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95화 (95/131)

〈 95화 〉 Ep10. 국가가 무너지는 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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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의 크리스마스도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이 날도 휴가를 쓰고 덕수궁으로 놀러온 은서는 명동의 한적한 다방 구석탱이서 진혁이와 다방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덕수궁 제2부속비서실에서 찾아준 다방은 규모가 제법 큰 곳이었고, 그 중 구석탱이 좌석은 화초와 벽 따위로 절묘하게 가려져있어 누가 앉아있는지 안보이는 은밀함을 갖고 있다.

멋진 남자(?)를 찾아 사랑을 쟁취한 진희 언니에 따르면 이렇게 은밀한 곳에 다정히 앉아 DJ가 들려주는 낭만적인 레코드 노래를 듣는게 요즘 청춘들에게 핫한 데이트 코스랬다.

'고마워 진희언니!!!'

과연 제2부속비서관의 솜씨답게 황태녀의 크리스마스 데이트 장소는 은은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났다. 설탕과 프림, 커피를 황금비율로 섞어낸 다방 커피는 비교를 불허하는 달달함과 은은한 풍미가 느껴졌고, 뮤직박스에 앉아있는 다방DJ는 사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낭만적인 레코드판의 노래를 엄선해서 틀어주고 있었다.

“진혁아~♥”

그렇게 마련된 다방의 은밀한 데이트 좌석에서 은서의 간드러지는 사랑 목소리가 진혁이를 긴장감으로 몰고갔다.

오늘도 각목같이 굳어져버린 그 남자 김진혁.

"왜, 왜 그러십니까? 전하···."

식은땀을 흘리는 진혁이에게 은서는 더욱 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아 어깨를 기대고 말했다.

"우리 혁이~ 서른살 되면 뭐할거야~?"

"그, 그야···."

"아흥! 고민하는 척 하긴~♥"

고민하던 진혁이가 식은땀을 흘리던 그 때 다방 DJ가 마이크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신청곡은 이은서··· 어라? 황태녀 전하와 성함이 같으시네요? 남자친구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고 하셨어요. 요청곡은···.]

DJ가 당황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우··· 정말 사연이 많으신가봅니다.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이크 들려드립니다.]

은서가 신청곡을 넣었다는 사실이 수행원인 김진혁 중령을 긴장으로 몰고갔다. 혹시 들키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긴장감. 하지만 DJ가 왜 망설였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1968년 송창식, 윤형주가 결성한 트윈폴리오가 부른 노래 '웨딩케이크'는 가사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아니 지금 누가 분위기 깨게 이런 노래를?>

다방에 앉은 청춘남녀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보면 결혼식장에서 부르면 딱일 거 같은 제목이다. 하지만 가사는 완전히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DJ가 틀어주는 레코드판의 앨범에선 통기타 연주음과 함께 이런 가사가 흘러나왔다.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않는 사람에게로.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가네 그대 아닌 사람에게로.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사랑치 않는 사람에게로. 마지막 단 한번만 그대 모습 보게하여 주오 사랑아.>

사랑하는 이를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만 하는 서글픈 여인의 운명이 감미로운 포크송으로 흘러나와 크리스마스 연인들에게 불쾌감을 심어주고 만다.

<완전 진상이야 진짜.>

<또 또 불쌍한 아가씨가 제목만 보고 속아선 잘못 신청했구만.>

이해할 수 없는 멜로디에 진혁이가 당황하듯 물었다.

"공주님?"

"넌 꼭 당황하면 전하 대신 공주님이란 호칭이 나오더라~♥"

"남자친구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노래가 지금···."

그 때 마지막 가사가 진혁이의 가슴에 쐐기를 꽂았다.

<남겨진 웨딩 케익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네>

그러자 은서가 태도를 바꾸어 썩은미소를 지으며 진혁이에게 말했다. 그 여자 이은서. 30세 진급대기의 확정적 노처녀. 그녀의 살기어린 경고음.

"우리 5일 뒤면 서른살이다? 알지?"

"그렇긴 합니다만?"

은서가 진혁이의 품에 앵겨 슬픈 표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온 나라가 걱정하는거 알지? 황제 폐하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30대가 되도록 결혼 소식이 없대잖아. 이거 완전 국가비상사태라구?"

