울이 흘렀다. 대사관의 비밀 문서들도 뒷마당에 차곡차곡 모아서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대한제국을 도왔던 베트남 사람들의 명단이 타들어갔다.
은서는 불타는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게 만약 북베트남의 손에 넘어갔다면 현지 주민들이 보복을 당했겠죠?"
이대현 공사가 답했다.
"감옥에 가거나, 수용소에 끌려가 재교육을 받거나, 처형을 당할지도 모르지요. 특히 경찰이나 공무원, 군인들이 요주의 대상일겁니다. 그들에겐 적이었으니까요."
"이젠 못하겠네요. 누군지 모르게 됐으니까."
타들어가는 문서 사이로 노란색 남베트남 깃발이 보였다. 그러자 씁쓸한 표정을 짓던 이대현 공사가 물었다.
"월남은 정말 망하는걸까요?"
그러자 은서가 답했다.
"미국 대사는 부정하더라구요. 포드 대통령이 연설을 했는데도 그래요. 자기 나라가 그럴리 없다고. 분명 북베트남과 협상을 해서 안전을 보장해줄 거라고. 정말이지 헛된 믿음이죠. 거기에 전쟁을 다시 할 거라는 소리까지···."
"아프지 않으십니까?"
"아프다뇨?"
"월남전에 참전하셨으니까요. 동맹국인 남베트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거기에 부하들 11명도 잃고 마음 고생이 심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랬던만큼 타들어가는 저 노란 깃발이 아프게 다가올 거 같았거든요."
은서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아프죠 많이.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게 쉽게···."
"쉽지 않았어요. 고통스러웠고, 괴로웠고, 친구 죽는거 보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을 정도로 많이 아팠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건 내가 왜 싸웠냐는거에요."
은서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만 해도 모든 기억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월남전에서 활약했던 자신의 모습. 영웅이 될수록 늘어나는 살인의 기억, 죽음의 공포, 포화속에서 벌벌 떨었던 마지막 전투의 기억까지. 박철민 상사의 죽음 이래로 계속되어온 폐인같았던 자신의 삶. 술에 찌들어 악몽 속을 헤매는 자신의 몰골.
"내가 싸웠던 이유, 고생했던 이유, 전우들을 잃어야만 했던 이유가 저 타들어가는 월남의 깃발과 함께 사라지고 있어요.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리곤 눈을 떴다. 월남전의 참전 용사는 별 다섯개를 달고 있는 원수 계급의 장군이 되어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황태녀다. 아프다는 이유로 멈춰 있기엔 너무도 많은 책임이 어깨에 짊어져 있었다.
"실컷 울었고, 잔뜩 괴로워했고, 절망했으니 다시 일어나야죠. 저한텐 아직 해야할 일이 있어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죠."
그래서 말했다.
"월남은 망할거에요. 제가 싸웠던 이유는 사라질거에요. 하지만 저는 군인이에요. 군인에겐 절대로 변하지 않을 근본적인 목표가 있죠. 아무리 패배하고 무너져도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의 이유."
야망에 불타는 눈동자. 월남전 참전 용사 출신의 장군 이은서는 결의에 찬 눈동자로 감히 말했다.
"군인은 국민을 지켜야하니까. 전 그것을 위해 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왔어요. 사이공의 우리 국민을 구출해야죠. 그러기 위해선 월남이라는 나라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하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해요. 그게 제가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어요."
타들어가는 노란 깃발. 월남의 죽음. 기정사실화된 역사의 파도앞에 선 은서의 새로운 싸움.
"친구는 못 지켰지만 국민은 지켜야죠."
같은 시각 대사관 정면에선 태극기가 내려가고 있었다. 김영진 대사가 직원들 앞에서 엄숙히 선언했다.
"오늘부로 주월남대한제국대사관은 공식적인 업무를 종료합니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개 숙이는 직원들의 마음에 슬픔이 담겼다. 대한제국과 남베트남 사이의 끈끈한 우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들도 결국 동맹을 버린거야···.>
<그래도 우린 최선을 다했어. 이정도면 의리를 다한거야···.>
은서는 진혁이의 경호를 받으며 뉴포트항에 입성했다. 공황 상태였던 항구는 평온을 되찾았고 새들이 지져귀는 소리 아래 남아있는 조선의 배가 고작 1척이었다. 그곳에선 김훈 중령이 지친 표정으로 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왔냐?"
"피난민들은?"
"다들 탔어. 너만 타면 돼."
