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Ep10. 국가가 무너지는 날 (9)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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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2월 13일
제국익문사 3법 개정을 놓고 국회 하원이 3일째 무제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몇 시간이면 끝날 본회의가 이지경까지 몰린건 다름아닌 기네스북 때문이었다.
<김대정씨의 5시간 19분짜리 연설을 세계 신기록으로 인정함. 해당 연설은 본회의 안건에 관련한 내용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기에 자격 요건을 갖추었다고 판단하였음.>
대한제국 국회가 뜬금없이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자 서방 외신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영국의 BBC가 그랬다. 그들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무제한 토론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BBC 저녁 뉴스 첫번째 보도였다.
<브라이언 기자. 대한제국은 우리처럼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나라로 알고 있는데요.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구요?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주시죠.>
<예, 저는 지금 덕수궁 앞에 나와있습니다. 이곳은 한국의 황제가 사용하는 궁전인데요. 생각보다 조금 작죠? 하지만 이곳은 입헌군주정을 실시하고 있는 나라 중에선 가장 강력한 권력이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군주가 직접 나라를 통치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한국은 군주가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입헌군주국입니다. 의회도 황제를 기준으로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현재 논의되는 법안이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법안인가요?>
<kcia. mi6="" 같은="" 격렬한="" 공화주의자들의="" 국가의="" 군주에게="" 귀속될지="" 기관이="" 반대가="" 사안이라="" 여부를="" 우리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있습니다.="" 정보를="" 정하는="" 책임지는="" 첩보조직이="" 치면="">
영국은 시작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도 기자들이 찾아와 국회 하원의 상황을 취재하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아예 실시간 생중계를 하며 제국익문사 3법의 처리 결과를 주목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전제군주제로 바뀔 것인가?>
군주를 두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대한제국의 국회를 주목하게 된 상황.
국회 본회의장까지 찾아온 눈엣가시 같은 서방 기자들을 뒤로 한 채 이범석 총리는 골골대며 보약을 마시고 있다.
"죽겠구만 이거···."
옆자리에 앉아있는 김종규 부총재(겸 국방부장관)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이러다 몸 상하시겠습니다."
"아 저놈들이 끝내야 갈 거 아닌가? 총리인 내가 자리를 비우면 무슨 일이 터질 줄 알고?"
보약을 마시던 총리가 뒤를 돌아보자 외국 기자들의 카메라가 쏠린다.
“적당히 하고 끝낼라 그랬더니··· 외신들 보는 앞에서 멱살잡이를 할 수도 없고···.”
끝내고 싶은데 끝낼 수가 없게 됐다. 강제로 밀어붙여서 어거지로 끝낼 방법이 머릿속에 많이 있었지만 그놈의 외신기자가 문제. 세계가 보는 앞에서 싸움질을 하기엔 이범석의 체면이 용서치를 않았다.
결국 고심끝에 하원의장의 중재를 받아들이니 여야 대표들이 비밀 협상에 돌입했다. 총리의 나이 75세. 연로한 그가 쉬지도 못하고 무제한 토론에 잡혀 있으니 여당이고 야당이고 걱정하는 표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걸 아는지 더더욱 골골대는 시늉을 하며 능청맞게 말하는 그 노인의 한마디.
"70먹은 노인네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슬슬 끝내지 그래?"
김영현 총재가 무안한듯 웃으며 답했다.
“총리님께서 해주신 배려가 하해와 같습니다만, 제국익문사 3법은 저희들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연설때도 계속 강조하지 않았나? 적군파 놈들도 모자라 소련까지 테러를 하고 있어. 이 나라 안보가 걸린 문제일세.”
"하지만 황실의 직속으로 가는건 민주주의 측면에서 봤을 때 심각한 문제가 있지요."
"내가 그래서 견제 장치까지 제안했지않나? 장관 임명도 국회 동의 거치게 하고, 하원에 정보위원회도 설치하고. 이만하면 충분히 양보한 거 같네만."
하지만 김영현 총재는 알고 있었다.
“그 양보안도 결국 폐하께서 정해주신 협상지침이겠지요? 다 계산된 결과가 아니냔 말입니다.”
“어허 참···.”
고개를 빤히 돌리는 이범석 총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가지고···.’
김영현 총재는 더욱 몰아붙였다.
“여하튼. 저희들을 설득하시려면 폐하께서 정해주신 기준선 말고 그 이상을 양보해주셔야 할겁니다.”
김대정 부총재도 몰아붙였다.
“솔직히 총리님도 원해서 하시는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민의의 대표자로서 국가의 행정을 책임지셔야 할 분이 폐하의 그늘에 가려져 2인자 노릇을 하고 계시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냔 말입니다.”
그러자 중간에 앉아있는 하원의 국회의장이 조심스레 중재안을 올렸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감찰관을 임명해 제국익문사로 파견하는 겁니다. 정치인 사찰이라던가 고문이라던가 불법행위를 못하게 감시한다면 좀 낫지 싶은데요.”
그러자 이범석 총리가 노려보며 말했다.
"기밀을 중요시하는 기관에 외부 감찰관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외부감찰관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낸다면 될 일입니다. 정보위 의원들이나 감찰관이나 기밀에 접근하는건 매한가지 아닐런지요? 이쯤에서 총리님도 양보하시고···.”
"에헤이 참···."
결국 이범석 총리는 못이기는 척 중재안을 받아주었다.
여야 합의로 수정된 제국익문사 3법은 본회의 표결을 거쳐 상원으로 올라갔고 안수진 상원의장 주도로 진행된 심의에서도 해당 법안은 무난하게 통과된다.