"듣고보니 그렇긴 합니다만 일단 좀 떨어지시고···."

진혁이의 거부를 거부하며 은서는 더더욱 진혁이 품으로 달라붙어 말했다.

"조선 황실이 단절된대잖아~ 자꾸 이러면 나 진짜 마음에도 없는 남자랑 결혼해야 한다구. 정말 그걸 원하는거야?"

"이건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급진적인 전개가 이루어질리가 없지 않···."

"이렇게 멋진 왕자님이 지금껏 몇 번이나 지켜줬을까~ 공주는 푹 빠져버렸는걸~?"

은서가 눈물을 글썽이며 진혁이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곤 절박한 마음을 담아 간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남겨진 웨딩 케익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대잖아... 이 밤이 지나가면 난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구. 마음에도 없는 재벌집 도련님에게 팔려가는 공주님의 인생이란···."

그 말엔 진혁이가 딱 잡아떼며 강력히 말했다.

"앞뒤가 바뀌었군요. 일류 기업의 재벌집 후계자라도 황태녀 전하와 결혼하면 데릴사위로 들어와야지 어딜 무엄하게··· 팔려오는건 그쪽이지 전하는 아닐겁니다. 절대로!"

흥분해버린 진혁이를 보며 은서가 놀라며 물었다.

"어머? 너 지금 질투하니?"

"어 이건 그러니까···."

"너도 꼴에 남자라고. 에구··· 진혁아~ 사랑해~♥"

그렇게 노골적으로 앵기며 은서의 29세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각 덕수궁에서는 은서를 두고 심각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방부장관 김종규가 황제에게 알현을 청한 것이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불길하게 느껴지는 겨울밤의 덕수궁. 어둠에 잠긴 황제의 집무실에서 김종규 장관은 말했다.

"지금 당장 전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자네, 내 딸내미 머리카락을 자른 이후로 계속 피해다닌걸로 아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당장 곧바로 전하를 뵙고 용서를 구해야겠습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잖나? 내 딸도 자유시간을 줘야지. 좋은 시간을 망칠수는 없지 않겠나? 그리고 그 때 그 사건은 엄밀히 말해서 내 잘못이야. 자네는 내 명령을 듣고 그대로 따랐을 뿐이고."

"아니오. 제가 사죄해야 합니다. 명령을 내린건 폐하시지만 집행한건 저니까요. 지금 전하께 가장 원망스러운 존재는 분명히 저일겁니다."

그러면서 김종규는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에 놓으며 괴로운듯 말했다.

"대한제국의 국방부장관으로서 군부의 일치된 견해를 보고드립니다. 황태녀 전하께서 월남전에 파병되시어 목숨을 걸고 지킨 그 나라. 베트남 공화국은 조만간 멸망할 겁니다."

그러자 이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마저 그리 생각하나? 월남이 무너질거라고?"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을 비롯해 육군본부의 주요 장성들까지 일치된 견해입니다. 누구 하나 월남의 패망을 확신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보고서 때문이지요."

"월남은 우리 동맹이야. 공동의 적을 두고 함께 싸운 혈맹이지. 아시아에서 자유진영의 가치를 수호할 형제의 나라를 두고 오늘 망하니 내일 망하니 하는게 군인들이 할 짓인가?"

"동맹이기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는겁니다.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많았으니까요."

김종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했다.

"황태녀 전하께선 월남전 참전용사이십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던 그분이 성심을 굳게 유지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하를 잃고 자신도 죽을뻔하고 그런 지옥같은 고생을 했지만 월남의 자유만큼은 지켰다. 그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걸 아는 놈이 월남이 망할거라는 소리를 지껄이는건가?"

김종규 장관은 참담한 심정으로 답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하를 찾아뵙고자 함입니다. 월남의 패망이 확실시 되는 지금 진실을 말씀드리고 무릎꿇고 사죄드려야 마음의 준비도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더더욱 절박하게 말했다.

"월남은 무너질겁니다. 폐하께서도 이 보고서를 읽어보셨다면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의 생각이 있으실겁니다. 폐하는 누구보다 뛰어난 군인이셨으니까요."

"아니, 나는 절대···."