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완벽한 철수 작전이네. 조금의 실수도 없는 기적적인 성공이었어. 뉴포트항에 사람이 없을 지경이라니···."
"총 인원 7천 3백명. 꽉꽉 밀어넣었다 진짜. 내가 무슨 버스 안내양이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두 사람 앞에 고민거리가 남아 있었다. 친위대와 함께 딸려온 장갑차들이 배를 타지 못한 것이다.
“니 명령대로 사람이 먼저였어. 장갑차 태울 공간이 있으면 피난민 한명을 더 태워보냈지. 나만큼 말 잘듣는 부하 없다 너?”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오빠.”
은서는 결국 김훈 중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장갑차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친위대원들을 시켜 소이탄을 던져넣어 장갑차에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장갑차의 불길을 쳐다보며 친위대 장병들이 경례를 올린다.
하지만 그 때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왔고 은서에게 충격적인 요청을 올렸다. 모든게 끝난 줄만 알았던 완벽한 작전에 미련을 가져버린 그들이 한 말은 이랬다.
"저희는 남겠습니다."
이대현 공사의 말이었고 그 뒤로 14명의 대사관 직원들이 동의한 요청이었다.
"어, 어째서죠? 철수는 다 끝났는데요."
"월남은 아직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망할거라고 누누히 말씀드렸어요! 참전용사인 저 부터가 말했는데 대체 왜···."
은서의 항변에 이대현 공사가 웃으며 답했다.
"국가는 국민을 지켜야 하니까요."
국군만 지키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상위의 범주 국가 역시 국민을 지켜야만 한다. 이대현 공사의 간단한 변형이 은서의 관심을 끌었다. 활짝웃는 한국전쟁의 참전용사. 지금은 외교관이 되어있는 중년의 신사는 자신의 황태녀에게 당당히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게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유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죠."
"저도 받아들일까 합니다. 동맹국의 패전, 미국의 배신. 그걸 통해 냉정히 분석했을 때 최악중의 최악의 가능성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항구가 텅텅 비었는데 아직도 최악이 남았다구요?"
"지금껏 우리는 피난민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죠. 1만 명이 될거다 2만 명이 될거다 외교부와 제국익문사가 제각각 다르게 추산할 정도로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그렇긴 한데···."
"배 편으로 피난가는 인원이 7,300명. 민항기와 공군 수송기들이 피난시킨 인원이 18,075명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총 인원 25,375명. 두 기관의 예측이 모두 틀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대한제국과 관련 없는 사람은 빼야해요!"
"관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네?"
"대한제국과 월남의 우호관계가 10년이 넘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됐죠. 1956년에 수교했으니까 무려 19년 우정이군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적관계를 맺었겠습니까? 누군가에겐 친구였고, 내 아내의 친정 식구들이었을 겁니다. 아내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가 있었을 것이고, 그 어머니의 친정 식구들이나 형제의 가족들까지 있을겁니다."
"아니 대체 그럼···."
"그 뿐입니까?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대한제국 국군에 협력한 사람들. 그들 역시 우리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가족들까지 계산하기 시작하면 피난민의 숫자는 제국익문사의 추정치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명단에 있는 우리 국민 모두를 구출했습니다. 하지만 명단에 없는 국민도 있습니다. 70년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행정능력으론 모든 사람을 100%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고, 불법체류자까지 파악하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니까요. 베트남 사람과 조선 사람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이도 있는데 그들은 어느 민족이랍니까? 조선의 피는 흐르는데 베트남 국적인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탄손누트 공항에선 미국의 수송기들이 바쁘게 오갔고, 헬기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미국도 햇갈릴겁니다. 월남을 버릴지 말지 생사결정권을 쥐고 있던 녀석들이 저렇게 허둥지둥하잖습니까? 워싱턴의 결정은 진작에 이루어졌을 건데 철수 준비가 어설프기만 합니다.”
미국에서도 대한제국처럼 피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미국의 사이공 철수 작전은 워싱턴에서 직접 지휘하며 CIA까지 동원되고 있었는데, 수송기를 보내고 또 보내도 규모가 줄지를 않았다. 공항에선 아직 문을 두드리는 미국인이 많았고 대사관에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베트남 사람이 있었다.
<우리도 피난시켜주세요! 이 아이만이라도 부탁드려요! 아버지가 미국 사람이에요!>
<난 통역가였소! 미국을 위해 일했으니 나도 같이 피난시켜주시오! 공산당 놈들에 붙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오!>
<난 경찰이었어! 빨갱이 놈들에게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살려줘!!!>
여기에 '월남이 무너질리 없다' 자만하는 가브리엘 마틴 대사의 나태까지 겹쳐서 철수작전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대현 공사는 결심하여 말했다.