하지만 협상안이 하원의장의 아이디어였을까?
***
제국익문사 3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은 곧바로 덕수궁에 전달되었다. 오밤중의 집무실에서 황제를 독대하고 있는 이화는 총리의 속을 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
“능구렁이 같은 분이십니다.”
“감찰관 파견 말인가?”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 중재안을 받으셨지만 제 눈은 속일 수 없죠. 왜냐하면 그 협상안 제가 드린 마지노선이었으니까요.”
“아 그랬지···.”
“제가 총리님께 드린 협상카드는 총 3개입니다. 장관 임명시 국회 동의를 받을 것, 하원에 정보위를 설치하는 것, 정보위를 통해 제국익문사를 감찰하는 것.”
“그 중 2개를 먼저 내밀고, 나머지 하나는 하원의장 입을 빌려서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 포장하셨죠. 정말··· 산삼까지 챙겨드시는 분이 연기는 얼마나 잘하시던지···.”
“산삼?”
이화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황제에게 말했다.
“무려 100년근 산삼이랍니다. 효심 지극한 아드님이 직접 구해다 올리셨다나 뭐라나···.”
“허허 참··· 효자 아들을 두셨구만. 아무튼 생각보다 까다로워졌어. 제국익문사를 견제하는 장치가 너무 심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화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두 예상범위라 아무 문제 없을겁니다."
"국회에서 임명한 중립적인 감찰관이 제국익문사를 드나들게 되었어. 누가 될지는 몰라도 그 작자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서 자네와 재필이를 방해할 게 뻔해."
그러자 이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찰관 한명쯤 속이는 건 일도 아닙니다. 폐하."
"예산안은? 제국익문사 예산도 국회가 좌지우지 하잖아?"
"정보기관의 1년 예산은 국가 기밀입니다. 제국익문사가 하는 일도, 쓰는 돈도, 쓰는 사람조차 모두 기밀이죠. 의원들이 비밀열람권을 가졌다곤 하지만 정보는 제한적일겁니다."
"사사건건 비협조적으로 나가겠단 말로 들리는군."
"국가 기밀이니까요."
"그래, 아무튼 뭐··· 재필이도 이젠 덕수궁에 자유롭게 드나들겠지. 차지연과 같은 레벨이 됐어."
"그 이상일겁니다."
이화가 미소지어 말했다.
"선배인 제가 비서실장을 하고 있으니까요. 덕수궁의 장관급 인사 3명 중 2명이 중정 출신입니다."
그러자 이연이 꺼림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서실장이면 중간에서 균형을 맞춰줘야지 노골적으로 재필이 편을 들어주면 어떻게하나? 정보는 재필이, 경호는 지연이, 정치는 자네가 맡아서 딱딱 나를 보좌해줘야지. 그렇게 내가 큰 그림을 그리면 이범석 총리가 실무를 집행하는 그런 구조가 이상적이지 않겠냔 말이야."
"차지연 중장은 무능하거든요."
그러자 이연이 기가차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허허 참··· 그러니까 진작 갈아치우자니까. 총까지 맞은 녀석이 용서를 청하고 있으니 이걸 처벌할 수도 없고."
그러더니 이화의 오른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은 풀었지만 얼마 전까지 깁스를 하고 있던 '아픈 팔'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차지연 때문이다. 그가 황제를 제대로 호위했더라면 몸을 던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차지연이 경질시키고 새 인물을 뽑는게 어때? 유능한 인재가 앉아야 자네 부담도 줄어들 게 아닌가? 1계급 강등은 너무 가벼운 감이 있어."
하지만 이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능하지만 믿을 수 있는 친구죠. 실무적인 측면은 경호차장과 수도방위사령관이 해줄테니 그 자리는 그냥 충심 깊은 녀석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다가 8.15 같은 사단이 났잖아?"
"능력은 키우면 되겠죠. 지금도 손에 불이나게 공부하고 있을테니 안심하셔도 될겁니다."
이화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974년 덕수궁의 파워게임 최종 승자는 자신이다. 비서실장의 몸으로 한쪽엔 정보권력을 쥐었고 또 한쪽엔 군사권력을 쥐었다. 차지연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본인은 이제 친위대도 쥐락펴락 할 수 있다.
<비서실이야 말로 덕수궁의 중심이어야 하니까.>
8.15 암살미수 사건에서 허둥지둥해버린 차지연은 완벽한 무능아로 낙인찍혔다. 황제 폐하는 물론 부하들조차 그를 알게모르게 불신하고 있었다.
'이대로 무능아가 될 순 없어!!!'
그래서 그는 공부라는 걸 해보고 있었다. 다저녁때까지 집무실에 틀어박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선 정치부터 군사, 경호까지 모든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비서실장님께 빚까지 졌으니 친위대장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이거!'
그것은 이화가 의도한 정치적인 계산이기도 했다. 친위대장에 김종규 같은 인재가 들어오면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하지만 차지연 같은 무능한 인재가 앉아서 '용서'라는 은혜를 입으면 내사람이 된다. 차지연은 1계급 강등을 용서로 이해했고 은혜를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내 정치 생명이 걸렸어!'
부하들의 노골적인 무시를 받는 지금. 친위대장직을 지킬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비서실장님 뿐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유능해져야만 하는 이유. 비서실장님께 충성을 바쳐야만 하는 이유. 그는 남산의 지하실로 끌려가 뚜렷하게 보았다. 김일성을 암살한 중앙정보부의 무시무시한 능력. 그런 정보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최고의 실세.
비서실장 이화.
그녀를 이길 수 없음을 차지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괴물같은 여자는 분명 덕수궁의 실세였다.
</kcia.>