"지금은 냉정히 바라보고 앞으로의 충격을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 월남이 무너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월남 사람들이 공산정권 치하에 떨어지고, 남베트남과 미국, 대한제국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전범으로 취급받아 보복당할겁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모든 군인들은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혀 불명예스러운 삶을 보내겠지요. 그 군인이 바로 황태녀 전하이십니다."

"그건···."

"무너지는 월남 정부를 보며 전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자신이 무능해서 지켜주지 못했다. 무능해서 부하들조차 지키지 못하고 혼자 살아돌아왔다. 그리 자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김종규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고백했다.

"송구하오나 그 연옥에 밀어넣은 집행자는 저였습니다. 가기 싫다는 전하의 머리카락을 잘랐고, 사관학교로 던지듯 보내버렸으며, 그곳에서도 전하를 엄격한 군기로 다스렸습니다. 그렇게 군인으로 만들어 전쟁터로 보낸 실무자가 저였단 말입니다."

그러자 이연이 성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만하지, 김종규 장관!"

"하지만 폐하!"

"내가 시킨 짓이야. 딸내미 머리카락 자르란 것도 나였고, 엄격한 군기로 가르치란 것도 나였고, 전쟁터로 보내란 것도 나였어! 모두 내가 한 짓이라고!"

"그걸 집행한 건 저입···."

"내 책임이야!"

이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했다.

"죄책감을 느껴도 내가 느껴야 하고, 벌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 해. 녀석이 돌아온 72년부터 2년간 많은 노력을 해왔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 피를 이어받았으니 나처럼 잘 해낼 거라고. 그렇게 오만하고 무신경하게 판단한 이 빌어먹을 못난 애비의 죄악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잘못을 대신 짊어질 생각 하지 말고 냉정하게 판단해봐."

"......"

"월남이 정말 무너지겠나? 놈들은 미국과 방위조약을 맺었어. 군사 동맹이라고. 월남이 적의 침공을 받으면 미국이 도와줄텐데 그럼에도 정녕 중정의 보고서를 믿나?"

김종규 장관은 꼿꼿한 자세로 비장하게 답했다.

"외교부장관도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미국은 대통령까지 하야시킬 정도로 의회 권력이 막강한 나라니까요. 대행직이나 다름없는 포드 대통령은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겁니다."

"고작 그딴 이유로 미국이 월남을 배신할거다 그 말인가? 민주주의 때문에? 그딴 논리면 우리와 미국 사이에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도 아무런 의미가 없겠군. 미국 국민들이 반대하면 무용지물이 될테니까."

"이론상으론···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미국이 배신해서 월남이 버려지고 혼자 남은 월남이 월맹과 전쟁을 벌여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그 모습을 내 딸내미가 보면 아주그냥 억장이 무너지겠구만."

"큰 충격에 빠지실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거야. 미국은 내게 분명히 말했지. 세계의 경찰이 될거라고. 경찰이 동맹을 죽게 내버려두겠나?"

이연의 믿는 구석은 두가지였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 체결된 휴전조약. 프랑스 파리에서 강대국들이 중재하여 맺은 그 조약은 두 나라간의 교전행위를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미국과 월남 사이에 맺은 상호방위조약이었다. 남베트남이 침공을 당하면 미국이 참전해 지켜준다는 대한제국과 똑같은 내용의 조약이 그들간에 체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켜질까?

미국인들은 전쟁에 지쳤고, 월남을 향한 재정 지원안은 의회에서 부결되었으며, 이연은 동맹의 약속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중앙정보부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는 사이 북베트남군은 휴전조약을 무시하고 남베트남을 공격했다. 대규모 공세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충돌이 베트남 중부 지역의 마을 프억빈에서 있었고 월남의 군인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군인이 적군 앞에서 도망을 쳤다.

국가가 무너지는 날이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너지는 나라는 월남. 은서가 지켜주고자 했던 싸움의 이유였다.

그 시각 은서는 진혁이와 2차를 가고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크리스마스 저녁의 길거리에서 소주병을 불고있는 황태녀는 사랑이라는 가면으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진혁아 사랑해~♡>

30도가 넘는 70년대 희석식 소주가 황태녀의 목구멍으로 생수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사랑해 행복해 사랑해 행복해 사랑해 행복해.

어명이다. 누구도 내 행복을 의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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