“서류상에 잡히지 않은 우리 국민이 더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역시 미련이 남습니다. 그러니 남게 해주십시오.”
"배편이 끊기면 피난이 어려우실 거에요."
“전하께서 보험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까? 미국 대사가 도와주기로 했으니까요. 저희는 마지막 날까지 사람들을 모아 그곳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곳에서 헬기를 타면 사이공을 탈출할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전하."
은서는 고심했다. 이대현 공사가 최악중의 최악을 겪는다면 어떤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 있을까?
'대사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럼 해결은 미국에 달렸다. 얼마나 신속하게 철수작전을 진행해 사람을 줄이느냐에 승패가 달릴테니까.
'월남의 패망이 생각 이상으로 빨리 올 수도 있어. 피난을 다 마치지도 못했는데 북베트남군이 시내로 밀고 들어오면··· 게다가 이대현 공사님은 제국익문사 요원이잖아. 현직 요원이 포로로 잡혀버리는 사태는 국가 차원에서 비상 사태야.'
그래서 은서는 말했다.
"이대현 공사님은 현직 요원 신분이세요. 포로로 잡힐 경우 국가 기밀 누설의 우려가 큰데요?"
"하지만 전 외교관입니다. 이곳 상황을 저보다 많이 아는 최고 책임자는 또 없을 겁니다."
"공사님 만큼은 안돼요."
"제가 남아야 합니다. 공사급 지위의 고위 외교관이 아니면 미국의 도움을 얻어내기도 쉽지 않을겁니다. 전 제국익문사의 요원이었고 이곳 현지의 CIA 책임자도 알고 있으며, 직원들과 국민들의 피난을 도울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 논리도 맞다. 제국익문사가 보낸 백색요원쯤 되는 고위공직자라면 미국 대사관도 자유롭게 드나들며 마틴 대사와 협상을 벌일 수 있는 외교적 파워가 있다.
그래서 은서는 호위병력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강 소령님!"
은서의 부름에 제국익문사가 파견한 최정예 요원. 실미도 부대의 책임자가 달려왔다. 중공군으로 위장하여 조선노동당 1호까지 암살했던 잠입의 최고 능력자. 지금은 친위대로 위장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실미도 부대의 힘을 빌려도 될까요?"
"어떤 분부라도 내려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완수하겠습니다."
은서는 비장한 각오로 강 소령에게 말했다.
"이대현 공사님을 도와주세요. 현지 교민들의 마지막 철수를 맡겠다 하시는데 제 생각엔 위험할거에요. 언제 북베트남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요."
그러자 강 소령이 황태녀의 걱정거리를 깨달아 말했다.
"걱정하시는 부분 이해했습니다. 여차하면 북베트남군으로 위장해서라도 반드시 모셔오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중공군으로 위장했던 솜씨라면 북베트남 군으로도 위장할 수 있을테다. 그런 능력을 전문적으로 기른 제국익문사의 특수부대였다. 그들이라면 사이공이 함락된 상황에서도 적군으로 위장해 탈출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내가 헬기를 보내면 돼. 난 황태녀니까. 미국 지휘관을 설득한다면 헬기 한 대 쯤은···.'
그래서 자신있게 약속했다.
"제가 어떻게든 헬기를 보내볼게요! 미국 대사관에서 기다려주세요!"
"예! 전하!"
그렇게 필승의 약속이 오가는 뉴포트 항구의 마지막을 보내며 이대현 공사와 이은서는 각자의 길에 나섰다. 사이공의 도심으로 돌아가는 외교관들의 뒷모습과 사이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황태녀의 수송함이 엇갈렸다.
'버리고 가는게 아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을 구출해오겠어···.'
해가 지고 있었다. 사이공에 어둠이 깔리면 메콩강 하구로 나아가는 해군 수송선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구불구불한 강을 타고 가야하는데 등대조차 없다. 전쟁에 휘말려 모조리 파괴됐으니까. 그래서 해군 장병들은 강가에 손전등을 비추며 장님같이 항해를 했다.
배가 좌초되어 고립될지도 모르는 상황. 해군 제독과 선장이 한사코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환경에서 키를 잡고 있는 조타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부탁하네! 우리의 운명이 자네한테 달렸어!"
"맡겨주십시오! 선장님!"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